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와 결혼해 준다면 내 삶이 나아질 것 같소"

<네팔 랑탕 트레킹 1> 삼텐과 라주의 사랑 이야기

등록 2004.06.12 14:54수정 2004.06.17 21:36
0
원고료로 응원
김남희 기자는 지난 4월부터 20일간 랑탕 트레킹을 했습니다. 랑탕 산행기는 4회 정도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랑탕 트레킹의 출발점인 샤브르베시(1460M) 마을. 삼텐과 라주의 아들 게상과 여자친구가 '나마스떼' 인사를 하고 있다.
랑탕 트레킹의 출발점인 샤브르베시(1460M) 마을. 삼텐과 라주의 아들 게상과 여자친구가 '나마스떼' 인사를 하고 있다.김남희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해발고도 1960미터의 뱀부(Bamboo).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먼지와 땀으로 지저분해진 옷들을 빨아 널고, 물가에 나와 있는 지금. 내 마음은 완벽하게 평화로워.


소용돌이치며 흘러내리는 물소리, 이따금씩 지나가는 바람에 룽다가 펄럭거리는 소리, 고운 새소리만이 대기를 채우고 있는 이곳엔 집이라고는 딱 세 채.

이 고즈넉함과 한가로움이 좋아 일찌감치 이곳에 짐을 풀어버렸어.
어차피 서두를 필요도 없는 여정이기에 마음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몸을 두면서 가려고 해.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놀라울 뿐이야.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로 비명과 신음을 번갈아 내지르며 걸어온 길이었어. 급하지 않은 오르막에서도 숨을 헉헉거리며 자주 쉬어야만 했고, 따가운 햇살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걸어야만 했지.

땀에 절은 몸에서 풍기는 쉰 냄새에 몰려든 날벌레들과도 싸워야 했고, 길까지 잘못 들어 한 시간 가까이 허비하는 등 곤욕스럽기 그지없었어.

포터를 구할까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하루는 버텨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며 여기까지 왔어.


길을 잘못 들어 30분 넘게 올라간 길을 다시 내려와야 했을 때, 내려오는 길 양편으로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걸 봤어. 그 순간 난 올라간 길과는 다른 길을 내려오고 있는 줄 알았어. 분명히 올라갈 때는 전혀 못 봤거든.

오르기에만 급급해 길가의 꽃들에게 눈길 한 번 못 준 거였어. 한 두 송이도 아니고 무리 지어 그토록 어여쁘게 피었는데, 어떻게 저 꽃들을 못 봤을까 어이가 없더라구.


그 때 가장 진지하게 고민했을 거야. 포터를 구하는 문제에 관해. 자존심에 금 가는 것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감수할 수 있지만, 내가 만약 걷는 데 급급해 이렇게 보아야 할 것들을 놓치고 다닌다면, 그건 뭔가 잘못된 거잖아.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렸어. 아주 아주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걸으면서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곳까지는 계속 가는 걸로. 지금 난 이미 절반쯤은 달팽이가 된 듯한 심정이기도 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제 집을 떠메고 한 생을 가야 하는 작은 달팽이 한 마리.

대나무 바구니를 짜고 있는 마을 주민. 뱀부
대나무 바구니를 짜고 있는 마을 주민. 뱀부김남희
가지가 부러질 듯 만개한 꽃을 매단 랄리구라스 나무 한 그루. 라마호텔 가는 길
가지가 부러질 듯 만개한 꽃을 매단 랄리구라스 나무 한 그루. 라마호텔 가는 길김남희
혼자이기에 가능한 지금의 이 자유로움과 달콤한 쓸쓸함을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 정말 까탈스럽다고 놀릴 지도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산에서만큼은 말없이 걷는 걸 좋아했어.

신의 손길이 닿았음을 절감할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칠 때도 완벽한 적막 속에 있고 싶었고, 도시를 떠나 산길을 걸으며 듣는 모든 소리는 오직 자연의 소리이기만을 바랐던 거야. 소통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종종 오해의 근원이 되곤 하는 언어의 불완전함과 빈곤을 대자연 속에서까지 새삼 깨닫고 싶진 않았거든.

