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산에 핀 꽃처럼 살고 싶어요!"

3박 4일의 아주 맛있고, 재밌고, 즐거웠던 수업 이야기

등록 2004.05.27 07:10수정 2004.05.2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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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아이들에게 여행 소감을 묻자 마치 지휘자의 신호에 맞추어 돌림노래라도 부르듯 불과 일이 초 사이에 이런 대답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재미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수학여행 다시는 안 가요."
"학교에 남은 애들이 더 재미있었대요."

거의 소음에 가까운 말보다는 아이들의 표정이 더 실감이 났습니다. 이마에 내 천(川)자를 그리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이들과 제주도에서의 추억을 더듬기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은 얼추 7:3 정도로 갈렸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수학여행을 가지 못해 학교에 남은 아이들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 보인 점이었습니다.

저는 올해 담임을 맡지 않은 터에 1학년 전담이라 수업도 없고 해서 학년부장 선생님이 함께 가자고 하면 못이기는 척 따라가든지, 아니면 수학여행 기간 동안 모처럼 하루 이틀 연가를 내어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년 부장선생님이 제게 내민 것은 수학여행 불참자 명단이었습니다. 3박 4일 동안 담임이 되어 아이들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실망이 아주 컸습니다. 하지만 불참자 명단에 적힌 아이들의 이름을 보자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운동부와 입원 환자를 제외한 불참 학생 6명 중 4명은 수업시간마다 눈을 마주친 아이들이었고, 2명은 도서관에 자주 들르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적힌 임시 출석부를 학년부장 선생님으로부터 건네 받으면서 비록 나흘 동안의 짧은 기간이지만 그들의 담임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습니다.

"난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수학여행을 못 갔어. 왜 못 갔는지 기억이 잘 안나. 가정형편이 좀 어려웠을까? 아마 그랬던 것 같애. 그래도 부모님을 졸랐으면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을 걸 보면 내가 좀 착했나 봐. 너희들도 나와 비슷하지 않니?"

나흘 동안의 특별한 만남이 시작되던 첫날 첫 시간, 저는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몇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몇 아이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비 150원을 내지 못하여 담임 선생님께 손바닥을 얻어맞았던 얘기도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나뿐만이 아니었어. 반 아이들 중 열 명이 넘게 운동회비를 못 냈는데 하루는 다 손바닥을 때리는데 나만 안 때리시는 거야. 그날 주산경연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우리 학교 대표로 나가기로 되어 있었거든. 그래서 그날은 나만 특별히 봐주신 건데 지금 생각하면 그날 안 때리신 것이 고마운 것이 아니라 다른 날 운동회비를 안 냈다고 손바닥을 맞은 것이 억울한 생각이 드는 거 있지."


그렇게 말하고는 빙그레 웃자 아이들도 따라 웃었습니다. 그 웃음 끝에 저는 아이들에게 나흘 동안 어떨까 보낼 것인지 계획을 세워보자고 제안을 했고 아이들은 처음과는 달리 환하고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기꺼이 응해주었습니다. 아이들과 머리를 맛 댄지 약 20분 가량이 지나 드디어 나흘 동안의 일정표를 만들었습니다.

첫째 날
오리엔테이션(계획 세우고 청소하기) / 1시간
자기가 읽고 싶은 책 읽기)/ 1시간
담임과의 대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1시간
봉사활동(도서관 도우미 활동) / 1시간


둘째 날
팝송 배우기(Bridge Over Troubled Water)/ 1시간
선생님이 권해주는 책 읽기)/ 1시간
영화감상 및 토론(굿 윌 헌팅)/ 2시간

