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천근만근, 그래도 환하게 웃는다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우리 동네 모내기 풍경

등록 2004.04.22 12:30수정 2004.04.2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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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 동네에서 제일 젊은 태웅이 엄마

우리 동네에서 제일 젊은 태웅이 엄마 ⓒ 느릿느릿 박철


파종하는 날
물에 불린 볍씨를 모판에 심는다.
파종기에 사방 둘러앉아 사람들 손이 바쁘다
남정네들은 짓궂은 농을 던지고
동네 아낙들은 남정네들의 싱거운 소리에도 웃는다
볍씨를 담은 모판이 떡시루 빼내는 것처럼
꾸역꾸역 자꾸만 나오고
앗다, 징 하기도 하지 일이 끝이 없다
점심밥도 먹었겠다 따스한 봄 햇살에 졸음이 쏟아지고
산더미처럼 쌓였던 상토 흙도 거반 없어졌다.
오줌 누러간 산기 아제는 어디 가서 낮잠을 자는지
30분이 지나도 오질 않는다.
파종하는 날 나른한 오후
졸음은 쏟아지고 선현이 아빠 트럭에서는
조용필의 간드러진 노래 가락이 자장가처럼 달콤하다.


(박철 詩, 파종하는 날)


a 모싹을 틔운 모판상자를 무논에 부린다. 허리가 휜다.

모싹을 틔운 모판상자를 무논에 부린다. 허리가 휜다. ⓒ 느릿느릿 박철

못자리 준비가 시작되었다. 못자리 준비는 일년 농사 중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못자리가 끝나면 옛날부터 한해 농사의 절반은 끝났다는 말이 있다. 볍씨를 물에 담가 일주일 정도 불렸다가 모판기계에 흙을 채우고 그 사이사이에 볍씨를 넣는다. 볍씨를 채운 모판을 차곡차곡 싸놓고 또 일주일동안 햇볕과 공기와 적당한 수분을 주어 뿌리를 내리게 한다.

뿌리를 내린 모판을 무논으로 싣고 가 한장 한장 가지런히 줄을 맞춰 내려놓아 뿌리는 더욱 튼실하게 그리고 모 싹은 사람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 자라게 한다. 이 모든 작업은 거의 품앗이로 이루어진다.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일을 하면서 우수개 소리도 하고 정을 나눈다.

써레질을 한 무논에서 모 싹을 키우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한해 농사의 성패가 여기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닐을 씌워서 적당하게 온도를 유지해 주어야 하고 이따금 바람도 쐬게 해서 싹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 모 싹이 키만 멀뚱하게 웃자라면 줄기가 약해 병충해에도 약하고 그만큼 적응력이 떨어지게 된다.

못자리에서 모를 잘못 키워서 다시 볍씨를 붓고 싹을 틔워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종자를 선택하고 뿌리와 싹을 키우고 이양하는 일 어느 하나라도 허투루 해서는 안 된다. 농사라는 게 생명과 직결된 일이기에 이렇듯 공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a 잘 받어! 손발이 척척 맞는다.

잘 받어! 손발이 척척 맞는다. ⓒ 느릿느릿 박철

오늘 아침, 사진기를 들고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엊그제 내린 비로 온 산과 들판이 물기를 머금고 새로운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하다. 복숭아꽃 개나리꽃이 한창이다. 논에서는 트랙터로 써레질 하는 기계음 소리가 요란하다.

들판으로 나가 품앗이로 모판에 볍씨를 담는 작업을 하거나 무논으로 모판 상자를 나르는 일로 동네 사람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젊은 사람들로 주축이 되어 있는 일패를 찾아갔다. 젊은 사람들로 조직된 일패여서 손발도 잘 맞고 속도도 빠르고 입담도 걸쭉하다.


“거 빨랑빨랑 좀 해! 기계처럼 착착 움직여야지. 그렇게 느려 터져서 어느 세월에 다 해?”

교희 아빠가 잔소리를 해댄다.

“아니 어찌 사람이 기계처럼 할 수 있단 말이야? 그렇게 죽기 살기로 하다가 고장 나면 누가 알아준데, 누가 고쳐준대?”

교희 엄마가 지지 않을 태세로 쏘아붙인다. 그러자 모두 껄껄 웃는다.

“아이구, 배고파 죽겠다. 아침밥 먹은 지 3시간 밖에 안됐는데 왜 배가 고프지? 밥 먹을 시간 멀었나?”

기원 아빠는 체구도 크지 않은 사람이 먹는 타령이다. 모 싹을 틔운 모판을 경운기에 싣는데 손발이 척척 맞는다. 금방 한 트랙터를 실었다.

a 우리 동네 서현진 이장.

우리 동네 서현진 이장. ⓒ 느릿느릿 박철

“목사님, 점심밥 먹고 가시겨. 대룡리 식당에다 국밥 시켜 놓았으니 12시 되면 올 거에요. 이제 사진 그만 찍고 일 좀 하시기오. 밥값을 하려면 모판 상자 좀 날라야지. 자고로 공짜 밥이란 없시다.”

역시 교희 아빠가 한마디 걸고 넘어진다. 꼼짝없이 붙들렸다. 요즘 일철에는 밥은 대룡리 식당에서 시켜다 먹는다.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못자리 할 때는 여자들도 다 거들어야 한다. 들판에 앉아서 흙먼지 바람을 뒤집어쓰며 들밥을 먹는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꿀맛이다.

밥을 잘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다른 일패를 만났다. 마침 서현진 이장도 눈이 띈다.

“오늘 날씨가 흐린 게 덥지 않고 볍씨 넣는 작업하기는 안성맞춤인 것 같아요?”
“그럼요. 예년 같으면 벌써 끝났지요.”

우리 동네는 요즘 경지정리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경지정리가 끝나야 모내기를 할 수 있다.

“우리 동네 경지정리 총 면적이 얼마나 되죠?”
“54만 평쯤 될 걸요. 5월 30일 완공인데 빨리 경지정리가 끝나야 모내기를 할텐데, 공사업자들이 잘 알아서 해주겠지요. 올 한해도 온 동네 사람들마다 아무 탈없이 건강했으면 좋겠시다. 우리 동네 숙원사업인 경지정리도 끝나게 되었느니 앞으론 물 걱정 하나도 안하고 농사짓게 되었시다."


a 트랙터로 써래질을 한다.

트랙터로 써래질을 한다. ⓒ 느릿느릿 박철

사람들 얼굴은 웃는 표정이지만 일로 몸은 고단하기만 하다. 시방 온 산천경계에 꽃이 만발했다. 그 흔한 들꽃 하나 눈여겨 볼 여가가 없이 농촌의 하루 일과는 바쁘게 돌아간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불편한 속내를 다 들어내 놓고 살 수는 없겠지만, 시방 농촌 사람들은 온 몸이 천근만근이다. 저들의 얼굴에서 그늘이 사라지고 밝은 함박꽃을 피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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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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