사람과 사람이 가장 깊게 가까워지는 길도 말없는 공감에 의해서라고 믿는 나로서는, 길이 아름다울수록 입은 점점 무겁게 닫혀가곤 해. 그래서 나와 함께 산행을 떠나곤 했던 이들은 늘 침묵의 미덕을 알고, 침묵과 침묵 사이의 말없는 언어를 읽어낼 줄 아는 사람들이었지.

어쨌든 산길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장렬하게 쓰러지기 전까지는, 포터 없이 버텨보려고 해. 20킬로그램의 배낭을 메고 5000미터까지 오른다는 게 얼마만큼의 체력과 인내를 요구하는지 이 기회에 온 몸으로 체험해보는 거지, 뭐. 사진가도 아닌 주제에 괜히 카메라 장비를 다 챙겨 왔나봐. 욕심을 줄이지 못하는 것도 병인데 말이야.

짐을 싸고 풀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산다는 것도 결국은 배낭을 꾸리는 일과 다름이 없는 것 같아.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나에게 절실한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거듭 물어가며 짐을 꾸리지만, 막상 길 위에 서면 꼭 필요한 것을 두고 오거나, 필요 없는 것을 챙겨온 낭패를 맛보곤 하잖아.

산다는 것도 결국은 욕심을 버리고, 절실한 것들만을 남겨 간결하게 걸어간다는 것일텐데, 언제쯤 난 욕심을 다 벗은 담백한 마음으로 길 위에 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내가 만났던 사람들 얘기해줄까? 샤브루베시(Shabru Besi)에서 만난 스물 네 살과 스물 두 살의 삼텐과 라주 부부. 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예뻐 사진을 찍고 있자니, 누군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거야. 들어와서 차 한 잔 하고 가라며. 내가 사진을 찍은 게상의 엄마 삼텐이었어. 이런 호의는 한 번도 거절해 본 적이 없는 나이기에 당연히 집안으로 들어섰지.

방 하나에 부엌 하나인 집은 작고 단출했지만 아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어. 살림하는 안주인의 손매가 보통 야무지지 않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살림살이였지. 이제 막 두 살이 된 이 집 아들 게상 역시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어서, 한 마디 칭찬을 했더니 뜻밖에도 그녀가 한숨을 내쉬는 거야.

거대한 짚단을 등에 진 마을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 참키
거대한 짚단을 등에 진 마을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 참키김남희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늘 집안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게상 역시 깨끗하게 키우려는 그녀에게 마을 여자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는 거야. 몸이 약해 자주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게상을 보며 마을 여자들은 "그렇게 깨끗하게 키우고, 매일 씻기는데 왜 매일 아프지? 지저분하게 생활하는 우리집 애들은 약국 신세 한 번 안 지는데…."라며 그녀를 비웃곤 했대.

물론 이 텃세의 주된 이유는 그녀가 타지 사람이라는 데에 원인이 있어. 네팔도 인도 못지 않게 카스트 제도가 살아 있는 나라라는 건 알고 있지? 계급이 다른 이들의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 다른 부족 간의 결혼도 배척된대.

이 동네 사람 대부분은 따망족인데(삼텐의 남편도 물론 따망족이구) 삼텐은 티베탄이거든. 외지 사람인데다, 종족도 다른 여자가 시집을 온 것도 내키지 않는데, 동네 사람들과는 판이한 위생 관념으로 집안 살림은 물론 아이 키우기까지 자기 방식대로 한다면 이런 시골에선 당연히 오해의 말들이 생겨나지 않겠어?

게다가 삼텐은 사립학교의 과학 선생이라는 직업까지 가지고 있는데다가, 전문대학 과정을 독학으로 공부하는 근성마저 지니고 있으니,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

그녀가 학교에서 받는 적은 봉급(사립학교는 월급의 액수가 학생수와 비례하는데 그녀의 학교는 전교생이 24명뿐이래)과 라주가 부엌 한 켠에 테이블 하나를 놓고 찻집을 운영해 벌어들이는 돈이 수입의 전부지만, 삼텐은 공부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어.

