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봉우리인가 했더니 아니네

<네팔 여행기 5회 >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트레킹

등록 2004.05.04 16:48수정 2004.05.05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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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기자는 지난 2월 말부터 보름간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했습니다. 에베레스트 산행기는 6회 정도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해발고도 5357m 고쿄 리에서 바라보는 에베레스트와 로체, 마칼루
해발고도 5357m 고쿄 리에서 바라보는 에베레스트와 로체, 마칼루김남희
트레킹 열 세 번째 날


날씨 : 화창
걸은 구간 : 고쿄(Gokyo 4750m)-고쿄리(Gokyo Ri 5357m)-고쿄
소요 시간 : 3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떡진 머리, 일주일째 신는 양말.

날은 화창하다. 창 밖으로 햇살을 받고 깨어나는 산과 호수가 건너다 보인다. 고쿄 리(Gokyo Ri 5357m)에 올라가기 위해 작은 배낭을 꾸린다. 언니는 오후에 올라가겠다며 침낭 속에 누워 있고, 나는 미숫가루 한 잔을 뜨거운 우유에 타 마시고 기얀드라를 기다리는 중이다. 7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이 녀석은 밥 먹고 가겠다며 나더러 기다리란다. 기분이 좀 상하긴 하지만 나도 8시에 나왔으니 할 말이 없어 참을 수밖에….

8시 35분 출발. 어, 이거 만만하게 봤는데 길이 장난이 아니다. '이보다 더 높은 칼라파타르를 올랐으니 이 정도야'하고 생각했는데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니다. 숙소에서 빤히 보이는 흙산을 오르는 동안 기침이 터져 가슴을 움켜쥐고 서너 걸음마다 한 번씩 쉬면서 오른다.

가도가도 끝없는 길. 눈 앞에 보이는 봉우리인가 싶어 물으면 그 때마다 기얀드라는 "그 뒤"라고 대답한다. 바로 저 봉우리인가 싶으면 다시 다른 봉우리가 나타나고 이번에야말로 다 왔나 싶으면 뒤로 또 다른 봉우리가 보이고…칼라파타르보다 훨씬 더 힘들게 오른다.

10시 30분. 거센 숨을 몰아쉬며 두 시간 만에 고쿄리 정상 도착. 정상에서는 8000m를 넘는 산들인 초유와 에베레스트, 로체와 마칼루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없는 고개 위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을 바라보는 기분은 거침이 없다.


인디언들의 글이 생각난다.

사냥을 나간 인디언은 너무도 아름답고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말을 잃을 때가 있었다. 바위산 위에는 검은 먹구름과 함께 무지개가 드리워지고, 푸르른 계곡 심장부에서 하얀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드넓은 평원에서는 석양빛이 하루의 작별을 고했다. 그런 것들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예배하는 자세를 갖추곤 했다. 그러기에 인디언은 굳이 일주일 중 하루를 신성한 날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곧 신이 준 날이기에!


지금 이 산에서 머무는 내게도 하루하루가 신이 준 신성한 날이다. 이 세상에 살아있음이, 살아서 내 튼튼한 두 다리로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음이, 나 홀로 신들의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허락한 그 누군가를 향한 감사의 마음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고쿄 리에서 바라보는 고쿄 마을과 촐라체와 따우체
고쿄 리에서 바라보는 고쿄 마을과 촐라체와 따우체김남희
30분 남짓 머물다가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오는 길이 워낙 가팔라 발목과 종아리에 부담이 올 정도다. 하산은 50분 만에 완료. 숙소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수영 언니가 식당으로 건너온다. 여태 침낭 속에 누워 있었단다. 어제 저녁 8시 반부터 오늘 오후 12시까지! 정말 대단한 허리의 소유자다.

점심으로 커리를 시켜 먹는다. 요리사가 돌레로 나들이 간 탓에 맛이 어제와 다르다. 밥 먹고 햇볕 따뜻한 창가에 누워서 삼십 분쯤 잤다. 이 집처럼 따뜻한 집은 처음이다. 건물 전체가 이중창에 햇볕이 잘 들도록 위치를 잡아 밤에도 입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다. 한숨 달게 자고 일어나 시간을 보니 3시 40분. 짧은 겨울햇살이 부드러워지는 시간이다.