셋째 날
자연탐사 및 야생화 촬영 / 4시간

넷째 날
못 다 읽은 책 마저 읽기/ 1시간
담임 특강(행복해지는 비결)/ 1시간
소감문 작성 (1시간)
해산식 (잠깐)


a 내게 가장 소중한 것

내게 가장 소중한 것 ⓒ 안준철

시작이 절반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흘 동안의 일정표를 짜고 보니 뭔가 잘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일정표를 복사해서 아이들에게 한 장씩 나누어주고 나니 마음이 여간 뿌듯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표정도 더없이 환해 보였습니다. 나흘 동안 함께 생활할 도서관 열람실을 열심히 쓸고 닦고 하는 모습도 참 예뻐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대해주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첫날은 일정표대로 계획을 세우고, 청소를 하고, 자기가 고른 책을 읽고,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함께 대화를 나누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서관에 들어온 신간서적 라벨작업을 한 시간 가량 한 뒤에 오전 일과로 하루를 접었습니다. 저는 오후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면서 동네 비디오방에 들려 다음날 함께 감상할 영화 비디오 테이프를 빌렸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은 결손가정에서 자란 왜곡된 천재의 이야기입니다. 양아버지의 학대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채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그는 그와 비슷한 아픔을 지닌 한 정신과 교수를 만나면서 갱생의 길을 열어갑니다. 1세기에 한 명 태어날까 말까한 뛰어난 천재라고 해도 누구하고도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일종의 정신적 불구의 상태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돋보이는 영화이지요.

4일 동안의 수업

a '굿 윌 헌팅' 영화 감상

'굿 윌 헌팅' 영화 감상 ⓒ 안준철

영화를 감상하고 난 뒤에 저는 한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좀 지루하지 않았니?"
"예, 조금 지루했어요. 그래도 감동적이었어요."
"어떤 장면이 감동적이었는데?"
"주인공이 애인을 찾으러 떠나는 마지막 장면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눈빛을 보아하니 애인을 찾아 떠나는 주인공의 행동을 다분히 낭만적인 사랑의 행위로만 이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어차피 영화의 주제에 접근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기에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주인공이 여자 친구를 사랑하면서도 왜 떠나 보내야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진실과 대면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 거야.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한 번도 진실로 사랑해본 적은 없었거든. 물론 양아버지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탓이었지.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고 해도 그런 마음의 상태로는 자기 자신이나 세상을 위해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할 수가 없었지. 다행히도 숀 교수를 만나 상처가 치유되면서 한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용기를 갖게 된 거지. 그래서 출세가 보장되는 모든 길을 제쳐두고 먼저 사랑을 찾아 나선 마지막 장면이 나도 가장 감동적이었어."

영화 이야기를 끝으로 둘째 날을 접고, 모처럼 학교를 벗어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셋째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올 조짐을 보이더니 기어이 몇 방울의 비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몇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고, 저는 비가 많이 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우산을 준비하라는 말을 해주고는 가방 속에 사진기를 챙겨 넣었습니다.

a 산을 오르는 아이들

산을 오르는 아이들 ⓒ 안준철

오전 10시 30분 경, 우리는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9시 30분에 만나 순천대학교 도서관을 견학하고 대학교 근처 풀밭이나 돌 틈새에서 자라는 야생화에 몇 번 눈길을 준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산에 오를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행히도 비가 그치기 시작했고, 야생화를 찾아 헤매다 산길로 접어든 것이 꽤 가파른 길을 따라 정상까지 오르고 만 것입니다.

아이들이 군소리 없이 잘 따라 준 것이 저로서는 고맙기만 했습니다. 다음날 아이들이 쓴 소감문에는 들꽃 이야기며, 땀을 흘리며 산에 올랐던 이야기며, 산을 내려와 들렸던 식당에서의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a 틈새에 핀 꽃 (괭이밥)

틈새에 핀 꽃 (괭이밥) ⓒ 안준철

-정말 다른 사람들이 키워주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잘 자라서 그런지 어느 꽃집에 놓여진 아름다운 꽃보다도 더 화려하고 강해 보였다. 나도 산에 핀 꽃처럼 살아야겠다. 3박 4일 동안 재밌게 해주시고 영화도 보여주고 밥도 사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엔 수련회를 빠져서 또 놀까요? 정말 그러고 싶은데, 수련회는 가야겠지요? 한 번 담임 선생님은 영원한 담임 선생님!

