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터는 동물이 아냐, 그렇게 취급해서는 안돼"

<네팔 여행기 4>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트레킹

등록 2004.04.26 19:09수정 2004.05.24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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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기자는 지난 2월말부터 보름간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했습니다. 에베레스트 산행기는 6회 정도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눈에 덮인 팡보체 마을
눈에 덮인 팡보체 마을김남희
트레킹 열흘째 날
날씨 : ‘하늘엔 흰 눈이 내리고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 (벗님들-‘사랑의 슬픔’ 중에서)
걸은 구간 : 팡보체(Pangboche 4252m)-포르체(Phortse 3800m)-돌레(Dole 4080m)
소요 시간 : 다섯 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상체-비교적 양호 / 하체-몹시 불량



지난 밤 꿈에 헤어진 친구를 만났다. 꿈속에서도 나는 어딘가로 떠나고 있었는데 항구인지 기차역인지로 그는 나를 마중 나왔다. 하지만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체념 어린 담담한 눈으로 멀리서 나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내가 떠날 때 옷이 든 봉투 하나를 건네고 돌아서 갔다.
그 눈빛이 너무 슬퍼 아침에 잠을 깨고도 한참 마음에 남았다. 꿈속에서 아픔을 참느라 이를 얼마나 악물었는지 양쪽 어금니가 얼얼하다.

모파상이 그랬지.
‘키스는 번개처럼 엄습하고 사랑은 마치 소나기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인생은 또다시 하늘처럼 잠잠해지나니. 그러다 예전처럼 되풀이되고. 우리는 구름을 기억이나 할까?‘
나는 어서 소나기가 지나가고 구름이 걷힌 잠잠한 하늘이 되고 싶다.

어제 저녁 때 약간의 뜨거운 물을 얻어 세수를 했다.
우리가 세수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타쉬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세수를 하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우린 날씨도 너무 춥고 게으르기도 해서 일 주일에 한 번씩도 세수를 안 하는데…”라며 웃는다. 수영언니가 “그 말 듣고 나니 너무 미안하더라”하기에 “우리 그럼 내일 아침은 젖은 휴지로 그냥 닦고 말까?”했다.

그래서 오늘은 젖은 휴지로 닦기만 한다. 벌써 며칠 째 머리를 못 감고 있는지 모르겠다. 양말은 일주일째 같은 걸 신고 있고…. 그런데 점점 이 모든 것들이 아무렇지 않아진다.

팡보체에서 포르체 가는 길. 산 중앙으로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팡보체에서 포르체 가는 길. 산 중앙으로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김남희
부엌 화덕 옆에 쪼그리고 앉아 미숫가루와 오믈렛으로 아침 식사. 가급적 트레킹 중에 부엌 근처는 기웃거리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화덕이 있는 부엌을 찾게 된다.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면 밥 먹기가 몹시 힘들어진다. 우선은 야채를 씻어서 조리하는 모습을 한번도 못 봤다. 감자, 양파, 양배추 종류에 관계없이 전부 껍질만 벗기고 그대로 쓴다. 행주로 쓰고 있는 걸레를 본다거나, 세제를 푼 대야에 한번 담갔다 빼는 게 전부인 설거지, 야채와 고기 및 모든 재료를 닦지도 않은 칼 하나로 요리하는 광경 등등 이런 걸 보고 나면 화기애애한 식사 분위기 조성이 어려워진다.


또 음식의 유통기한이나 신선함, 위생을 따져서도 안 된다. 우리가 먹었던 수프도 유통기한이 6개월 넘게 지났었고, 통조림 과일 역시 캔 껍질이 다 벗겨지고 찌그러들어 도저히 생산년도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명랑한 식사 문화 건설을 위해 비위가 약한 분들은 절대 부엌에 들어가지 말 것!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하나는 조리과정을 이토록 간략히 함으로써 조리시간의 엄청난 단축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주문 후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평균 대기시간이 한 시간이라는 사실.)

지난 밤 내내 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얗다. 이 집 마당에서는 깡대와 탐셀꾸가 바로 앞산처럼 가까이 보인다. 탄성이 절로 터지는 ‘초특급 수퍼 울트라’ 전망이다. 나지막이 엎드린 돌담과 돌집들은 아직 잠들어 있고, 양철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소리만이 마을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전나무 숲에도 하얗게 눈이 내려앉아 제법 무거워 보인다. 숲이 바람을 막아줘서인지 이 마을은 고도에 비해 유난히 따뜻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설 때 저 나무들을 보는 것만으로 얼마나 마음이 흐뭇하던지….

