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나간 후 부끄러워 다닐수가 없다"
<조선> '굶는 아이들'서 과장·왜곡 말썽

[제보취재] '꿰맞추기식 보도' 지적... 가족 · 봉사자들 '분개'

등록 2004.06.01 04:06수정 2004.06.0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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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연중기획 '우리이웃' 기획물 중 하나로 결식아동에 대한 연재기사를 내보내면서 현장 확인취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사실을 과장·왜곡해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는 결손가정 현장 취재를 하면서 '어려운 형편'을 부각시키기 위해 비참한 사진을 내보내고, 각종 지원금을 터무니없이 낮춰잡아 결손가정 가족과 봉사자들의 강한 반발을 받고 있다. 현재 취재에 응한 가족은 "부끄러워서 밖을 나다니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과 허탈감에 빠져 있다.

30만 아이들이 굶고 있다? 충격을 준 <조선> 1면 사진

a 5월 27일자 <조선> 1면. 굶주린 듯 앉아 있는 아이 뒤쪽 벽 오른쪽에 '배고파'라는 낙서가 선명하게 보인다.

5월 27일자 <조선> 1면. 굶주린 듯 앉아 있는 아이 뒤쪽 벽 오른쪽에 '배고파'라는 낙서가 선명하게 보인다. ⓒ 조선일보

지난 27일 아침 조선일보를 펴든 많은 국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일자 조선일보 1면에 3분의 1정도로 커다랗게 박힌 사진 속에서, 한 사내아이가 허름한 문간 옆에 기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아이가 기댄 벽 오른쪽 위, '배고파아'라는 붉은 글씨의 낙서가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굶주리는 북한 어느 지역의 농가를 찍은 것처럼 보이는 이 사진은 2004년 대한민국 서울의 한 주택가 풍경.

사진 위에는 굶주린 배를 움켜쥔 듯 고개를 숙인 아이의 말처럼 보이는 문장("형은 학교급식으로 점심이라도 해결하지만 난 그것도 못먹어요")이 긴 제목으로 뽑혔다. 사진 아래에는 "30만 우리 아이들이 굶고 있습니다"라는 기획기사 제목이 굵은 글씨로 박혔다.

조선일보가 이 사진과 함께 1면과 4면, 5면 전체를 할애해 내보낸 기사는 '배고픈 아이들' 시리즈 첫번째 기획물이다. '우리이웃' 연중기획 중 하나인 이 시리즈물의 내용은 가정파괴 등으로 제대로 된 양육을 받지 못한 채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이 전국적으로 30만에 이른다는 것.


조선일보는 서울 지역 몇몇 결손가정을 찾아 실태를 확인하고, 이들에게 보다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이같은 시리즈물을 기획했다. 시리즈 기사는 27일에 이어 28일에도 보도됐다.

이 사진을 접한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 기사를 직접 기획, 취재한 박돈규 기자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박 기자는 <조선닷컴>에 올린 취재후기 형식의 글에서 이 기사가 나간 후 "28일 밤까지 각 봉사단체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가 1000통이 넘는다"고 밝혔다. 박 기자는 또 "27일자 1면에 나간 사진이 북한의 아이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는 분들을 많이 만났다"고 밝혔다.

취재 응한 가족 "부끄러워서 나다닐 수가 없다"

하지만 기사가 나간 후 취재에 응한 가족들과 후원자들은 국민들보다 더 큰 충격과 허탈감에 빠졌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사진과 기사를 접한 뒤 받은 고통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1면에 실린 사진의 주인공은 이승용(조선일보 가명 인용·7·서울 사근동)군. 승용군은 2002년 2월 어머니의 재가 이후 현재까지 할머니 정만호(71)씨와 형 승재(가명·13), 누나(초등학교 5년) 등과 함께 살고 있다.

조선일보는 승용군 가정형편의 어려움을 취재하면서 형 승재, 할머니 정씨 등의 말을 인용해 "할머니가 아프면 나랑 동생들은 아침 저녁을 그냥 굶는다"거나 "형처럼 학교 급식도 받지 못해 아침 점심도 굶을 때가 많다"고 보도했다.

