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듯이 일하고 얻은 10년만의 휴가

변호사 서희원의 겨울 산행기 <10년만의 휴가>

등록 2004.04.28 16:27수정 2004.04.2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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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0년만의 휴가>
책 <10년만의 휴가>북피디닷컴
살다 보면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 왔나?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에 종사할수록 이런 마음이 더욱 강렬하다.

쉬고 싶을 때에 쉬지 못하고 일해 온 이 책의 저자는 10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해 혼자 겨울 백두대간의 산행을 감행한다. 잠시 자신의 일을 접고 그간의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씻어버리기 위해 오르는 겨울 산은 그다지 만만치가 않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아니, 이 사람은 좋은 직업에 불만족스러운 일이 없을 것 같은데, 뭐 하러 이런 고생을 사서 했지?' 하는 의문이 절로 든다. 하지만 세상에는 늘 완벽한 만족이란 없는 법. 그 또한 산행을 통해 지난 삶을 돌아보고 새로움을 얻고 싶었던 모양이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마흔을 맞이하면서 "지나간 10년이라는 세월이 문득 자신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으며,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법으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을 시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처음으로 겨울 산을 등반하면서 느낀 감상들을 메모하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 바로 이 책 <10년만의 휴가>이다. 사실 저자는 개인적으로 이 산행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경험이었기에 다시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삶에 회의를 느낀 어느 누군가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싶은 마음에 출간을 결심했다고.

"그동안 1년에 1주일 휴가를 내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주로 법원만 오가며 재판 준비를 하느라 보냈다. 사건이란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하고, 재판이란 어쩌면 법이라는 테두리 내에서의 하나의 게임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게임은 총칼이 없을 뿐이지 당사자들에게는 하나의 전쟁이며, 변호사란 의뢰인에게 고용된 용병이다."

10년 동안의 변호사 생활을 돌이켜 보며 저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재판, 재판 결과에서 느꼈던 좌절, 자신이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책으로 인한 끝없는 절망,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법정에 몸을 담고 있었던 기간에 느꼈던 무한한 회의(懷疑)가 그를 험한 겨울 산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 산행 역시 또 다른 시련의 연속이었다.

엄청난 눈보라 속에 혼자 산길을 걷는 것만큼 무섭고 외로운 게 또 있을까. 그는 설악산을 오르며 이와 같은 생소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는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만큼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자신은 지금껏 어리석음으로 눈앞에 있는 현실조차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고 반성한다.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위기 상황 속에 서게 되면, 내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삶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산 속에 있는 한 그 산의 크기를 모르듯이, 내가 안주하는 삶 속에서는 내 삶의 모습과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산을 떠나야 산의 모습이 보이듯이, 내가 안주하고 있는 내 삶을 버리는 그곳에서 비로소 내 삶의 모습과 새로운 의미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용기를 내자."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업을 갖고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정신이야말로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값진 보배이다. 대부분 자기 안주에 급급할 나이가 마흔이 아니던가. 하지만 저자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힘든 산행을 감행하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성한다. 그 겸손함과 시련을 토대로 더 나은 삶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하늘에는 눈만 소리 없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고요함이 마치 폭풍 전야 같은 느낌이다. 잠시 쉬며 배낭에서 위스키를 꺼내 한 모금 마시자 온몸이 따뜻해졌다. 내가 점점 위험의 한가운데로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죽음이라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 왔다.

나는 지금 분명히 온몸으로 무언가 다가올 위험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여기 겨울 산만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사고나 질병 등 신변에 직접적인 위험도 있고, 갑작스런 사업의 실패나 가정 문제 등도 똑같은 형태의 위험이 될 수 있으며, 조금 전 자살한 여자처럼 스스로 원해서 죽음이 선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듭되는 험한 여정 속에 그는 인생 자체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안전한 삶이란 어디에도 없을진대, 위험이란 요소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현명하게 극복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설악산, 오대산, 치악산 등의 산을 연달아 오르고 정상에 도달하면서 그는 어느 순간 정상에 도달하는 그 느낌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초라한 돌무더기 사이에 허무하게 서 있는 정상 표지 바위를 보고자 힘든 과정을 거쳤다는 허무감. 저자는 이 바위 덩어리를 보는 것이 결코 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사고를 얻는다.

"이 차가운 바위 덩어리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도 없고 어떤 깨달음을 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정상이란 무의미한 것일까. 아니라면, 정상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번 여행도 그렇거니와 인생 자체가 정상에 선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한순간에 해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상이란 모든 순간과 순간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하나의 과정일진대, 우리는 정상 이외의 과정이 오직 정상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정상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경우 그로 인해서 실제 정상에 섰을 때는 그 허탈감의 강도도 커진다."


그는 결국 정상에 오름으로써 비로소 정상에 대한 허상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의 산행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죽음 앞에서는 하찮게 여겼던 평범한 일상이 가장 그립고 아쉽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사실 이런 거창한 산행이나 인생의 시련, 죽음의 위기 등이 아니면 평범하면서도 진정으로 소중한 가치를 잊고 살기 쉽다. 주변의 사소하고 단조로운 것들이 사실은 가장 소중하다는 진리, 독자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간접적으로나마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다.

10년만의 휴가

서희원 지음,
북피디닷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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