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308

시작된 정의구현 (6)

등록 2004.04.07 16:13수정 2004.04.07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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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깃발에 쓰인 글귀와 묵향 그윽한 한 송이 매화 그림 덕분에 정의문의 명성은 만천하로 번져갔다.

동시에 산해관 일대에서 벌어졌던 일들 또한 번져갔다. 그리고 혈면귀수가 어떤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는지, 무천장이 어떤 방법으로 양민들의 고혈을 빨았는지에 관한 진실도 알려졌다.


당황한 무림천자성에서는 대대적인 추적을 시작하며 누구든 정의문의 행방을 알려주는 자에게 막대한 포상금을 지불하겠다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제보는 전혀 없었다.

누가 진정 어려움에 처한 양민을 위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설사 은자가 욕심나더라도 후환이 두려워 제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구든 고자질하는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아사(餓死)할 위기에 처했을 때 구황곡을 구입할 은자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붙여먹을 농토까지 구입하도록 은혜를 베풀었는데 어찌 은인이 해코지 당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겠는가!

양민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었기에 정의문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태산 권역까지 남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해관을 떠난 이유는 사면호협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모진 고문 끝에 혈면귀수의 입에서 무림지옥갱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황산으로 향한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정의문은 진짜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렸다. 산해관 일대에서 벌였던 일을 그대로 한 것이다.

덕분에 많은 무천장주들이 몸살을 앓아야 하였고, 기원이나, 전장, 도박장 등은 모아두었던 은자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가난에 찌든 양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졌다.

이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될 것을 우려한 여옥혜는 사전 조사를 치밀하게 하였다.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은 모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곡부는 태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큰 시진이다. 그리고 이곳은 곡부에서 나와 북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이다. 하여 그곳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려 한 시진이나 술잔을 기울이며 노닥거리던 여옥혜는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금릉 무천장주의 일점혈육인 백만근 천애화가 온 것이다. 그녀의 뒤에는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열두 여인이 있었는데 호위 겸 시비인 십이선녀라 하였다. 발군의 실력을 지닌 여인들이다.

보타암을 떠난 이후 처음 만난 둘은 반가워하며 서로의 근황을 묻느라 한참을 떠들었다. 이때 곁에 있던 왕구명은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다. 주청을 벗어나던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찌 여인의 몸으로 이처럼 저돌적인지 놀랍기도 하면서, 질기기가 고래힘줄 같은 그녀를 떼어내려면 앞으로 어찌 처신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였기 때문이었다.

왕구명이 자리를 비우고 얼마 되지 않아 주청에 있던 주객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주를 씹던 자는 입안에 있던 것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고, 술병을 기울이던 자는 술이 쏟아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한 방울만 흘려도 소란을 떨었을 터인데 아까운 술이 줄줄 흐르고 있건만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주청에 올라선 비구니 때문이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네 명의 비구니가 들어섰는데 그들 가운데 하나는 붉은 비단으로 만든 포단을 들고 있었다. 그 위에는 청색과 홍색으로 어우러진 수실로 장식된 고색창연한 검이 올려져 있었다.

또 다른 비구니의 손에는 깃발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거기엔 한 눈에 보기에도 대단한 필력으로 쓰인 글자가 있었다.


< 성니왕림(聖尼枉臨) 친견자(親見者) 하마장읍(下馬長揖)
권(勸) 소림두타(少林頭陀) 혜광(慧光) >

성니가 당도하였으니 보는 자는 즉시 말에서 내려 정중한 예를 갖출 것을 권한다는 글귀이다.

무림에는 스스로를 알리기 위해 깃발을 들고 다니는 자들이 있다. 만사무불통지(萬事無不通知)라 쓰인 깃발을 들고 다니는 만박자(萬博子)라는 점쟁이도 그중 하나이다. 깃발의 글귀를 본 사람들은 앞 다퉈 장래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쳤다.

덕분에 그는 부자가 되었지만 실상 그의 점괘는 엉터리이다. 말재간만 요란한 돌팔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깃발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그러나 성니번(聖尼幡)이라는 깃발만은 예외이다.

열반할 곳을 찾아 강호를 떠돌던 전대 소림 장문인 혜광선사는 남해 보타암을 방문한 직후 깃발 하나를 만들었다. 보타신니의 불법(佛法) 깊음에 너무도 경탄한 나머지 손수 제작한 것이다. 그것의 명칭이 바로 성니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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