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새 마누라 생겨서 좋겠네!"

<초보 연기자의 영화출연기1> 뉴질랜드서 단편영화 오디션 보다

등록 2004.04.05 14:45수정 2004.04.0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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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말해둘 것은 글의 제목만 보고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것! 내가 출연했던 영화는 고작 15분짜리 단편영화이니까. 더군다나 이 영화의 감독 역시 아직은 무명의 젊은 여자 감독에 불과하니까. 따라서 이 영화로 내가 본격적인 영화배우로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고, 이 영화가 한국의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것은 더 더욱 기대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실제 촬영까지 7개월 이상 공들인 지난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그냥 그렇게 지나치고 잊혀져 버리고 만다는 것은 나로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지난 7개월간을 더듬어 글을 써보기로 한다. 비록 초보 연기자가 단 한 번 경험한 일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내 삶에 있어서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니 기록으로 남길 만하지 않은가!

a 촬영 개시를 알리는 클래퍼 보드, 일명 딱딱이. 내 삶의 아주 특별한 한 순간이 이 딱딱이가 내는 딱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촬영 개시를 알리는 클래퍼 보드, 일명 딱딱이. 내 삶의 아주 특별한 한 순간이 이 딱딱이가 내는 딱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 정철용

<소시지 먹기(Eating Sausage)>라는 다소 이색적인 제목의 이 단편영화에 내가 발을 담그게 된 것은 지난 해 7월, 지역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인도 태생의 한 젊은 여자 감독이 자신이 직접 쓴 단편영화에 출연할 한국인 영화배우 남녀 1명씩을 모집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의 주목을 끈 것이다.

평소에 영화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뉴질랜드에 갓 이민 온 중년의 한국인 부부가 낯선 문화와 환경에서 겪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는 영화의 내용이 특히 나를 끌어당겼다. 이민 초기에 비슷한 경험을 한 바 있는 내게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 주제가 몹시 친숙한 것이어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도 함께 영화에 출연해보자고 옆구리를 쿡쿡 찔러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영화 속 수영장 장면 때문에 자기는 안 된다고 한사코 꽁무니를 뺐다. 수영장 장면에서 맨 얼굴에 드러날 기미 자국과 키가 작아서 다리가 짧아 보일 자신의 몸매를 걱정한 것이다.

출연료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럼 나도 관둘까. 이렇게 생각하며 포기하려는데, 옆에서 딸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간청했다. 딸아이가 하도 조르는 터에 나는 마침내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젊은 여자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오디션 신청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오디션이라는 것을, 그것도 영화출연 오디션을 보게 되었으니, 그게 지난 해 8월 16일의 일이었다.

오디션이 있기 1주일 전쯤에 나는 오디션용으로 시나리오의 일부를 우편으로 받았다. 남녀 주인공이 욕실에서 대사를 주고받는 매우 단순하고 간단해 보이는 두 장면이었는데, 대사도 몇 줄 되지 않아서 나는 거의 연습을 하지 않았다. 오디션 전날에 대사만 겨우 외우고서는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재미삼아 하는 것이었지, 꼭 이 영화에 출연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가짐 때문이었는지, 연기 경험도 전혀 없고 이런 오디션도 난생 처음으로 하는 것인데도 나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전혀 떨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도 잠시였고 카메라 뒤편에서 감독과 캐스팅 디렉터가 이것저것 주문사항을 요구해오자 나는 조금씩 긴장되기 시작했다.

내게는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해 보이는 두 장면의 행간 속에 사실은 말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고 두 등장인물 간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교류가 그 저변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음을 나는 뒤늦게야 알아챘다. 연기가 단순히 몸의 동작이나 얼굴표정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똑같은 장면을 몇 번을 반복해서 연기하는 동안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는 했지만, 그 감정의 흐름을 내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메라 뒤편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하여 유심히 내 연기를 살피던, 아직 앳된 얼굴의 여자 감독은 그다지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디션을 마치고 나는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며칠 후에 2차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으니 내가 얼마나 기뻤겠는가! 이번에는 나도 욕심을 내서 아내를 상대역으로 해서 제법 연습을 했다. 대사도 완벽하게 암기한 후에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1차 오디션이 끝나고 4일 만인 8월 20일에 가진 2차 오디션에는 1차 오디션을 통과한 여자 3명과 남자 2명이 참가했다. 상대를 바꿔가면서 아내와 남편의 역할을 연기하게 되어 있어서 나는 똑같은 장면을 3명의 여자와 각각 연기했다. 똑같은 장면인데도 상대 연기자에 따라 내 연기와 감정의 흐름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중 한 여자는 프로 연기자 뺨치는 연기를 보여주어서 함께 연기하는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이곳 뉴질랜드의 TV1에 <아시아 다운언더(Asia Downunder)>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공급하고 있는 독립 프로덕션의 제작자였다. 그러니 그렇게 연기를 잘 할 수밖에.

그녀의 연기에 비하면 나의 연기는 정말 한참 멀었구나. 연기하는 것이 쉬워 보여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로구나. 나는 이렇게 좌절 반, 시샘 반으로 속을 끓이면서 2차 오디션을 마쳤다. 이것으로 나와 영화와의 인연도 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늦은 저녁에 연락이 온 것이다. 남자 주인공으로 내가 뽑혔다고!

이 소식에 나보다도 딸아이가 더 크게 환호성을 질러댔다. 아내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면서 싫지 않은 얼굴로 눈을 흘겼다.

“야, 당신 이제 영화에도 다 출연하고 유명인사 되겠네. 더군다나, 나말고 새 마누라도 생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아!”
“뭐, 고작 15분짜리 단편영화인데 뭘….”

아내의 말에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영화배우가 된 것처럼 마음이 우쭐거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카메라 앞에 다시 서기까지는 7개월이 넘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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