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정치인 장희빈을 아십니까

정두회 외 지음 <장희빈, 사극의 배반>

등록 2004.04.16 13:24수정 2004.04.1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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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하면 '장희빈'이고 '장희빈'하면 '사극'이지요. 영화와 TV로 모두 일곱번 극화된 덕분에 우리는 장희빈을 훤히 알고 지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하지요. 게다가 미모와 술수를 동원한 권력의 화신, 사약을 받고 악쓰며 죽어간 최후가 워낙에 강렬한 시각적 체험으로 남아서 장희빈 캐릭터는 눈을 감고도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역대 장희빈 역은 김지미(61), 남정임(68), 윤여정(71), 이미숙(81), 전인화(88), 정선경(95), 김혜수(02)씨가 맡았는데, 셈을 해보니 5년이나 10년 간격을 두고 어디선가 우리가 잊을 만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장희빈이었더군요. '홍반장' 저리 가라, 입니다. 아마도 몇 년 후면 또 나타나겠지요. 그만큼이나 시청자의 총애를 받아온 장희빈,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 책 <장희빈, 사극의 배반>을 쓴 4명의 역사학자도 그런 질문에서 시작했을 것 같네요. 당신은 사극 속의 장희빈이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을 보고 싶어했나요, 장희빈을 통해 무엇에 만족했던 것인가요. 사극은 역사적 사실의 복구가 아니라, 시청자 당신의 욕구를 통해 상상적으로 재현된 허구인지라 이 질문이 아주 중요하답니다. 요컨대 사극은 현재의 환영이며 극중 장희빈은 시청자가 불러낸 대리인인 셈이지요.

시청자들이 사극 장희빈에서 얻는 희열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네요. 먼저 숨막히는 가부장적 사회 질서에서 미모와 총기를 겸비한 장희빈이 최고 권력자 남성을 유혹하고 조종해서 막후 실세가 되는 극적인 과정에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동시에 본처를 밀어내고 올라선 후처 장희빈이 궁극에는 추락하고 파멸한다는 본처 위주의 권선징악도 즐기는 것 같더군요. 참 이중적이지요. 시청자들이 원하는 대로 춤추는 장희빈만 불쌍합니다.

이 책을 일독하면 아시겠지만 지은이들이 역사학적으로 고증하는 장옥정(장희빈의 본명, 희빈은 정1품의 품계 명칭)은 그런 인물이 아니더군요. 전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시청자들은 중인 계급의 딸이 중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다시 몰락한다는 역사적 사실의 큰 틀거리에 딱 그렇게 그려지면 좋을 듯한 허구적 인물상을 장희빈 역에 투영한 것이지요. 해서 장희빈은 표독한 요부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비명에 갔던 거랍니다. 시청자들이 원해서 말이지요.

저는 시청자들의 이런 집단 욕구에 깔려 있는 권력관이 흥미롭더군요. 아무리 왕권 시대라지만 신료 사회에 의한 당파 정치가 지배했던 숙종대의 권력 시스템을 인간 관계의 애증의 소산으로 보고자 하는, 그것도 남녀의 정분이나 복수심 같은 사사로운 관계의 결과로 보려는 시선 말입니다. 또한 권력 동기가 철저하게 개인의 명예와 부의 향유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도 그렇더군요. 이런 생각은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 아니라 오늘날의 시청자가 갖고 있는 사회적 욕구와 정치 의식의 투영이라는 점에서 더 흥미롭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장희빈은 그런 인물이 아니거든요. '사극의 배반' 때문에 역사적 인물 장희빈이 시청자의 꼭두각시 장희빈으로 변신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역사적 인물 장희빈이 시청자들의 그같은 욕구와 흥미를 유혹할 만한 요소를 두루 잘 갖추고 있는 건 사실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장희빈만한 역사적 인물이 또 누가 있을까요.

최상위 계층(사도세자)의 주인공은 선망의 대상 또는 자기 방종의 일탈에 머물러 있기 쉽고, 최하위 계층(임꺽정)의 영웅은 자기 학대나 혁명의 소용돌이로 휩쓸리기 마련입니다. 반면 중간 계층의 이야기는 한 계단씩 올라서려는 신분 상승의 욕망이 집요하고, 이해 관계의 치밀한 계산들이 불꽃 튀며, 합종연횡의 활발한 세력 재편이 지속되는지라 드라마의 흥미진진한 요건을 두루 갖춘 안성맞춤이지요. 장희빈이 딱 그런 인물인 거지요.


