올해 갑신년 생일의 에피소드들

3월 12일의 여파 속에서

등록 2004.03.15 07:19수정 2004.03.1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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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일이 겹친 생질녀와의 통화


지난 13일은 음력으로 2월 23일, 내 56회 생일이었다. 음력을 상용하던 시절에 태어났으므로 음력으로 생일을 지내는 것은 당연하다.

내 생일은 대개 사순절 안에 위치한다. 사순절은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부활대축일을 잘 준비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고통에 동참하는 뜻으로 절제와 극기와 자선,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하는 때이다.

생일이 사순절 안에 위치하게 되면 자연 생일 밥상이 그다지 색다르지 않게 된다. 더욱이 천주교 신자들이 사순절 동안 금육(禁肉)을 하는 날인 금요일에 생일이 닿게 되면 도리 없이 고기 없는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

언젠가 한번은 생일이 용케 사순절 밖에(사순절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기억이 명확치 않고) 위치해서 아무 구애 없이 뒷동 동생네 가족과 함께 온 가족이 저녁에 외식을 한 적도 있지만, 그것은 정말 가뭄에 콩 나기다.

올해의 내 생일은 경기도 안양에서 사는 맏이 생질녀의 생일이기도 했다. 생질녀는 양력 시대에 태어나서 양력으로 생일을 지내니, 내 음력 생일과 생질녀의 양력 생일이 겹치기도 하는 것인데, 내 기억으로는 올해의 경우가 처음이지 싶다.


달력장에 생질녀의 생일을 적어놓지 않아서, 나와 생질녀의 생일이 겹친 것을 전날까지도 몰랐는데, 지난해 피붙이 일가붙이 인연붙이들에게 보낸 메일을 일년 후 같은 날 아침 내 홈피의 '가족공동체' 방에 올리는 일을 한 덕에 쉽사리 알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점심 때쯤 안양의 맏이 생질녀에게 전화를 했다. 누님의 여럿 자녀들 중에서 가장 오래 외갓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생질녀였다. 내 누님처럼 맏이의 넉넉한 성품으로 외할머니가 계시는 외갓집에도 평소 신경을 많이 쓰며 사는, 네 살배기 딸을 가진 젊은 엄마였다.


외삼촌으로부터 생일 축하 전화를 받은 맏이 생질녀는 되우 고마워했다. 그러다가 통화 중에 자신의 생일과 외삼촌의 생일이 겹친 날인 것을 비로소 알고 이번에는 몹시 미안해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서로의 양력 생일과 음력 생일이 겹치게 된 것을 신기해하던 우리는 더욱 재미있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어제 3월 12일이 우리 대한민국의 무슨 날이었는지 알지?"
하고 내가 물은 것이 발단이었다.

"그럼요, 잘 알지요. 거대 야당 국회의원들이 무슨 짓을 한 날인지…."
생질녀는 시무룩해진 소리로 대꾸했다.

"네 생일이 아슬아슬허게 하루 비켜난 것을 어떻게 생각허니?"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하마터면 생일 기분 망칠 뻔했지 뭐예요."
"그려? 난 내 생일이 하루 비켜난 것이 되게 아쉽다, 야."
"아쉽다니요? 왜요?"

"어제는 말여, 20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의 발목을 걸어서 넘어뜨리고 짓밟아댄 날이지먼, 바로 그것 때문에 엄청 큰 물꼬가 생기게 된 날이여. 그러니 얼마나 좋은 날이냐. 무슨 말인지 알어 들을 수 있겄남?"
"네. 외삼촌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래서 난 어제가 내 생일이었더라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헌다. 그랬더라면 내년부터는 내 음력 생일을 폐기헤버리구, 해마다 양력으루다 3월 12일을 내 생일루 지낼 텐디 말여. 그걸 생각허니께 하루 비켜난 것이 얼마나 아쉬워지는지 물러."
"정 그러시면 내년부터는 외삼촌 생신을 저와 같이 양력 3월 13일로 지내세요. 그 뜻깊은 날의 바로 다음날이니 그것도 좋지 않겠어요?"

"그럴까? 그것두 괜찮을 건 같긴 헌디…. 그건 한번 생각을 헤보기루 허자. 가족들이랑 상의두 헤야니께…."

