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거스름 돈은 꼭 갖고 오세요!"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의 사랑이야기(14)

등록 2004.05.28 16:56수정 2004.05.2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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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아내가 파마를 해야 하겠는데 생활비가 떨어져 미장원을 못 간다고 툴툴거린다. 내가 돈이 있으면 선뜻 주겠는데 이달치 용돈을 다 쓰고 나서 줄 돈이 없다.


아내도 나이 50줄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늙어 가는 모양이다. 건망증이 심한 것은 부부일심동체라고 예전부터 그랬지만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머리 속이 훤히 보일 정도이다.

a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박철


아내는 거의 화장을 안 한다. 화장을 안 하니 화장품을 사게 되는 경우도 없다. 돈을 주고 옷을 사 입는 경우도 없다. 일년에 서너 번 미장원에 가서 파마를 하는 것이 유일하게 자신을 위한 치장이라고 할까? 돈이 없어 미장원을 못 간다고 툴툴거릴 때 얼른 돈을 내주면 좋을 텐데 지갑에 단돈 천원이 없으니 나도 딱할 노릇이다.

어제 저녁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은빈에게 아내가 말을 건넨다.

"은빈아, 엄마가 머리 파마를 좀 해야 하겠는데 돈이 없어 못한다. 네 돈 좀 빌려줄래. 엄마가 다음달에 꼭 갚을게."
“엄마, 머리 파마하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
“응, 1만7000원인가?”
“엄마,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은빈이는 우리집에서 짠순이로 통한다. 돈을 절대로 쓰지 않는다. 올 설날 때 어른들에게 세배하고 받은 돈부터 가끔 받는 용돈을 헌금하는 것 외에는 하나도 쓰지 않고 꼬박꼬박 모아두었다가 몇 달에 한 번 은행에 저축을 한다.


내가 가끔 용돈이 떨어져 은빈이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해도 잘 빌려주지 않는다. 마지못해 빌려주는 경우에도 약속한 날에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런데 아내가 머리 파마를 하겠다고 파마 값을 빌려달라고 했더니 군말 한마디 없이 자기 방으로 돈을 가지러 달려간다.

은빈이가 빳빳한 만원권 지폐 두 장을 들고 거실에 나타났다.


“엄마, 이 돈으로 머리 파마하세요. 엄마한테 빌려주는 게 아니고 그냥 드리는 거예요. 천원짜리가 없어서 만원짜리 두 장을 드릴 테니 대신 거스름돈은 꼭 갖고 오세요.”

a 은빈이가 엄마를 도와 밭두렁 비닐 구멍을 뚫고 있다.

은빈이가 엄마를 도와 밭두렁 비닐 구멍을 뚫고 있다. ⓒ 박철

아내와 나는 귀를 의심했다. 자기 돈으로는 아이스크림 하나 안 사먹는 짠순이 은빈이가 아내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준다는 것이다. 아내는 은빈이가 건네준 돈을 받아 들고,

“은빈아, 고맙다. 너 정말 이 돈 엄마 주는 거야?”
“네.”

아내는 감격했는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기특하고 대견했다. 내가 약간 배가 아파서,

“은빈아, 너는 아빠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잘 안 빌려주면서 엄마가 빌려 달라고 했더니 그냥 쓰라고… 야, 너 아빠를 차별하는 거 아니니? 아빠도 머리를 깎아야 하는데 돈 좀 빌려주라.”

“아빠는 안돼요. 엄마는 나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시는데요.”
"그럼 아빠는 너를 위해서 하나도 고생을 안 한단 말이냐?"

오늘 아침 아내는 은빈이가 준 돈을 갖고 미장원을 갔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 돌아왔다. 파마도 하고 브리지도 했다.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부른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 콧노래를 다 불러요? 딸이 준 돈으로 파마를 해서 그렇게 기분이 좋아?”

“그럼요. 내가 미장원에 가서 은빈이 얘기를 하고서 거스름돈은 꼭 갖고 오라고 했다고 그랬더니 미장원 아줌마가 그렇게 기특한 아이가 어디 있냐면서 2천원을 깎아주잖아요. 그래서 거스름돈 5천원을 갖고 왔어요.”

a 아빠, 순무 꽃 하고 나하고 누가 더 예뻐요?

아빠, 순무 꽃 하고 나하고 누가 더 예뻐요? ⓒ 박철

잠시 후에 은빈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파마를 한 아내를 보자 가방을 맨 채로 달려와 자기 엄마를 꼭 끌어안는다.

“엄마, 고마워요. 제 돈으로 엄마 머리 파마를 해서 너무 좋아요.”

“은빈아, 엄마가 고맙지. 엄마는 은빈이 같이 착한 딸을 두어서 너무 자랑스럽다. 고마워. 은빈아!”

‘아, 못 봐주겠다.’ 아내가 거스름돈 5천원을 은빈이에게 돌려주자,

“엄마, 그 돈도 엄마가 쓰세요. 그냥 제가 해 본 소리예요.”

지금은 아내와 은빈이가 은빈이 방에 들어가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다. 둘이서 가장 친하다.

은빈이는 아내가 40이 넘어서 낳은 딸이다. 우리집 늦둥이로 태어난 은빈이가 아내에게 가장 큰 위로와 기쁨을 준다. 나는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하다. 약간 배가 아플 때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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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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