짐 들고 나와서 마을의 절을 둘러본다. 문이 잠겨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기얀드라가 사람을 불러와 열어준다. 부처님께 절하고, 시주하고 나온다. 티벳식으로 채색한 창문들이 오늘따라 흰 눈빛 속에서 더욱 곱다.


눈 덮인 고개를 넘고 있는 트레커.
눈 덮인 고개를 넘고 있는 트레커.김남희
10시 15분. 출발.
절벽으로 난 길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정도로 좁은 길이 산등성이에 위태롭게 걸려있다. 지난 밤 내린 눈이 꽃으로 피어 눈 가는 곳마다 환하다. 한 시간 쯤 절벽 길을 걷고 있자니 산밑에서 구름이 몰려와 길과 길 위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다. 좁은 벼랑길에는 아무도 없다. 눈꽃 핀 나무와 풀을 뜯고 있는 산양(자랄)떼들만이 가끔 고개를 들어 흘깃 우리를 바라볼 뿐이다.

12시 55분. 포르체(Porche) 도착.
눈에 덮인 마을은 제법 크다.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며 마을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난다. 마치 마법이 풀리듯 안개의 손길을 헤치며 깨어나는 마을들. 문을 연 식당으로 가 점심을 주문한다.

2시 15분. 포르체 출발.
점심 먹는 사이 내리기 시작한 눈이 계속 내리고 있다. 길은 점점 눈에 덮여 가고, 바로 앞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방은 허리를 눌러오고, 발은 무거운데, 길까지 미끄러워 온 신경을 집중해 걸어야 한다. 언니와 기얀드라, 나까지 모두 스틱을 꺼내 쓰고 있다. 가쁜 숨소리와 스틱 찍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포르체에서 계곡까지 내려와 다리를 건너 다시 산을 오른다. 이 오르막 고갯길이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지기 전에, 길이 눈에 덮여 사라지기 전에 돌레에 도착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마음을 짓누른다.

4시 45분. 마침내 돌레(Dole) 도착.
대부분의 집들은 문이 잠겨 있고, 마을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다. 멀리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유일한 집을 찾아간다. 마을을 내려가 냇가를 건너 위치한 예티 인(Yeti Inn).

풀을 뜯고 있는 야생 산양떼.
풀을 뜯고 있는 야생 산양떼.김남희
난로가 지펴진 식당으로 가니 중년의 독일인들이 모여 있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 거쳐온 길을 이야기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잠시. 갑자기 독일인 아줌마가 경직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너희 포터, 저 운동화 신고 칼라파타르에 갔다 왔니?”

그랬다는 내 대답에 고개를 흔들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너흰 당장 남체로 내려가 포터에게 새 신발부터 사줘야 해. 저런 신발로 등산하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너희 트레킹 시작할 때 포터 장비도 확인 안 했니?”

이건 마치 범인 취조하는 경관의 말투다. 기분이 나빠지지만 그래도 성의 있게 대답을 해준다.

“루클라에서 우리 가이드가 포터를 고용할 때 장비를 충분히 갖췄느냐는 질문을 했었고, 우리가 일행(정 선배님)과 헤어질 때도 다시 한 번 장비가 충분한지 물었어. 그때마다 가이드 대답은 ‘걱정마. 다 준비했으니 문제없어’여서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어. 나중에 우리 포터가 제대로 된 등산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한참이 지난 후였고.”
전혀 납득을 하지 않는 눈치다.

잠시 후 카메라 건전지가 없어서 큰일이라는 내 중얼거림을 들은 독일인 아줌마가 다시 끼어든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큰일은 크게 아니야. 지금 큰일은 너희 포터 신발 문제야” 라고 한다. 두 번째 지적에 기분이 상해 “그건 네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라고 하니 “아니,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야”라며 맞받는다.