이곳에서 2년 동안 환경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그녀의 미국인 친구가 해마다 보내주는 4000루피(우리 돈 7만 원)가 그녀의 유일한 학비인데, 이제 얼마 후에 있을 시험만 통과하면 그녀는 전문 대학 졸업장을 갖게 된대. 그녀의 남편 라주는 가난 때문에 중학교까지 밖에 다니지 못했는데, 삼텐이 공부를 마치는 대로 돈을 마련해 꼭 못다 한 공부를 끝마치게 할 거래.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만이 우리의 살길'이라 믿고, 자식들을 가르치는데만 모든 힘을 쏟았던 우리 부모 세대를 보는 것 같지 않아? 다른 점이 있다면 삼텐의 경우, 그 배우겠다는 열망이 자식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향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을 향한 배움에의 열정이 동시대 이웃들에 의해 공감되지 않는, 혼자만의 깨우침과 열정이라는 점이지. 어디서나 앞서가는 이의 삶은 이렇게 고달픈 가봐.

아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는 아버지. 샤브루베시
아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는 아버지. 샤브루베시김남희
이 사람들 사랑 이야기 들어볼래? 어느 날 삼텐이 이 마을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왔다가 라주 이야기를 듣게 됐대. 라주는 열 한 살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혼자서 이 집에 살고 있었어.

같은 마을에 사는 할아버지가 가끔씩 오셔서 집안일을 봐주셨지만 부모도 형제도 없이 혼자인 그가 얼마나 어렵게 살아왔을 지는 짐작이 가지? 삼텐은 라주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대.
그래서 이 마을에 올 때마다 음식이며 옷가지를 챙겨와 라주에게 전달해 주곤 했지.

그러는 사이에 당연히(?) 사랑이 싹텄고. 라주의 프러포즈가 어땠냐 하면, "당신이 나와 결혼해 주면 내 삶이 더 나아질 것 같다"였대. 꽤 괜찮은 청혼 아니야? 사랑 때문에, 한 사람 때문에, 삶 자체가 '업 그레이드(Up-Grade)' 될 수 있다니!(결혼 이후 라주의 삶은 당연히 말할 수 없이 나아졌대)

지금은 비록 가난하지만 이들의 꿈 하나는 야무져. 언젠가는 꼭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으니까. 차 값을 내려 했지만 굳이 거절하고, 불편한 집이지만 하루 자고 가라는 그들의 청을 뿌리치고 나올 때 내 마음은 고맙고도 미안했어.

랑탕에서 내려올 때는 꼭 다시 들러서 하룻밤 머물고 가려고 해.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는 이들 부부의 건강한 삶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며, 내 삶과 꿈 또한 다시 돌아보고 싶으니까. 흰 산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가고 있을 그대들 하루 하루가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바람에 룽다가 나부끼는 랑탕 마을(3330M).
바람에 룽다가 나부끼는 랑탕 마을(3330M).김남희
트레킹 셋째 날
안녕, 친구들.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였는지? 오늘은 쉬는 시간 빼고 다섯 시간 넘게 산길을 걸었어. 햇볕이 들기 전의 아침 숲을 혼자 걸을 땐 그 싱그러운 푸른 기운으로 인해 발걸음도 가벼웠는데, 태양이 점점 머리 위로 떠오르면서부터는 거의 인내력 싸움이었어.

'내가 왜 고생을 사서 하고 있지? 제 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어.'
혼자 중얼거리면서, 온 몸을 흠뻑 적시는 땀과 차별 없이 온 몸에 고른 고통을 가져오는 배낭과 힘겹게 투쟁한 하루였어. 어깨는 쓸려서 빨갛게 부어오르고, 겨우 사흘 걸었는데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고, 설상가상으로 발가락에는 물집까지 잡힌 상태야.