또 "동사무소에서 주는 기초생활보장비 월 29만5000원이 승재네의 유일한 수입", "월세 10만원짜리 반지하방", "올 초부터 매달 동사무소에서 초등학생인 승재와 여동생 앞으로 각각 30장씩 나오는 2500원짜리 식권으로 끼니를 잇는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 같은 기사를 접한 승용군의 가족들은 충격을 받았다. 마치 굶고 있는 북한 어린이를 묘사해 놓은 듯한 사진과 기사 내용 때문이었다.

31일 사근동 집에서 만난 할머니 정씨는 "부끄러워서 밖에 나다니지를 못할 정도"라며 "새끼들만 아니면 죽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다"고 울먹였다.

정씨가 "부끄러워"한 것은 어려운 가정형편이 공개된 탓만은 아니었다. 정씨는 "이제 기자고 뭐고 안 만나고 싶다"며 문답을 피했지만, 주변에서는 정씨가 이제까지 도와준 이들을 대하기가 미안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한다고 말했다.

사근동사무소 사회복지담당자인 서은진씨는 "할머니가 동사무소에서 주는 생계비 외에도 교회나 적십자사 등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데, 마치 끼니조차 못 잇는 가정을 주변에서 내버려둔 것처럼 보도가 나가서 도와준 사람들 보기가 미안하다고 한다"고 전했다.

조선일보는 승용군 가족의 수입이 월 29만5000원이 '유일하다'고 보도했지만, 5월말 현재 승용군 가족들은 동사무소로부터 생계·주거급여로 매달 53만8480원을 받고 있다.

또 오는 8월까지 1년간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지난해 9월부터는 적십자사 후원금으로 매달 30만원씩 받고 있다. 윤준희 사근동 봉사회장은 "후원금 외에도 적십자사 봉사원들이 매주 두 번 승용군 집을 찾아 밑반찬을 지원하는 등 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정씨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는 부정기적이지만 현금과 학용품을 꾸준히 대주고 있고, 한양초등학교 어머니회 등 봉사단체들은 지난해 말부터 쌀과 현금을 후원해 주고 있다. 또한 조선일보는 승용군 가족이 "월세 10만원의 반지하방"에서 산다고 썼지만, 실제 집은 보증금 2200만원이 걸려 있는 방 2칸짜리 단독주택 1층이었다.

승용군 형제들의 상황도 기사와는 조금 다르다. 조선일보는 형 승재군과 누나가 학교를 가면 승용군은 "굶는다"고 보도했지만, 사근동사무소에서는 "승용군도 사근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서 매일 점심을 먹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던 사진 오른쪽 '배고파아'라는 낙서도 "끼니를 굶는다"는 것과는 다른 사연이 있다. 정씨는 "철없는 애(맏형인 승재군)가 (군것질꺼리를) 사달라고 해서 돈 없다고 안 사줬더니, 물감 가지고 벽에 낙서를 해놨다"고 설명했다.

정씨와 사근동사무소, 적십자봉사회원 등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승용군 가족들 중 '굶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상황도 많이 다르다. 결국 조선일보가 '굶는 아이들'을 만들어낸 셈이다.

<조선일보>의 반박 "한시적 후원금 수입으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조선일보의 취재 내용과 현실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특별취재팀의 박돈규 기자는 "승용군 가족들을 취재한 시기는 5월 중순이었고, 당시에는 분명히 29만5000원만 받고 있었을 뿐"이라며 "승용군 가족이 53만원 이상을 받게 된 것은 5월 21일 이후"라고 설명했다. 또 "29만5000원이라는 액수는 할머니에게 직접 들었는데, 할머니의 말을 안 믿을 이유가 있느냐"고 전했다.

박 기자의 말대로 승용군 가족에게 50여만원이 넘는 생계비가 지급된 것은 5월부터였다. 하지만 사근동사무소에서는 "4월까지 지급된 돈도 34만여원으로 조선일보 보도와는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박 기자는 "적십자사에서 매월 후원금으로 주는 30만원은 8월까지만 지급되는 '한시적 후원금'이기 때문에 고정 수입으로 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승용군 가족을 도와오던 자원봉사자 등은 "분명 수입이 있고 아이들이 굶지 않고 있는데 29만5000원을 '유일한 수입'이라며 후원금을 누락시킨 것은 의도적인 짜맞추기 기사"라고 반발하고 있다.