기분이 점점 나빠져 나도 말투가 공격적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우린 지금 충분한 시간도 없고….” 말을 가로채며 아줌마가 말한다.
“남체로 내려가야지. 지금이라도 남체로 내려가서 신발부터 사주고 다시 올라와. 안 그러면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절단하는 사태가 생길 지도 몰라. 트레킹 시작하기 전에 철저히 확인했어야지. 너, 루클라에 Porters' Clothing Bank 있는 거 몰랐니? 거기 가면 무료로 포터들 옷하고 신발 다 빌려줘. 그것도 몰랐단 말이야? 이건 모두 너희 책임이야. 내일 바로 남체로 내려가서 신발을 구입해야 해”라고 못을 박는다.

전후사정을 다시 설명하며 우린 네팔이 처음이어서 잘 몰랐다고 말을 한다. 네팔 가이드들은 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편을 들어주는데 이 부부는 완강하다.

포르체 마을의 돌담과 돌집들.
포르체 마을의 돌담과 돌집들.김남희
망신은 계속된다. 독일팀 가이드가 “너희 포터, 하루에 얼마로 생활하는지 알아?” 묻는다. “우린 가이드한테 포터 비용으로 하루 8불씩 지불했고, 그중 6불(420루피)이 포터에게 가는 걸로 알고 있어”라고 하니 “아니야. 너희 포터 15일간 계약에 2550루피 받았대. 하루에 170루피씩. 그래서 생활비 아끼려고 하루 100~150루피만 쓰면서 다닌대.”

“뭐라구?” 언니와 나는 둘 다 경악을 금치 못한다.

람, 그 자식이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이제서야 그동안의 미심쩍던 일들이 다 이해가 간다. 처음에 팍딩에서 포터 한 명이 갑자기 바뀌었던 일(일당을 알고 나서 못하겠다고 그만둔 거였다)도 이해가 가고, 정 선배님과 헤어질 때 포터 한 명을 더 고용하겠다는 우리 제안을 회사에서 알면 곤란하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한 이유도 이제서야 뚜렷해진다. 새로 고용한 포터를 통해 가격이 들통나면 안 되니까. 그 나쁜 놈이 기얀드라에게 겨우 2500루피를 주면서 그랬단다. 우리한테 팁을 받으라고. 요 며칠 기얀드라가 힘겨워하고 자주 쉬던 것도 이제야 원인이 드러났다. 그 적은 돈으로 생활하려니 식사를 부실하게 하거나 건너뛰고, 그러다보니 점점 기운을 잃고 비실거린 거였다.

열 받아 쓰러질 것 같다. 우리를 속인 람은 정말 때려죽이고 싶도록 밉고, 그 돈을 받고 일한 기얀드라에게도 화가 나고, 좀 더 철저히 확인하지 못하고 가이드에게 놀아난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나 견딜 수가 없다. 게다가 비용을 미리 완불하는 바람에 일을 더 어렵게 만든 정 선배님께도 화가 나고….

안개와 구름이 만들어내는 진경산수화 한 폭. 돌레.
안개와 구름이 만들어내는 진경산수화 한 폭. 돌레.김남희
난롯가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의 화제는 어느새 포터나 가이드들의 횡포와 사고에 관한 이야기로 바뀐다. 이런 일이 아주 비일비재하단다. 손님 짐을 팽개치고 도망 간 포터, 배낭을 들고 사라진 포터, 선불로 준 돈으로 술 먹고 안 돌아온 포터들, 심지어 고객을 버려두고 도망간 가이드 이야기…. 오랫동안 포터와 가이드로 일했던 이 집 주인 캔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카트만두에 돌아가 어떻게 복수혈전을 벌일지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하다. 졸지에 포터 안전은 신경도 안 쓰는 무식하고 이기적인 한국인으로 찍힌 오늘,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트레킹 열 한번 째 날
날씨 : 흐리고 눈발 날림.
걸은 구간 : 숙소 앞마당(돌레에서 휴식)
복장 및 위생 상태 : 상당히 불량


7시 기상.
바깥 세상은 온통 하얗다. 아침에 식당으로 가는데 독일 아줌마가 또 앞을 가로막는다.

“나 너한테 충고 좀 해야겠어. 너 오늘 당장 포터 데리고 남체로 내려가. 그게 책임 있는 행동이야. 넌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해.”

