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의 신이여, 곡식의 신이여! 감사합니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7)

등록 2004.06.10 22:46수정 2004.06.1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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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안의 노란 꽃창포
울안의 노란 꽃창포박도
서울을 떠나 안흥 산골마을로 들어왔지만 나들이 일이 꼬리를 물고 있다. 가능한 나들이를 삼가고자 하지만 40여 년 서울 생활의 연을 무 베듯 끊을 수가 없나 보다.


거기다가 매달 한두 차례 취재삼아 여행을 다니기에 아직은 겨울의 곰처럼 안흥 산골에 칩거하기는 이른가 보다. 하기는 갈 곳도 없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한 방송국에서 '8·15 특집'으로 열흘 남짓 중국 요녕성, 길림성 일대의 항일유적지 취재에 동행을 청해 와서 함께 다녀오느라고 10여 일 안흥 집을 비웠다. 답사 여행 중에도 내내 얼치기 농사꾼이 텃밭에 심어놓은 작물들이 제대로 자라는지 궁금했다.

귀국 후,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아내에게 작물의 안부를 묻자 모두 다 잘 자라고 있다고 했다. 애초에는 서울에서 며칠 머물면서 보고픈 사람도 만나고 미뤄둔 일도 하려고 하다가 도착 이튿날 급한 일만 본 후 다음날 곧장 안흥으로 내려왔다.

그새 뿌리를 내린 양 고구마 순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그새 뿌리를 내린 양 고구마 순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박도
짐도 풀기 전에 텃밭부터 갔다. 그새 시들시들하던 고구마 순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고, 고추도 콩도 파릇파릇하다.

옥수수도 한 자는 더 자랐다. 시금치, 상추, 열무, 배추도 모두 솎아먹을 만큼 자랐다. 순간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옆집 노씨가 그랬다. 농사꾼들은 자기가 심은 작물이 자라는 걸 보면 마냥 즐겁다고. 그래서 농사를 짓는단다.

애써 가꾼 배추나 무가 제 값을 못 받고 때로는 판로가 없어서 밭에서 썩어도 이듬해 다시 씨를 부리는 것은 파릇파릇한 그 새싹을 보고자 함이라고.


얼른 옷을 갈아입고 상추 쑥갓 열무를 솎아서 아내에게 갖다 줬더니 이내 점심 밥상에 겉절이로 만들어 밥상에 올렸다. 겉절이 나물을 양푼에 가득 넣고 비벼먹자 맛이 아주 고소했다.

“시장에서 사 먹는 것보다 맛이 있네요."
아내는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리의 땀방울이 스민 거라서 그럴거요."
화학비료도 농약도 치지 않은 무공해 남새들이다.

뒷산 뻐꾸기가 인사를 한다.

“먼 길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잘들 있었니?”

그런데 울안의 노란 꽃창포가 아쉽게도 그새 절정의 순간이 지나서 이미 지고 있었다. 그 곁의 붓꽃만은 다행히 활짝 핀 채 주인을 반겨 맞았다.

저에게 작물이 자라는 기쁨을 주신 토지의 신이여, 곡식의 신이여! 감사합니다. 이런 기쁨이 이 산골에 있음을 미처 몰랐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지런히 자라는 고추
가지런히 자라는 고추박도

한 자는 더 자란 옥수수
한 자는 더 자란 옥수수박도

붓꽃
붓꽃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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