맏이 생질녀와 통화를 마치고 나니 옆에서 듣고 계신 눈치 빠른 어머니가 한마디했다.
"음력 생일을 양력 오늘루 옮겨 잡으면, 생일이 사순절 밖으루 나가는 때가 평생 한 번두 읎을 걸, 아마."
"그럴라나요? 그래두 양력 오늘루 옮겨 잡는 문제를 생각헤봐야겠어요. 저 20세기 사람들의 자업자득, 자승자박, 사필귀정, 그리고 우리 21세기 사람들의 전화위복의 진행상황을 지켜보면서…."

지난해 팔순을 넘기신 내 노친은 조금은 복잡한 내 말뜻을 금세 이해하셨다. 나는 그런 노친이 더럭 고마웠고, 그런 노친을 모시고 사는 내가 문득 행복하게 느껴졌다. 팔순을 넘기신 내 노친도 이미 21세기 사람으로 살아가시건만….


(2) 어린 조카딸의 속셈

뒷동 동생네 가족을 내려오게 해서 우리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사순절이기 때문에 외식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지만, 우리 집에서나 동생 집에서나 두 형제 가족이 저녁을 같이 하는 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아침에 내게 전화를 걸어 "큰아빠, 생신 축하 드려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하고 인사를 했던, 올해 초등학생이 된 조카딸 규빈이가 저녁에 큰집에 들어오자마자 재미있는 말을 했다.

"큰아빠 생신 선물은 며칠 있다가 드릴 게요."

큰엄마가 함빡 웃음을 머금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규빈이가 올해도 큰아빠 생신 선물까지 생각한 모양인데, 왜 며칠 후에 드린다니? 생신 선물을 며칠 후에 드리는 법두 있다니?"

규빈이의 대답은 더욱 재미있었다.
"돈이 없었거든요. 오늘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했거든요."

"아니, 니가 무슨 수로 돈을 모은다니? 얼마나 모을려구?"
큰 엄마의 이런 물음에는 규빈이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엄마가 대신 대답을 해주는데,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었다.

"얘가 오늘 성당에 가지 않았어요. 성당 가라구 헌금을 천 원이나 주었는데, 글쎄…."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미사는 토요일 오후 3시에 있는데, 규빈이가 그 초등학생 미사에 가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오후에 잠시 외출을 했던 엄마는 그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고….

"왜 가지 않았대요?"
나는 일순 짚이는 게 있어서 제수씨에게 물었다.

"큰아빠 생신 선물 살 돈을 모은다고, 글쎄…."
"아니 그럼, 미사 헌금할 돈을 빼돌리려구 미사에 가지 않었단 말여?"

제수씨는 규빈이의 무안함을 생각해서인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이야, 이거 큰아빠가 본의 아니게 우리 조카딸을 죄 짓게 만들었네. 성당에 가지 않게 헌 죄에다가 미사 헌금을 빼돌리게 헌 죄, 두 가지씩이나 죄를 짓게 만들었으니 큰 아빠의 생일 죄가 크다, 야."

나는 껄껄 웃지 않을 수 없다. 어린아이가 큰아빠의 생신 선물 비용 마련을 위해 성당에도 가지 않고 엄마가 준 미사 헌금 천 원을 빼돌렸다는 것은 일단 옳지 않은 일이었다.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설명을 해주어야 할 사안이었다.

아이는 아직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할 나이가 아니었다. 만 열 살, 3학년이 되어야 첫 고해를 하고 첫 영성체를 할 수 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그런 행위를 죄라고 볼 수는 없을 터였다. 어린아이다운 귀여운 행위로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큰아빠의 생신 선물 비용을 마련하는 것보다 성당 미사에 가고 헌금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려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일 터였다. 그런 사소한 일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기초 가정교육의 중요한 부분일 터이므로….

그리고 어린아이 시절부터 옳고 그름과 어떤 일의 경중(輕重) 따위를 잘 분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훗날 민주 시민으로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 터이므로….

어린 조카딸에게 일단은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서도 어른들의 몫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또 한번 동생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면서…. 하루 전날 가슴에 가득 쌓인 울분과 상심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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