이 아줌마는 어디서 '주먹 안 쓰고 말만으로 열 받게 하는 법' 이라는 강의라도 들은 것 같다. 나도 아줌마 말을 가르며 “충고 고마워"라고 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말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상대에게 들리기도 하고, 안 들리기도 한다는 걸 이 아줌마는 모르는 걸까. 정말 ‘대화의 기술’ 이라는 책이라도 사주고 싶다.

탐셀꾸가 저무는 저녁 햇살을 받고 있다. 돌레.
탐셀꾸가 저무는 저녁 햇살을 받고 있다. 돌레.김남희
이제는 나도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칼라파타르는 운이 좋아 운동화로 올랐지만, 지금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안 좋은데 정말 저 운동화로 될까 슬슬 불안해진다. 결국 이곳 주인아저씨께 자문을 구한다.

“솔직히 말하면 내 생각에는 남체로 내려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은 눈이 많이 와서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까. 이건 네 책임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됐으니까 네가 절반 내고, 포터에게 절반 내라고 해서 신발을 하나 새로 사 신고 오르는 게 낫지 않을까?”
“아저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려가야겠지요. 그렇게 해야겠네요.”

이 얘기를 듣고 있던 독일팀 가이드가 “나한테 여벌의 신발이 하나 있는데 그 신발을 너희 포터에게 줄 게”라며 나선다. 너무 뜻밖이고 고맙다. “신발값은 얼마를 주면 될까?” 물으니 신발값은 필요 없다며 기어코 사양한다. 모든 일이 잘 되었다고 좋아하며 방으로 와 짐을 꾸리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또 독일 아줌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가이드가 너희 포터한테 자기 신발을 준 거 알아? 우린 남체로 내려가면 바로 우리 가이드에게 새 신발을 사줄 거야. 너희도 좀 배워야 하지 않겠어?”
“이봐요, 아줌마. 그렇지 않아도 우리 역시 남체로 내려갈까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자기 할 말만 계속한다.
“너희 때문에 우린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해 정말 나쁜 인상을 갖게 됐어. 너희는 정말 서양화되고, 자본주의화 된 물질적인 애들이야. 책임 있는 행동은 전혀 할 줄도 모르고…. 넌 포터를 짐승처럼 생각하나 본데 포터는 짐승이 아니야. 동물로 취급해서는 안 돼.”

아니, 이 아줌마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뭐, 포터를 동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열 받아 정신이 없고 할 말을 잃은 나, 여기서부터 막 나가기 시작한다.

“나도 너희처럼 무례하고 잘난 척하는 독일인은 생전 처음 봤어.”
내 목소리는 떨려오고 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이 때, 갑자기 끼어드는 아줌마의 남편.
“여기서 국적이 무슨 상관이야? 그 얘기는 하지 마.”
“이봐. 당신 와이프가 먼저 한국사람 운운했잖아. 당신들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법부터 배워야겠어. 독일인들이 늘 그렇게 매사에 경우 바르고, 남을 생각하고, 올바른 일만 한다면 도대체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 때는 뭘 하고 있었는데?”
(주제와는 상관도 없는 남의 지나간 약점을 끄집어 내 공격하다니 얼마나 치졸하고 비겁한가. 하지만 나의 분노는 이미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하고 통제가능 영역을 벗어났기에 어쩔 수 없다.)

“과거 이야기는 하지 말아. 그건 아무 상관없는 거잖아? 너 어제 나한테 귄터 그라스를 좋아한다고 했지? 너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봐. 귄터 그라스가 어떤 사람인지도.”

이렇게 말하더니 휙 돌아서 나간다. 어쩌면 이럴 땐 영어도 더 안 되는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데, 언니가 “우리, 기얀드라 남체로 내려보내자”그런다. 나는 바로 식당으로 뛰어내려가 기얀드라에게 소리 지른다. “너, 당장 신발 벗어. 돌려주고 남체 가서 신발 사와.”

옆에 있던 독인 아줌마가 또 나서서 우리가 어떤 류의 인간들인지 다시 한번 설명해준다. 무책임하고, 잘못을 인정할 줄도 모르고, 남의 말을 들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나도 소리 지른다.

“그만해. 당신이랑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하라니까.”
아줌마는 굴하지 않고 계속 말한다.
“입 닥쳐!”

마침내는 “Shut Up!"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나오고 만다. 영문을 모르는 기얀드라는 어쩔 줄 모른 채 서 있고, 독일인 부부는 한국인들을 싸잡아 욕하며 숙소를 떠난다.

