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뒷산 멧새들의 보금자리박도
우리 가요에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는 노랫말이 있다. 그동안 교단에 섰던 나는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등 날씨에 관계없이 수십 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안흥으로 내려와서 얼치기 농사꾼이 된 후는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 되고 있다. 지난 주말에 두둑에 비닐을 덮다가 그만 두고 다음 날로 미뤘는데 이튿날도, 그 다음 날도 비가 계속 와서 쉬었다.
그 다음 날 오후, 잠시 날이 개기에 아내와 비닐을 마저 다 덮었다. 이제는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옮겨 심으려 하는데, 어제 온종일 또 비가 내려서 별 수 없이 쉬었다. 간밤 뉴스에 오늘은 날이 갠다기에 드디어 밭에다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내기로 작정했다.
새벽녘 멧새 소리에 잠이 깼다. 뒷산 숲에는 멧새들이 지천으로 많다. 이른 새벽이면 내 집 뒤꼍까지 내려와서 한참 지저귄다. 기분 좋은 기상 멜로디다. 그들의 지저귐을 내 멋대로 풀이해 본다.
"안녕하세요. 박도씨, 저희들은 매화산 기슭에 사는 멧새랍니다. 먼저 서울에서 이곳으로 내려오신 거 축하드려요. 참 잘 내려오셨습니다. 아무튼 저희들과 더불어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를 해치지 않아야겠죠. 박도씨가 저희를 함께 살아가는 동무로 귀하게 대접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날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드릴게요. 약속하시죠."
"그럼. 걱정 붙들어 매두라고, 귀여운 멧새들아. 너희들은 벌써 내 동무야."
어릴 때 농사를 지어 보긴 했지만 대부분 어른들이 시키는 잔일(소치는 일이나 못줄 잡는 일 등)만 했다. 그리고 호박이나 상추 정도는 길러봤지만 옥수수나 고구마 농사는 전혀 해 보지 않아서 식전 댓바람에 노씨네로 건너가서 강습을 받았다.
노씨가 한참을 씨앗 뿌리는 요령을 설명해 주고도 못미더운지 밭에 따라 와서 시범을 보이며 가르쳐 줬다. 옥수수 씨앗을 심을 때는 포기와 포기 사이를 한자쯤 사이 두고 비닐 뚫은 구멍에 낱알을 서너 개씩 넣으라고 했다.
내가 "한 알만 넣지 왜 서너 개씩 넣느냐"고 물었더니, 멧새들이 내려와서 먹을지 모르니 서너 개씩 넣은 후 나중에 싹이 모두 나오면 그 때 솎아 주면 된다고 했다.
농사꾼들은 한두 알 정도는 멧새에게 고수레할 작정으로 씨앗을 뿌리나 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들어 앞 뒤 밭에 까투리와 장끼들이 산에서 내려와서 한바탕 노는 게 눈에 자주 띄고 그들의 노랫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지곤 한다. 바야흐로 짝짓기 하는 사랑의 계절인가 보다.
아내는 서울에 볼 일을 보러 가고 혼자서 옥수수 씨앗을 세 두둑에 심고, 강낭콩을 두 두둑 심었다. 지난번에 사두었던 고구마 순이 시들어서 뿌리를 내리지 않을 것 같아서 마침 안흥 장이라 장터에 가서 사다가 네 두둑을 심었다.
호박 구덩이에 작은 노씨에게 얻은 모종을 내고, 장에서 사온 오이, 가지, 토마토 모종도 모두 내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는데 제대로 심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어느새 오후 네시다. 몇 두둑 더 남았지만 내일 씨를 뿌려야겠다. 아내가 횡성여성농업인센터에서 토종 콩 씨앗을 구해 왔다는데 함께 그걸 심어야겠다.
물을 데워 몸을 닦은 후 잠깐 눈을 붙인 후에 남은 하루는 글밭이나 갈아야겠다. 아직은 이르지만 "거친 밥 먹고 물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 삼고 있어도 즐거움은 그 가운데 있다"는 옛 사람의 풍류를 흉내라도 내어 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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