윤준희 회장은 "애초 조선일보가 어려운 이웃을 돕는 봉사자들에 대해 취재하는 줄 알았는데 기사가 나오고 보니 이슈되는 부분만 쏙 빼서 썼고, 지금 일도 아닌 몇 년 전 한두 번 굶은 것을 가지고 기사를 내보냈다"고 분개했다. 인근 성민교회 부목사를 맡고 있는 한 관계자도 "보도가 나간 뒤 목사들이 모여서 이야기했는데, 조선일보가 꿰맞추기식으로 기사를 내보냈다는 게 중론이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가 '의도적 누락'으로 입맛에 맞는 기사를 만들었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27일자 기사에 보도된 또 다른 결식아동의 예에서 보면, 철저한 '확인취재'가 부족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날 기사에서 승용군 가족 외에도 할머니와 함께 사는 이윤석(가명·12·서울 성수동)군의 사연을 소개했다. 이 기사에서도 "윤석이는 2년 전부터 동사무소에서 기초생활보장비 22만원을 받는다, 월세 15만원을 내고 7만원으로 할머니와 한 달을 산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윤석군 가정을 관할하고 있는 성수동사무소에서는 "22만원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장재신 성수동사무소 사회복지담당자는 "생계비로 2001년에도 28만6000원, 같은 해 12월부터는 42만2000원씩을 받았으며 그 뒤 꾸준히 올라 올해 2월부터는 53만6910원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장씨는 "22만원이라는 액수가 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15만원 월세내고 남은 7만원으로 어떻게 한 달 생활이 가능하겠느냐"며 "조선일보는 기본적인 사실 확인을 위해 전화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성민교회 목사들 "꿰맞추기식 보도"... 후원자들 '상처'

승용군과 윤석군 가족의 사례에서 보듯, 조선일보의 '배고픈 아이들' 연재 기사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우선 조선일보는 정확한 사실을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해당 가족과 후원자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있다.

동사무소 직원들과 적십자사 봉사자들은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들의 지적은 승용군 등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도와온 후원자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가 마치 주변에서 결손가정을 버려둔 것처럼 왜곡 보도해 그 동안의 수고를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사근동사무소 서은진씨는 "지난 4년간 사회복지 업무를 담당해 왔는데, 이번처럼 큰 상처를 입고 허탈하기는 처음"이라며 "조선일보는 도와주려고 한다는데, 먼저 어려운 사람의 정확한 사실을 알리고 후원을 받았을 때 그 결과가 더 빛이 나는 것 아니냐"는 심경을 토로했다. 윤준희 봉사회장도 "기사가 나가고 난 뒤 봉사자들은 상당히 격앙됐다"며 "조선일보 편집국을 찾아가 편집국장을 만나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전했다.

이같은 비판에 대해 조선일보는 향후 봉사자들의 노력도 다룰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돈규 기자는 "기사를 비판하는 분들과 통화를 했고, 충분히 납득을 시켰다"며 "결손가정을 돕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지막 연재기사에서 내보낼 것이라고 말씀드렸다"고 전했다.

사실과 다른 상황이 알려지면서 급작스럽게 후원금이 한 곳으로만 몰리는 현상도 문제다. 사회복지업무 담당자들은 이런 현상이 "다른 결손가정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성수동사무소 장재신씨는 "조선일보 보도가 나간 뒤 후원하겠다는 요청은 많이 들어왔다"면서도 "하지만 후원자들과 (결손가정을) 연계할 때는 형평성과 개인 사정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전했다. 장씨는 "기사 내용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후원자들에게 그런 점을 모두 이야기했고, 다른 곳에 후원해주도록 요청했다"고 밝혔다.

윤찬영(전주대) 교수는 "(27일자) 기사 내용이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사진구도나 기사 내용으로 볼 때 선정적이고 일부만 부각시킨 것 같다"며 "이번 시리즈는 편협한 접근을 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또 "이런 식의 보도는 도움받는 사람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주는 사람의 입장만 반영된 교만하고 권력적인 행동"이라며 "자신의 처지가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배려해야만 해당자에게 진정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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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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