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세우는 삶의 이정표

(시와 함께 살다 16) 마흔이 되어 서른을 돌아보며

등록 2004.06.03 14:31수정 2004.06.03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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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지나며


서른 지나며
가야 할 길의 표지판이
문득 보이지 않는다.

삶의 고비마다 잠복해있는
터널을 지날 때면
도로표지판의 지시대로
속도를 줄이고 라이트를 켜고
어둠 속을 헤쳐 나왔지만
서른의 터널을 지나온 지금
삶의 이정표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도로교통표지판 시설이 형편없는 이 땅에서
제때에 이정표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치부해야 하나.
아니면, 손때 묻은 지도책이 약속하는 것처럼
지금 달리는 이 길이
목적지로 향하고 있음을
아직은 믿어야만 하나.

저 멀리 하늘에 모여드는 검은 비구름처럼
사내의 마음속에 솟아나는 의혹.
지도에는 없는 이면도로를
한 번도 탐해본 적이 없는 사내는
생애 처음으로
이 길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뒤따르는 차들의 갑작스런 경적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정신을 추스르는 사이
몇 대의 차량들이 사내의 차를 추월해 내달리고
한번 뒤처지기 시작한 사내의 차는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는다.
시야 가득 번져오는 굵은 빗방울을
윈도우 와이퍼로 씻어 내리며
사내는 마침내 목적지를 버리기로 한다.


차량 전복 사고를 전하는 라디오 방송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빗길에 붉게 번들거리는 브레이크등의
한없는 행렬을 무심히 바라보며
이제 서두를 것 없는 사내는
서서히 속도를 멈춘다.

멈춰 선 자리에 문득 보이는
하얗게 비어있는 이정표 하나.

(정철용시 ‘서른 지나며’ 전문)


어제 내 나이 마흔이 되었다. 생일을 축하한다고 아내는 아침 식탁에 미역국을 올렸고 일어나자마자 내게 달려온 딸아이 동윤이는 “아빠, 생일 축하해요!”라고 말하며 생일 카드를 내밀었다. 기억나지 않는 꿈에 잠을 설친 찌뿌드드했던 아침이 한 순간 생생한 기운을 머금었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도 손꼽아 기다리곤 했던 생일을 그다지 반기지 않게 된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더군다나 이제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나이인 마흔이 되었으니, 그 생일이 더더욱 반가울 리가 없다. 그런데도 아내가 차려준 미역국을 먹으며 기뻤다. 그리고 딸아이가 준 생일 카드를 읽으며 즐거웠다.

“다시 1년 동안, 아빠 생일이 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고마워요”라고 마무리한 동윤이의 생일 축하 글을 읽으며 나는 혼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동윤이는 내가 빨리 늙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마흔 살이 되는 생일을 맞는 것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에는 딸아이는 너무나 어리다. 나도 저 나이 때에는 마찬가지였으리라.

매년 맞이하는 생일을 그다지 반기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서른 무렵이 아닌가 여겨진다. 군복무를 6개월만 했기에 남들보다 사회 생활을 일찍 시작한 나는 결혼도 스물여섯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했다. 딸아이도 스물여덟에 얻었으니, 벌써 이십대 후반에 직장과 가정이라는 양축이 제법 안정이 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 안정 속에서 나는 뭔가 목마름을 느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점점 바래져 가는 젊은 날의 꿈을 안타까워했고, 세속적인 성공을 위하여 앞만 보고 달려야만 하는 삶의 속도와 밥벌이의 가파름을 못 견뎌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아파트 평수를 늘릴 궁리를 하고 직장에서는 인사철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승진을 기대하곤 했다.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바쁘게 하루 하루를 살다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서른의 아침이었다. 스무 살 무렵에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나이, 서른의 문턱을 넘으면서 나는 잠시 흔들렸다. 그때 써두었던 위의 시 <서른 지나며>를 마흔이 되어 지금 읽어 보니 서른 지나던 그 당시의 막막함이 되살아나 스스로가 가엾게 느껴진다.

당시 나도 속도와 효율이라는 세상의 법칙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세상의 길마다 세워져 있는 가장 일반적인 삶의 이정표-부와 명예―를 삶의 목적지로 삼았다. 그러나 서른이 지나면서 나는 그 이정표가 가리키는 목적지로 달리는 데 조금씩 지쳐갔다. 그리고 결국 나만의 삶의 이정표를 찾기 시작했다.

삶의 목적지를 알려 주는 이정표를 찾으려고 차창 너머를 눈여겨 보았지만 그 이정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씩 이정표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빠르게 내달리는 승용차의 속도 때문에 미처 읽지도 못한 채 지나쳐야만 했다. 어쩌다가 이정표를 읽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때에는 이정표에 먼지가 잔뜩 끼고 흙탕물로 얼룩져 있어서 거의 판독할 수가 없었다.

서른이 지나면서 내가 달리고 있는 이 길이 내 삶의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지를 자신할 수가 없었다. 한번도 이면도로를 탐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생애 처음으로 그 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래서 속도를 잠시 멈추고 차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빗속에 서 있는 이정표 하나가 보였다. 그 이정표는 하얗게 비어 있었다.

나는 그 하얗게 비어 있는 이정표를 다시 채우기 위해서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나왔다. 하지만 이민 와서도 두 해가 지날 때까지도 여전히 '암중모색'이었다. 사는 곳이 바뀌었다고 삶조차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분명 ‘도피’가 아니라 ‘도전’이라고 생각하며 태평양을 건너왔지만 처음 2년 동안의 이민 생활은 은둔의 나날이었다.

속도를 앞세운 경쟁에 지친 삶을 위로하고 효율을 앞세운 일상에 바래진 꿈을 되찾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세상으로부터 숨는 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비록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공범이 아니면 경쟁자가 되어야 하고 꿈과 밥벌이 중에서 하나는 포기해야만 할지라도, 그 세상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 혼자서 온전히 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헛된 망상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오마이뉴스>를 통하여 나는 세상으로 조금씩 길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어떤 목적지를 정하지는 않았다. 무리하게 속도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산책하듯 글쓰기를 즐겼고, 밥벌이가 아니라 내가 꿈꾸던 글쓰기의 삶을 누리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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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그렇게 일년을 지내다 보니, 놀라워라. 내 삶은 젊었을 적 꿈과 화해했고 심심하기만 하던 일상은 글쓰기와 손을 잡았다. 세상은 다시 내 삶 안으로 들어왔고 내 삶의 이야기들은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매일 매일의 내 삶의 모습이 이정표가 되어 세상에 세워졌다.

어제 마흔이 되고, 나는 이 변모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이곳 뉴질랜드에서 가장 흔한 도로표지판인 <양보(GIVE WAY)> 표지판에 눈이 가게 되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단순히 다른 운전자에 대한 양보를 촉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 표지판은 사실은 세상에 대한 자존의 양보, 꿈에 대한 밥벌이의 양보, 삶에 대한 일상의 양보를 말하고 있음을.

아, 그렇구나. 바로 저것이었구나. 알게 모르게 내 삶을 변모시킨 것은 바로 저것이었구나. 나는 비로소 ‘양보’라고 적혀 있는 그 표지판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른이 지나면서부터 하얗게 비어 있던 내 삶의 이정표에 그 말을 깊이 새겨 넣었다. 마흔에 양보한 서른은 드디어 자신의 비어 있던 이정표를 다시 채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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