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도 생명·인권 있어... 뺏아간 500여권 돌려달라"

한길사, 압수됐던 <해전사> 이창동 장관에게 반환 요청

등록 2004.05.28 18:04수정 2004.05.2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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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당시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 표지
초판 당시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 표지한길사
"한 권의 책에도 인권이 있습니다. 귀중한 정신의 창작인 책을 저 어두운 창고의 구석에 유폐시켜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시켜주어야 합니다."

도서출판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지난 27일 이창동 문화부장관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 중 일부다.


이 서신이 쓰여진 이유는 군사정권 시절인 지난 1979년 10월 29일 한길사에서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아래 해전사) 제1권 500여권을 당시 문화공보부에 압수당해 지금까지 되돌려받지 못했기 때문. 김 대표는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생명 같은 책이 창고 안에 쳐박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그동안 잊고 살았는데 역사를 정리하자는 차원에서 서신을 보내게 됐다"고 서신을 보낸 이유를 밝혔다.

김 대표는 서신에서 "당시 귀 부처는 특히 임종국 선생의 '친일파와 친일행위의 실태' 등을 강제압수의 이유로 삼았다, 귀 부처 담당자는 '친일 좀 했다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질책했고 결국 (김 대표가)500권을 용달차에 실어 귀 부처(현재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 사용 건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며 "강제 압수해간 500여권의 책을 돌려줬으면 한다"고 이 장관에게 요청했다.

김 대표는 또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는 비상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귀 부처의 그런 조치에 대해 어떤 대응도 못했으나 80년 봄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아 다시 '해전사' 제1권을 재출판 하기도 했다"며 "이 책의 내용은 이미 보편적인 역사인식 내지 역사정신이 되어 우리 국가사회의 소망스런 지향과 이론으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1979년 출간된 해전사는 1945년 전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부문의 역사적 진실을 민족사관에 입각해 분석한 기획출판물이다. 총 6권으로 이뤄진 해전사는 80년대 대표적인 '의식화 서적'으로 당시 한국사회를 움직인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아직까지 금서 목록에 포함돼 있다. 특히 압수 당한 제1권에는 송건호 선생의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을 비롯해 임종국 선생의 '일제말 친일 군상의 실태', 백기완 선생의 '김구의 사상과 행동의 재조명' 등 다수의 논문이 수록돼 있다.

한길사는 책 발간 25주년을 맞아 해전사 1권을 재출간 했다. 김 대표는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재발간 했다"며 "책은 시대와 더불어 만들어진다, 그런 점에서 해전사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읽고 민족의식 키우게 했다"고 재출간의 의미를 밝혔다.


[전문] 김언호 대표가 이창동 장관에게 보낸 서신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 귀하

나라와 사회의 문화관광 발전을 위해 진력하시는 장관님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저희 한길사가 1979년 10월 15일에 출간한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1. 저희 한길사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1979년부터 89년까지 10년에 걸쳐 전6권으로 출간한 바 있습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일제에 의해 해방되던 1945년 전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부문의 역사적 진실을 민족사관에 입각해 분석한 기획출판입니다. 이 기획에는 연구자 50여 명이 참여했고, 그 이후 우리 현대사 연구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80년대 전기간에 걸쳐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확고한 민족의식을 심어준 감동적인 출판성과였습니다.

2.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은 1979년 10월 15일에 발행되었는데, 이 책 500여 권이 1979년 10월 29일 귀 부처에 의해 강제 압수되었습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에는 송건호 선생의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을 비롯해서 진덕규 교수의 「미군정의 정치사적 인식」, 임종국 선생의 「일제말 친일 군상의 실태」, 오익환 선생의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 백기완 선생의 「김구의 사상과 행동의 재조명」, 이동화 선생의 「8·15를 전후한 여운형의 정치활동」, 유인호 선생의 「해방후 농지개혁의 전개과정과 성격」, 김도현 선생의 「이승만 노선의 재검토」, 김학준 선생의 「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 임헌영 선생의 「해방후 한국 문학의 양상」, 염무웅 선생의 「소설을 통해본 해방직후의 사회상」 등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논문들은 일부는 이미 발표되었던 것들이고, 일부는 새로 집필되었습니다. 각 글들은 해방전후에 전개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3. 당시 귀 부처는 특히 임종국 선생의 '친일파와 친일행위의 실태' 등을 강제압수의 이유로 삼았습니다. 귀 부처의 담당자는 10월 28일 본인을 호출하여 "친일 좀 했다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질책했습니다. 10·26군사정변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계엄사령부에서 귀부처에 파견한 군관계자와 귀부처의 담당자는 강압적인 분위기로 본인에게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의 즉각회수를 명령했습니다. 본인은 그 이튿날인 10월 29일 500여 권을 용달차에 실어 귀부처(현재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가 사용하고 있는 건물)에 갖다주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는 비상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귀 부처의 그런 조처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은 80년 봄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아 다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4.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6권 가운데 특히 제1권은 80년대 한국사회를 움직인 고전적인 한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이미 보편적인 역사인식 내지 역사정신이 되어 우리 국가사회의 소망스런 지향과 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5. 이제 귀 부처가 강제 압수해간 500여 권의 책을 저희 출판사에 되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정부의 조처가 바람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시대와 국가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출판문화는 가장 기초적인 인프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국가사회가 성취해낸 민주주의와 산업화, 민족의식과 문화적 역량은 저 80년대에 치열하게 전개된 출판문화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 책의 시대, 그 출판문화 운동의 한 가운데에 <해방전후사의 인식>, 특히 그 제1권이 서 있다고 생각됩니다. 강제 압수해간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을 되돌려주는 일은 한 시대에 출판문화의 가치와 정신을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권의 책에도 인권이 있을 것입니다. 귀중한 정신의 창작인 책을 저 어두운 창고의 구석에 유폐시켜 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시켜주어야 합니다. 본인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을 기획한 출판인으로서 어두운 창고 어딘가에 유폐되어 있을 그 책들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답답합니다. 한 권의 책은 살아있는 정신과 지성의 생명체입니다. 정신과 지성의 생명체가 햇빛 아래서 숨쉬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 500여 권을 저희 출판사에 제대로 돌려주는 일은 지난 날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으면서 우리 시대의 고귀한 지성을 존숭하는 상징적인 문화정책의 일환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4년 5월 27일
(주)도서출판 한길사 대표이사
김언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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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동안 한국과 미국서 기자생활을 한 뒤 지금은 제주에서 새 삶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닌 밝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실천하고 나누기 위해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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