지은이들이 '숙종실록'을 인용하며 재구성한 당시의 시대상은 이렇더군요. 당시 역관들은 중국과 일본 무역을 통해 재벌로 성장했답니다. 하지만 막강해진 사회경제적 지위와 달리 정치적 권리는 하찮은 중인 계층에 불과했다지요. 당연히 이들은 정계 진출을 도모하는데, 장희빈의 당숙인 장현이라는 인물이 당대 최고의 역관 출신 재벌이라는 거지요. 그림이 좀 그려지시나요. 장희빈은 역관 세력, 넓게는 중인 계층의 정치 세력화라는 총대를 메고 궁녀로 입신했던 것입니다.

'고작 궁녀를 해서 뭘 도모해?'하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당시 궁녀는 조선 사회의 보통 여성들과 달리 중앙 정치의 핵심 무대인 궁 내(오늘날의 청와대와 국회의사당과 정부청사)에 상주하는 관료이자 정치인이라는 것이 지은이들의 공통된 견해랍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보셨잖아요. 왕족은 물론 각종 당파와 관계를 맺고 온갖 정무와 행정과 외교 업무를 수행하는 궁녀들의 놀라운 활동상 말입니다. 당연히 궁녀는 수준급의 교양과 풍부한 정치 식견을 갖췄었다고 하네요.

상황을 종합해 볼까요. 장희빈이라는 인물은 당시 신흥 재벌 세력의 인척으로서 정계에 진출했고 중인 계층의 정치 세력화를 도모하고자 대권 고지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딛은 입지전적인 여성 정치인입니다. 여기에 왕권파와 당권파, 남인과 서인의 복잡한 대결 구도와 이합집산이 겹쳐지면서 한편의 고도한 정치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 와중에 장희빈의 정치 데뷔와 좌절과 극적인 복귀와 죽음의 파노라마가 수놓아져 있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가부장적 신분 사회의 남성 역관 세력을 대표하는 개혁적인 정치 주자로 여성 장희빈이 부상한 300여년 전의 역사적 사례, 그리고 여전히 가부장적 대의 정치가 지배하는 풍토에서 강금실·추미애·박근혜씨 등 여성들이 개혁의 구세주처럼 전면에 등장한 오늘날의 정치 현실. 양자 사이에는 시대의 성격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서 현격한 차이가 놓여 있으니 비교는 무리겠지요. 그럼에도 장희빈은 오늘날 여성 정치인의 교사이자 거울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결국 국왕과 왕비, 후궁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정치적 동반자의 성격을 제1차적 요건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숙종 역시 그런 장희빈의 정치적 견해에 동감하고 수긍했던 것이다. 즉 장희빈이 숙종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숙종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적절한 조언과 동반자적인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성 정치인 장희빈의 성공과 숙종과의 정치적 동반자 관계, 박근혜 대표와 한나라당의 수구주의 남성 정치 세력과의 함수 관계, 추미애 의원과 민주당의 지역주의 기득권 세력과의 갈등 관계, 강금실 장관과 노무현 대통령과의 밀월 관계. 그만할까요. 이런 비유는 끝이 없겠군요.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라도 적극적으로 해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희빈을 기껏해야 미색을 앞세워 숙종의 품을 파고든 권력욕의 노예로 상상하는 빈곤한 의식은 '강효리'니 '추다르크'니 하는 수준을 반복하게 만드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이런 식의 대중적 심리에 영합할 수밖에 없었을 미디어 시대의 여성 정치 지도자들의 한계가 금세 폭로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까지 합니다. 박근혜 대표에게 인자하고 차분한 이미지 외에 무엇이 있고, 추미애 의원에게 뚝심의 이미지 외에 무엇이 있는 것인지 말이지요.

빼어난 여배우들이 앞다퉈 장희빈 역을 연기했지만, 지금도 수많은 여성 정치인들이 전국적 인물로 성장하고 있지만, 정치인 장희빈을 제대로 보지 못하듯 우리는 여성 정치인을 사극의 장희빈 보듯이 바라보지는 않은가 싶어 씁쓸해지네요. 어쨌든 정치인 장희빈의 면모를 되살려낸 지은이들의 시도가 신선합니다. 언젠가 틀림없이 돌아올 미래의 사극 장희빈에서는 아무쪼록 정치인 장희빈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았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장희빈, 사극의 배반

정두희 외 지음,
소나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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