몸이 힘드니 마음까지 약해지는지, 자꾸 기억은 먼 과거 속으로 달아나 다시 가져올 수 없는 추억을 되살려 마음을 어지럽히곤 했구.

2001년이었어. 배낭 하나 둘러메고 혼자서 해남 땅끝 마을로 내려간 게. 오랫동안 준비한 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꼭 내 발로 우리 땅 끝에서 끝까지 걸어보고 싶었거든.

한 여름 뙤약볕에 시든 오이 넝쿨처럼 바싹 바싹 말라 가면서, 장마비에 온 몸을 적시면서, 발바닥에 예닐곱 개의 물집을 달고선 하루도 쉬지 않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지.

주말이면 친구와 선배들이 내려와 함께 걸어주곤 했지만, 그 더웠던 29일 동안 국도변에서 나는 혼자였어. 낯선 마을에서 해가 지기 전에 잠자리를 찾아야 했고,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에서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걸었던 820킬로미터의 국도.

혼자 사는 할머니집에서 머물기도 하고, 마을회관이나 교회 때로는 절간에서, 민박과 여관, 콘도와 호텔(이 경우는 물론 친구나 선배들의 지원 덕이었지)을 전전하며 보낸 한 달간, 난 혼자 걷고 있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어.

그 길 위에서 만난 무수한 사람들의 인정과 도움으로 길의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거지. 내가 태어나서 떠났던 수많은 여행 중에서 그건 단연코 최고의 여행이었어.

오늘 땡볕에 바싹 마른 입을 침으로 축이며 걷는 동안 왜 그렇게 그때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어. 그땐 서울에서 매일 나를 지켜봐 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안부를 묻고, 주말이면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 함께 걸어주던 다정한 얼굴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철저한 혼자야. 어쩌면 그래서 배낭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지고, 마음이 저 혼자 지나가버린 시간 속을 헤매는 건지도 모르지.

어차피 걷는다는 일은 꿈을 꾸는 일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상상과 함께 하는 일이기에, 온갖 기억 속을 헤매고 다니는 일쯤은 묵인하기로 했어. 하지만 이왕이면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을 향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야. 삶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는 거니까.

갓 피어난 랄리구라스 나무 뒤로 눈 쌓인 설산이 보인다. 고라타벨라(3020M)
갓 피어난 랄리구라스 나무 뒤로 눈 쌓인 설산이 보인다. 고라타벨라(3020M)김남희
랑탕 마을 샹그릴라 호텔 식구들.
랑탕 마을 샹그릴라 호텔 식구들.김남희
힘들었던 하루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난 혼자 걷기를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어.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내 힘만으로, 나에게만 의지해서,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지 몰라. 온 몸으로 부딪혀 세상을 열어 가는 일이 얼마나 관능적인 경험인 지 그대들은 알겠지.

아침마다 눈을 뜰 때면 설렘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행복했던 하루를 감사하며 눈을 감곤 해. 언젠가 캄보디아에서 만난 한 아저씨가 그랬어. '여행이란 몸으로 읽는 책'이라고. 나는 지금 네팔이라는 나라를 온 몸으로 읽어내려고 분투하는 중이야.

오늘은 드디어 해발고도 3000미터를 넘어섰어. 고도가 높아질수록 전망도 좋아지고, 공기도 맵고 맑아져.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숙소의 식당에서는 랑탕 리룽(Langtang Li Rung 7225m)이 바로 건너다 보여. 책을 읽다가도, 밥을 먹으면서도, 자꾸 고개를 들어 눈 덮인 산을 바라보게 돼.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저 흰 산에 매료 되게 하는 걸까? 지금 흰 산을 향해 가고 있는 너희들이 대답해 줄 수 있을까? 저 흰 산을 오르며 너희가 보게 될 것은 무엇일까? 겨우 5545미터의 칼라파타르에 올라 흰 산을 바라보기 밖에 못한 나로서는, 저 흰 산의 무엇이 너희를 끌어당기는지, 그 안에서 너희가 만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다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에도 몇 번씩 모두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를 하는 일 뿐이야. 알라를 부르기도 하고, 때론 부처님을 찾기도 하고, 가끔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니, 덜 바쁜 한 분쯤은 내 기도에 귀를 기울여주시겠지. 내 기도가, 그리고 너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기도가 결국엔 하늘에 닿을 거라고 믿어. 그러니 너희들도 잊지 말고 기억하렴. 지금 그 산길에 너희만 서 있는 게 아님을.