다시 고쿄리로 출발한다.

"You go. I sightseeing (너희들끼리 가. 난 관광하면서 여기서 놀래)"하며 안 간다는 기얀드라를 설득해 올라간다. 선글라스를 꼈지만 걷기가 힘들 정도로 산 뒤로 넘어가는 빛이 강렬하다. 반면에 해가 없는 곳에서는 추위로 온 몸이 얼어붙는다. 지난 번 칼라파타르에 올라갈 땐 눈사태 나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오늘은 빙하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밑에서 올라오던 언니는 3분의 1쯤 와서 추워서 못 가겠다며 내려간다. 그걸 본 기얀드라.

"언니, go down? why? (언니 왜 내려가는데?)"
"아마 피곤한 가봐."
"Tired? No! She sleep morning, we two climb! We tired. she no tired.( 피곤하다고? 말도 안 돼. 오늘 오전 내내 잠만 잤잖아. 오늘 두 번째 여길 오르는 우리가 피곤해야지, 왜 언니가 피곤해?)"

영어도 잘 하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쉽게 다 표현하다니….

야크 등에 트레킹 장비를 싣고 전진 중인 트레커들과 포터들
야크 등에 트레킹 장비를 싣고 전진 중인 트레커들과 포터들김남희
언니가 내려가니 흥도 안 나고, 게다가 해마저 산을 넘어가 몹시 춥다. 결국 에베레스트가 보이는 바위산 중턱까지 올라가서 하산을 결심한다. 정상까지 20분만 더 가면 되는데 그냥 거기서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오고 만다.

"야, 내가 무슨 사진가도 아닌 주제에 남들은 한 번 오르기도 어렵다는 곳을 두 번이나 오른담. 내려가자, 내려가."

석양을 받은 산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기얀드라는 "디디(누나), 포토?" 어김없이 묻는다. 그러나 춥고, 지치고 배고픈 나는 사진이고 뭐고 관심 없다. "No photo(사진 안 찍어)!" 외치고는 하산이다. 그저 빨리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멀리 숙소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그립고 반갑다.

내려가는 길에 이 녀석이 길은 완전히 무시하고 그 가파른 언덕을 그냥 치고 내려간다. 따라가자니 나는 죽을 맛이다. 그나마 지팡이라도 있어서 그걸로 버팀목을 삼아 무릎에 힘을 팍팍 주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기를 쓰며 내려올 뿐.

숙소로 돌아와 "오늘 두 번 오르느라 고생했다"며 저녁 먹으라고 팁을 주니 너무 좋아한다. 계란 라면으로 저녁을 먹고, 난롯가에서 몸을 녹인다. 잠자리에서 삼겹살 먹고 싶다고 얘기했다가 언니에게 혼났다. "그만하고 자!"라고.

트레킹 열 네 번째 날

날씨 : 눈부시게 맑은 하루.
걸은 구간 : 고쿄(Gokyo)-팡가(Fangka)-마첼모(Machhermo)-루자(Luza)-돌레(Dole)
소요 시간 : 다섯 시간 반
복장 및 위생 상태 : 지저분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음

7시 기상. 날은 오늘도 쾌청하다. 아침 먹고 8시 50분 출발.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 오리들이 헤엄치는 호수를 오른쪽으로 끼고 걷는다. 1시간 남짓 평지를 걷고 나니 돌계단이 나온다. 이곳으로 올라올 때 꽁꽁 얼어있던 길은 그새 녹아 물이 흐르고 있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차가운 물을 손에 받아 마셔본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지만 뒷맛이 텁텁해 썩 맛있는 물은 아니다. 이제는 왼쪽으로 빙하 녹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이어진다. 귓전을 가득 채우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리.

멍라 마을. 왼쪽 뒤로는 아마 다블람이 보인다.
멍라 마을. 왼쪽 뒤로는 아마 다블람이 보인다.김남희
10시 20분 팡가(Pangka 4485m) 도착.
삼십 분 만에 마첼모(Machhermo 4450m) 도착.
남갈 로지(Namgal Lodge)에서 핫 초콜릿을 마시며 잠시 쉰다. 이곳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깨끗한 숙소다. 고쿄에서 우리가 머물던 고쿄 리조트가 따뜻함의 극치였다면 여긴 깨끗함의 극치. 방은 햇볕이 잘 들지 않지만 이 트레일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침대를 갖추고 있다. 나무로 대충 짜맞춘 침상이 아니라 정말 침대다! 부엌과 식당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결국 차 한 잔 마시러 왔다가 우리는 이른 점심을 먹고 간다.