토담집과 집을 둘러싼 낮은 돌담이 정겹다.
토담집과 집을 둘러싼 낮은 돌담이 정겹다.김남희
너무도 억울하고 화가 난 나는 드디어 참았던 울음이 터진다. 내 인생에 이렇게 모욕적이었던 적이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수영언니 품에 기대어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만다. 주인아줌마가 “신경 쓰지 마. 잊어버려. 네 잘못도 아닌데…”라며 뜨거운 차를 내온다. 차를 마시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니 언니가 말한다.
“남희야. 저런 애들이랑 싸울 때 흥분하면 네가 지는 거야. 침착하게 평온한 목소리로 따져야지.”

누가 그걸 모르는가. 알면서도 못 하는 이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할 말은 입 안에서 맴을 돌고, 눈물부터 솟구쳐 눈앞은 흐려지고, 목소리는 떨려오고…. 나도 이런 내가 싫지만, 이런 면에서는 어린 날 이후 조금의 진보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아무리 애를 써도 ‘포커 페이스’가 되지 못하는 이의 비애를 언니가 어찌 알리.

기얀드라는 고쿄로 올라가자고 하는데, 언니와 나는 오늘 하루 쉬고 이제 그만 산을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이 기분으로 올라간다면 결코 즐거운 산행을 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얀드라가 얻은 신발이 좀 작은 것 같아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기보다는 빨리 내려가서 ‘람’을 잡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한 거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모두에게 화가 난다. 포터의 장비를 철저히 점검하지 못하고 가이드와 포터의 말만 믿은 나에게도 화가 나고, 그런 터무니없는 돈을 받고, 기본 장비조차 없이 4년 째 포터를 하고 있는 기얀드라에게도 화가 나고, 무엇보다 포터의 돈을 떼먹은 사기꾼 람에게 가장 분노가 치민다. 서양인들이 가장 많이 오는 곳이라고 굳이 카트만두 게스트 하우스에서 계약을 맺고, 전액을 선불로 지불한 박사님도 밉고….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남은 일은 빨리 루클라로 내려가 람을 잡아서 그 사기꾼을 망신 주는 일이다. 이 놈을 어떻게 요리할지가, 지금의 내 최대의 고민거리이자 숙제이다.

하루 종일 난롯가에서 먹고, 책 읽고, 또 먹고, 쉬며 시간을 보냈다. 안개는 종일 몰려왔다 몰려가며 앞산을 희롱한다. 불길이 여위어 갈 때마다 마른 장작을 집어넣고 꺼져가는 불길을 살린다. 타닥타닥 마른 장작 위로 불길이 타오르며 춤추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눈을 들어 창 밖의 앞산을 바라보고, 다시 보던 책으로 정신을 집중하고….

마침내 오후 늦게 간디 자서전을 끝냈다. 지금 내 마음에는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의 ‘사티아그라하’ 정신이 가득 하기는커녕, 람에 대한 처절한 복수심이 불타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쿰중에 갔던 캔도 돌아오고, 마첼모로 산책 갔던 기얀드라도 돌아오고, 다시 저녁 시간도 돌아온다.

바람에 날리는 탈쵸(경전을 적은 깃발) 너머로 초유(8153m)와 고쿄 마을이 보인다.
바람에 날리는 탈쵸(경전을 적은 깃발) 너머로 초유(8153m)와 고쿄 마을이 보인다.김남희
한 일도 없이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막 잠이 들려는 나를 깨우는 언니의 흥분한 목소리.

“어머, 남희야. 저 별빛 좀 봐.”
사흘 간의 흐린 날씨 끝에 쏟아져 나온 별들이 창가로 바싹 고개를 들이밀고 있다.
“꼭 비박 하는 기분이다. 눈 쌓인 산과 별빛이 다 보이고...”
“침낭 속에 누워 있지, 침낭 바깥 공기는 싸늘하지... 정말 비박할 때 조건이랑 비슷하네.”

잠시 후 잠든 나를 또 깨우는 언니.
“어머, 남희야, 저 달빛 좀 봐.”
겨우 눈을 뜨니 보름달이 방안으로 눈부시게 비쳐들고 있다.
“내 얼굴 달빛 받은 거 보여?”
“응, 언니. 정말 예쁘다. 근데 한 번만 더 나 깨우면 죽어!”