랑탕 마을 샹그릴라 호텔 안주인 기빠.
랑탕 마을 샹그릴라 호텔 안주인 기빠.김남희
트레킹 넷째날. 안녕, 친구들!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였는지?
지금 난 랑탕 마을의 샹그릴라 호텔 내 방 침상에 기대어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커다란 창문으로는 파랗게 개인 하늘과 4984미터의 철코 리(Cherko Ri) 그리고 6387미터의 간첸포(Ganchenpo)가 한 눈에 들어와. 한 마디로 '전망 좋은 방' 이지. 오후 내내 침상에 기대어 책을 읽으며 저 봉우리 위로 저무는 햇살이 내려앉기를 기다리고 있어. 지금은 그저 몇 조각의 흰 구름들이 걸터앉아 있을 뿐, 저녁해의 손길은 아직 닿지 않고 있어.

룽다와 탈쵸가 바람에 펄럭거리는 소리에 귀를 열어 놓고 있다가, 다시 읽던 책으로 돌아와 창가방을 등반하는 죠 태스커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눈을 들어 창 밖의 흰 산과 그 아래 엎드린 듯한 마을을 바라보고…. 이렇게 완벽한 평화와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점심을 먹기 위해 이 마을에 들어섰다가 산을 향해 창이 난 이 숙소를 보는 순간 바로 짐을 풀어버렸어. 고작 세 시간 걷고 하루를 마감한 거지.

참, 나, 오늘 아이리스 봤다! 우리말로 붓꽃! 왜 그 보라색의 꽃이 피는 가늘고 긴 식물. 이 정도 설명하면 알겠지? 탕사프 마을을 지나 랑탕으로 오던 길에서였어.

발 밑에 작은 보라색꽃이 피어있길래 들여다보니 붓꽃이잖아. 그것도 꼭 한 송이! 그 일대가 전부 붓꽃밭인데, 성질 급한 그 놈 혼자 꽃대를 들이밀고, 꽃을 피워버린 거야. 다른 놈들은 아직 꽃대도 안 올라왔는데 말이야. 그 작은 붓꽃 한 송이가 주변을 얼마나 환하게 밝히던지! 급할 것도 없겠다,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들여다봤지 뭐.

여기 붓꽃들은 다 키가 작아. 바람이 거센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몸을 낮춘 거지. 몸 전체 길이가 겨우 내 손바닥 만할까? 그 작은 키에 제 몸 길이 만한 꽃을 피워 올렸으니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치렀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더라구.

혼자서 피어난 붓꽃 한 송이. 참키(3110M)
혼자서 피어난 붓꽃 한 송이. 참키(3110M)김남희
"너, 참 장하구나. 오래 오래 피어 있어라!"
칭찬 많이 해주고 일어섰는데, 눈 여겼다가 돌아올 때 다시 찾아 볼 생각이야. 오늘은 민들레도 많이 만났고, 온통 가시로 무장한 채 콩알만한 노란 꽃을 피워낸 놈도 봤고, 늘 보던 랄리구라스(네팔 국화)도 실컷 봤으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꽃산행'이었지?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총총해.
검은 바위산 중턱에 손톱달도 예쁘게 걸려 있고. 알고 있겠지?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저 별빛은 모두 먼 과거의 빛이라는 걸.

수억만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지금 내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저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 삶이 새삼 덧없이 느껴져. 그렇기에 이 짧은 생을 더 치열하게 살아낼 의무가 내게 있는 거겠지.

모두들 좋은 꿈 꾸고, 편히 쉬기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4. 4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5. 5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