눈 쌓인 설산을 바라보며 언니와 나눈 대화.

"저 하얀 생크림 좀 봐. 먹고 싶다."
"난 크림이 살짝 덮인 고구마 케잌. 피칸 파이도 먹고 싶다."
"…그만 하자."
우리는 점점 말초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걸까.

12시 45분 출발. 1시 10분 루자(Luza 4360m).
루자로 오는 길에 고쿄 리조트의 요리사를 만났다. 등에는 나무 짐을 가득 지고 있다. 돌레에서 나무를 사서 올라가는 길이란다. 루자에서 내려오는 길은 산의 허리를 둘러 벼랑 사이로 난 길. 눈이 녹아 질척거린다.

2시. 라팔마(Lhabarma 4417m).
2시 30분. 돌레(Dole 4080m) 도착.
예티 인에 들러 써니와 캔에게 인사. 써니는 아빠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서는 길이다.

햇살을 등지고 산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눈부시다. 돌레를 벗어나자마자 나무들이 보인다. 고도가 낮아져 식물생장한계선을 벗어났음을 실감한다. 이 길로 올 때는 온 나무들이 눈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있었는데, 지금 눈꽃은 흔적도 없이 녹고 길만 미끄럽다. 누군가 위험한 구간마다 얼음을 깨고 흙을 뿌려 놓았다. 그 마음이 몹시 고맙다.

4시 15분. 포르체 드렝카(Phortse Drengka 3680m) 도착.
이곳에 집이라고는 한 눈에 보기에도 작고 초라한 두 집뿐이다. 이곳에서 쿰중까지는 두 시간을 더 가야 한단다. 다음 마을인 멍라까지도 언덕을 한 시간 넘게 올라가야 하고. 해가 지기 전에 머물 곳을 찾아야 하기에 결국 이곳에 머물기로 하고 짐을 푼다.

숙소라고 들어와 보니 부엌과 나무 침상 여러 개가 놓인 작은 방 하나가 전부인 두 칸 짜리 집이다. 지금껏 자 본 곳 중 가장 열악한 시설이다. 식구들은 모두 포르체에 살고 19살 된 주인 여자가 13살 된 여동생을 데리고 이곳에 머물고 있다. 오늘 쿰중에서 우아하게 씻으려 했는데 망했다. 그저께 저녁 때 고쿄에서 뜨거운 물에 씻은 후 내내 물티슈로 닦고 있다. 머리 안 감은 지는 내일 모레면 꼭 2주다. 온 몸에는 하얀 밀가루 같은 살비듬이 가득하고….

눈덮인 바위산과 길
눈덮인 바위산과 길김남희
우리는 화덕 옆에 불을 쪼이며 앉아(이 집에는 식당이 따로 없다) 먹고 싶은 음식들을 말해 본다.

나 - 계란찜. 오뎅을 듬뿍 넣은 떡볶이. 보쌈.
언니 - 깻잎향이 물씬 나는 순대 볶음. 날아가지 않는 하얀 쌀밥 위에 얹어 먹는 겉절이 김치.
나 - 엄마가 해준 꽃게찜. 엄마가 비오는 날이면 만들어주는 오징어 넣은 호박전.
언니 - 엄마의 코다리조림.
나 - 자장면과 미역국과 갈치구이.
언니 - 엄마가 해주는 잡채랑 멸치볶음.
나 - 오징어채 볶음이랑 잘 익은 총각김치. 그리고 고등어 신김치 조림과 돌솥 비빔밥.
언니 - 매운 오징어볶음.
나 - 부산 오뎅과 제육볶음.
언니 - 이제 그만 할래. 미칠 것 같아.

마지막 남은 물티슈로 얼굴과 발을 닦고, 잠자리에 든다. 생각보다 춥지는 않다.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볼과 손등이 발갛게 얼도록 물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 남체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볼과 손등이 발갛게 얼도록 물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 남체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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