달빛도, 별빛도 무시하고 잠이 드는 무신경한 나.


트레킹 열 두 번째 날
날씨 : 푸른 물 뚝뚝 듣는 하늘
걸은 구간 : 돌레(Dole 4080m)-마첼모(Marchelmo 4450m)-팡가(Fangka 4485m)-고쿄(Gokyo 4750m)
소요 시간 : 5 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몹시 불량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청명하다. 바람도 없고, 햇살은 따뜻하고, 하늘은 새파랗게 개었다. 캔은 이 좋은 날씨에 왜 내려 가냐며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고쿄로 올라가라고 한다. 기얀드라도 여전히 풀이 죽었지만 조심스런 목소리로 올라가자고 채근한다. 결국 우리는 예정대로 산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한다. 야채 커리와 밥을 시켜 언니가 가져온 고추장에 비벼 맛있게 아침을 먹는다.

9시 10분, 다시 짐을 꾸려 출발이다. 사흘 만에 보는 파란 하늘이 우울했던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발걸음도 가볍다. 9시 55분. 라팔마(Rafarma 4417m) 도착. ‘마운틴 뷰 힐 탑 로지’ 라는 길고도 거창한 이름의 숙소가 하나 있다.

10시 45분. 루자(Luza 4360m)에 이어 11시 20분 마첼모(Machhermo 4450m) 통과. 8~9가구가 사는 마을이다. 12시 05분. 팡가(Fangka 4485m) 도착.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팡가 뷰 포인트 호텔로 들어선다.

이곳 식당 유리창으로는 해발고도 8153m인 초유(Choyoo)가 한 눈에 들어온다. 뭘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 자그마치 270루피(한화 4800원)나 하는 참치 야채 피자를 주문한다. 지금껏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비싸다. 한 시간을 기다려 나온 피자는 마늘과 양파와 당근과 참치와 치즈가 푸짐하게 얹혀 기대 이상으로 맛있다.

네팔인들의 주식인 달밧(렌즈 콩으로 만든 국과 카레를 넣고 볶은 야채, 밥이 함께 나온다)을 먹던 기얀드라가 한 고봉을 다 먹은 후 또 한 고봉을 담아 먹는다. 그 엄청난 양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더니, 가득 솟은 밥을 가리키며 “아마 다블람 봉우리!”라며 웃는다. 오랜만에 보는 그 천진한 미소가 반갑다.

얼어붙은 고쿄 호수
얼어붙은 고쿄 호수김남희
2시 출발. 다시 산을 넘는다. 눈이 채 녹지 않은 길은 초유(Choyoo)를 마주보며 걷는 길이다. 길은 평탄하게 이어진다.

4시. 고쿄(Gokyo 4750m) 도착. 8~9 가구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 고쿄 호수를 둘러싸고 있다. 기름기 있고 느끼한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시작되는 복통이 마을을 코앞에 둔 곳에서 시작됐다. 결국 바위 뒤에서 급히 일을 보고 눈으로 덮었다. 아깝다. 오랜만에 먹은 그 비싼 피자가 그대로 나왔으니…. 그 사이 호수로 다가가던 언니는 허리까지 눈 속에 빠지는 바람에 달려간 기얀드라에 의해 구조 당한다.

팡가 식당에서 사진으로 본 고쿄 리조트를 찾아서 짐을 푼다. 삼면이 창으로 둘러싸인 식당과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오는 훌륭한 전망! 방에는 제법 큰 침대와 탁자가 놓여 있고 전기도 들어온다. 화장실은 물론 건물 안에 있다! “우와! 5000m에서 이렇게 훌륭한 시설은 처음이다. 그치?” 우리는 마구 감동한다. 짐을 풀고 한 대야에 40루피 주고 더운 물을 사서 세수하고, 발을 씻었다.

저녁 먹으면서 네팔에 네 번째 오는 거라는 영국인 여행 가이드 크리스와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 전 BBC 뉴스에 북한이 외국 귀빈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전시한 박물관이 나왔는데, 그중 나이지리아에서 보내온 박제 악어 한 마리가 한 손에 쟁반과 컵을 들고 꼿꼿이 서 있었다나.

8시에 잠자리에 들다. 언니가 준 소화제 먹고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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