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룽다가 나부끼는 랑탕 마을(3330M).김남희
트레킹 셋째 날
안녕, 친구들.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였는지? 오늘은 쉬는 시간 빼고 다섯 시간 넘게 산길을 걸었어. 햇볕이 들기 전의 아침 숲을 혼자 걸을 땐 그 싱그러운 푸른 기운으로 인해 발걸음도 가벼웠는데, 태양이 점점 머리 위로 떠오르면서부터는 거의 인내력 싸움이었어.
'내가 왜 고생을 사서 하고 있지? 제 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어.'
혼자 중얼거리면서, 온 몸을 흠뻑 적시는 땀과 차별 없이 온 몸에 고른 고통을 가져오는 배낭과 힘겹게 투쟁한 하루였어. 어깨는 쓸려서 빨갛게 부어오르고, 겨우 사흘 걸었는데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고, 설상가상으로 발가락에는 물집까지 잡힌 상태야.
몸이 힘드니 마음까지 약해지는지, 자꾸 기억은 먼 과거 속으로 달아나 다시 가져올 수 없는 추억을 되살려 마음을 어지럽히곤 했구.
2001년이었어. 배낭 하나 둘러메고 혼자서 해남 땅끝 마을로 내려간 게. 오랫동안 준비한 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꼭 내 발로 우리 땅 끝에서 끝까지 걸어보고 싶었거든.
한 여름 뙤약볕에 시든 오이 넝쿨처럼 바싹 바싹 말라 가면서, 장마비에 온 몸을 적시면서, 발바닥에 예닐곱 개의 물집을 달고선 하루도 쉬지 않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지.
주말이면 친구와 선배들이 내려와 함께 걸어주곤 했지만, 그 더웠던 29일 동안 국도변에서 나는 혼자였어. 낯선 마을에서 해가 지기 전에 잠자리를 찾아야 했고,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에서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걸었던 820킬로미터의 국도.
혼자 사는 할머니집에서 머물기도 하고, 마을회관이나 교회 때로는 절간에서, 민박과 여관, 콘도와 호텔(이 경우는 물론 친구나 선배들의 지원 덕이었지)을 전전하며 보낸 한 달간, 난 혼자 걷고 있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어.
그 길 위에서 만난 무수한 사람들의 인정과 도움으로 길의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거지. 내가 태어나서 떠났던 수많은 여행 중에서 그건 단연코 최고의 여행이었어.
오늘 땡볕에 바싹 마른 입을 침으로 축이며 걷는 동안 왜 그렇게 그때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어. 그땐 서울에서 매일 나를 지켜봐 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안부를 묻고, 주말이면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 함께 걸어주던 다정한 얼굴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철저한 혼자야. 어쩌면 그래서 배낭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지고, 마음이 저 혼자 지나가버린 시간 속을 헤매는 건지도 모르지.
어차피 걷는다는 일은 꿈을 꾸는 일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상상과 함께 하는 일이기에, 온갖 기억 속을 헤매고 다니는 일쯤은 묵인하기로 했어. 하지만 이왕이면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을 향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야. 삶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