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이 있는 뉴질랜드의 우편함

(포토에세이) 뉴질랜드의 우편함으로 문화읽기

등록 2004.03.25 13:28수정 2004.03.25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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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여기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난 화단 한가운데 새집이 하나 서 있군요. 지붕도 있고 아주 근사한 새집입니다. 그런데 그 새집에 숫자가 적혀 있군요. 새들에게도 주소가 필요한 걸까요?

위의 사진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습니다. 꽃밭 한가운데 서 있는 새집처럼 보이지만 사실 저건 우편함이랍니다. 그리고 그 우편함의 한가운데 쓰여 있는 '122A'라는 숫자는 주소이고요.

대부분의 집들이 단독 주택인 뉴질랜드의 집들은 이처럼 집집마다 우편함을 하나씩 집 앞에 세워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편함에는 번지수를 나타내는 숫자가 써 있어서 운전하면서도 그 주소를 보고 쉽게 집을 찾을 수 있도록 되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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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이 우편함들은 대부분 비슷한 모양이지만, 자세히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집이 세워진 위치에 따라, 집 주인의 성격에 따라, 각각 다른 표정들을 지닌 우편함들이 서 있기도 하지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하거나 교외로 드라이브를 다닐 때마다 나는 우편함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알게 되었지요. 우편함의 기능이야 모두 똑같지만 그 표정은 도시와 시골이 다르고, 언덕배기 초원과 푸른 바닷가가 다르고, 집 주인의 성격과 취미에 따라서도 달라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상의 물건인 우편함에서 뉴질랜드의 문화까지도 읽어내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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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잠깐 위 우편함을 한번 보시기를. 우편함이 아니라 무슨 기계처럼 생겼군요. 맞습니다. 이건 못쓰게 된 엔진을 이용해서 만든 우편함이랍니다. 기름만 부으면 당장이라도 하얀 연기를 씩씩 뿜어내면서 피스톤이 움직일 것 같군요.

이 우편함을 보던 순간 나는, 역사상 최초로 원자 구조를 밝혀낸 어니스트 러더퍼드 경이나 <반지의 제왕>으로 아카데미를 휩쓴 피터 잭슨처럼 솜씨 좋은 뉴질랜드인들의 손재간(Kiwi Ingenuity)을 떠올렸습니다.


이 우편함도 아마도 손재간 좋은 집주인이 이제 폐차할 신세가 된 자동차를 그냥 내다버리기가 아까워서 엔진을 떼어다가 멋진 우편함으로 개조시킨 것일 테지요.

그러니 우편함에서 문화를 읽었다는 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닌 셈입니다. 이 우편함은 손재간 좋은 뉴질랜드인들의 D.I.Y. 문화와 뭐든지 재활용해서 다시 쓰는 중고 문화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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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뉴질랜드의 우편함은 도시와 시골에서 다른 표정을 보여줍니다. 많은 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도시에서는 집들마다 하나씩 우편함이 서 있고, 반대로 자동차로 한참을 달려야 집이 몇 채씩 드문드문 나오는 외진 시골에서는 우편함들이 떼로 몰려 있는 경우가 많더군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번잡한 도시에서는 사람들로부터 좀 떨어져서 외따로 혼자 서 있는 것이 맘이 편하고, 좀처럼 사람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적막한 시골에서는 우편함끼리라도 함께 모여 있는 것이 마음이 푸근해지는 탓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외진 시골에 우편함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은 우편 배달부를 배려한 조치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상당수의 시골집들은 본 도로에 이어지는 진입로를 한참 동안 올라가야 나오니, 우편 배달부가 일일이 그 집들마다 돌면서 우편물을 전달한다면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요!

그러니 아예 도로변에 한꺼번에 우편함들을 만들어 놓는 것이지요. 그래도 나는 시골에서 만나게 되는, 저 나란히 앉아 있는 우편함들을 보면,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시골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읽혀져서 마음이 짠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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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그런데 한참 동안 진입로를 올라가야 하는 외진 곳에 있는 집일 경우에는 우편물을 확인하러 나오는 것도 제법 시간이 걸리는 일일 겁니다. 물론 자동차로 오갈 때, 우편함을 확인하면 되겠지요. 그런데 일부러 우편함 옆에 정차해 놓고 우편함을 열어 보았는데, 우편물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러면 조금 짜증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위 우편함은 그런 짜증이 날 염려가 없습니다. 우편함의 왼쪽에 마치 깃발처럼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빨간색 작은 표지판이 보이지요. 그게 바로 오늘 새로 우편물이 배달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우편 배달부가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그 빨간 표지판을 세워놓으면 집 주인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도, 그리고 긴 진입로를 걸어 내려오지 않고도, 새 우편물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당연히 허탕칠 일도 없게 되지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한참만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효율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뉴질랜드의 문화를 드러내주는 작은 표지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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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그러나 뉴질랜드 하면 떠오르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넓은 초원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떼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실제로 오클랜드의 도심에 있는 원트리 힐 공원에서도 풀어 놓은 양떼들을 쉽게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양떼들이 있는 곳에 반드시 함께 있어야만 하는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양몰이 개랍니다. 시골의 넓고 한적한 목초지에서 양을 방목하는 사람에게는 개가 사람보다 더 소중한 친구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넓게 펼쳐진 초원을 옆에 끼고 달리다가 만난 위 특이한 우편함은 새까만 양몰이 개의 모습을 하고 있네요. 물론 이 개의 몸통에 씌어진 '윌슨'이라는 이름은 개의 이름이 아니라 집주인의 이름일 테지요.

양들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우편물까지도 받아주니, 뉴질랜드인들이 개를 끔찍이 사랑하는 것이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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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한편 뉴질랜드는 섬나라라서 아름다운 해변이 많습니다. 바닷가를 따라 해안도로가 나 있고 그 도로를 따라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클랜드만 해도 사방으로 바다에 면해 있으니, 뉴질랜드인들에게 바다는 어렸을 때부터 삶의 일부분인 셈입니다.

그러니 우편함에도 바다 냄새가 나고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조가비들로 예쁘게 장식한 위 우편함에 귀를 대고 있으면 파도 소리가 들려올 듯합니다. 그리고 이 우편함으로 날아드는 편지들은 바다 건너 저 먼 태평양의 작은 섬들의 소식을 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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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그런데 여기 바다 속 소식까지 전해주겠다고 나선 우편함이 있네요. 돌고래 우편함. 오늘 우리 집에서 가까운 바닷가 마을을 돌다가 만난 우편함인데, 정말 깜찍하기 이를 데 없는 우편함이었습니다. 언덕 아래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집 앞에 막 바다에서 솟구쳐 오르는 모습으로 서 있는 이 돌고래 우편함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고국으로 보내는 편지 한 자 적어, 이 돌고래의 뱃속으로 부치면 밤새 태평양을 건너가 고국의 그리운 이들에게 내 소식을 전해줄까요? 그러리라 믿습니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은 바로 저 돌고래에게 부탁해서 내가 띄우는 그리운 연서입니다.

뉴질랜드의 우편함들을 보면서 내가 보았던 이곳 사람들의 삶의 풍경과 문화의 표정, 그리고 결국은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고만 내 그리움을 봄빛 가득한 고국의 그리운 이들에게로 띄웁니다. 모두 안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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