-다른 꽃에 가려진 숨어 있는 꽃이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름을 모르는 야생화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시간을 내서 산을 자주 다녀야겠다. 환희 웃어주는 미소 변치 마시길 빕니다. 등산을 하고 밥 먹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4일 동안 선생님한테 좋은 말만 듣고, 아주 재밌고 즐거웠던 날인 것 같아요.

a 병호가 발견한 들꽃

병호가 발견한 들꽃 ⓒ 안준철

-산에 올라가서 이쁜 꽃도 보고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마시니깐 온 몸이 맑아지는 것 같아 즐거웠다. 내가 모르는 야생화를 알게 되어 기쁘고 좀더 야생화에 대한 관심이 생김. 꽃 사이사이에 피어난 꽃이 더 이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산에도 이렇게 예쁜 꽃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나도 꽃처럼 되고 싶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많이 보고, 예쁘고, 화사해서이다.

-나흘 동안 책을 두 권이나 읽었다. 평소에는 책을 잘 읽지도 않았지만 3박 4일 동안의 기간을 통해 책을 많이 읽게된 계기가 되었음. '종이밥'이란 책에는 동생을 절에 보내야했던 오빠의 안타까움이 나왔었는데, 동생은 자기가 절에서 살아야한다는 걸 모르고 재잘거리던 것이 내 마음을 찡하게 했다. 평상시 동생을 내가 많이 괴롭혔던 것 같은데 책을 읽고나니 동생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고 내 가족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a 은경이가 찾아낸 꽃

은경이가 찾아낸 꽃 ⓒ 안준철

-이쁘다. 이쁘네. 근데, 내가 불만 한 가지가 있는데 내가 계속 이쁘다고 하는 꽃마다 선생님께서는 그냥 이름만 말해주시고 사진도 안 찍고, 그냥 가시는 것이 좀 서운했다. 선생님, 어제 정말 재밌고 즐거웠어요. 평생 제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이랬으면 좋겠는데...제가 다음에는 요, 돈이 많이 있을 때요, 선생님께 밥 한 끼 대접해 드릴게요. 그때 거절하지 마세요!

-산에 이렇게 예쁘고 다양한 꽃들이 많이 있는 줄 정말 몰랐다. 산에 자주 다녀야겠다. 선생님이랑 땀을 흘리며서 가니깐 기분이 좋았었다. 시간 나면 수학여행 못 간 아이들과 다시 한 번 산에 올라가고 싶다. 3박 4일 동안 저희에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야생화에 대해서 가르쳐 주셔서 감사드리고 싶어요.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또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요.


a 뱀딸기

뱀딸기 ⓒ 안준철

3박 4일 동안 흠뻑 정이 든 아이들을 떠나 보내고 혼자 도서관에 남아 아이들이 쓴 소감문을 읽으면서 저는 행복하기도 하고 슬픈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주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아이들인데. 아이들은 교사가, 혹은 어른들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만큼 성장하고 변화하는데 그 동안 아이들에게 너무도 해준 것이 없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나흘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왜곡된 천재보다는 따뜻한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며 애써 척박한 땅에 사랑의 씨를 뿌리는 보통 사람을 만드는 곳이 학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보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담아서 마지막 날 아이들에게 들려준 말입니다.

"어제 우리가 다녀온 산에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지만 그 꽃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수십 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내가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과연 내가 행복할까요? 여러분과 나흘 동안 함께 지내면서 선생님은 많이 행복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때 선생님은 왜 행복했을까요?"

그 물음에 몇 번 망설이다가 '사랑'이라고만 아주 작게 대답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쓴 소감문에는 이런 글도 있었습니다.

-지금 저를 학교에 보내주고 하루 세끼 굶지 않게 해주시는 아빠 엄마의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쓰신 책에 나오는 분은 엄마의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아직까지도 부모님의 직업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면 난 아직 어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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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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