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무죄의 층계를 올라 그대 잘 가라

[시와 함께 살다 19] 하늘도 슬퍼서 무지개다리를 놓았습니다

등록 2004.06.23 17:50수정 2004.06.24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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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아이가 걸어간다
혼자서
어여쁜 꽃신도 함께 간다

이 세상에서 때묻지 않은 죽음이여
너는 다시 무지개의 七色으로 살아나는가

아이가 걸어간다
아이가

한밤중 불같은 머릿속 다 헹구고
간밤의 비바람 폭풍우 다 데리고

오늘은 다소곳이 걸어간다
눈물도 꽃송이도 다 데리고 걸어간다

아가야
네가 남긴 환한 미소
내 가슴에 남겨준 영롱한 기쁨
그런 것 모두 다 한데 모아

오늘은 비 개이고 맑은 언덕
아이가 걸어간다
혼자서
하늘 나라로 하늘 나라로
무죄의 층계를 밟아 오른다

(오늘의 시인총서 17 김명수 시집 <月蝕>에서)


김선일씨의 피살 소식을 인터넷에서 읽고 슬픔과 분노에 어찌할 줄 모르는 제 마음을 알았는지, 제가 사는 이곳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는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했습니다. 그저께 이곳 저녁 뉴스에 보도되었던 "나는 죽고 싶지 않다!"는 김선일씨의 절규가 빗줄기 속에서 하루 종일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외침도 헛되이 그는 피살되었고, 하늘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몇 차례나 비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그치고 하는 그 사이 사이에 하늘에는 환한 무지개가 몇 차례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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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이곳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무지개라 별스러울 것도 없지만, 오늘은 그 무지개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쓸쓸한 마음을 위로해 주곤 하던 저 무지개가 오늘은 아침부터 시작된 제 우울함을 오히려 더해 줄 뿐입니다.


김선일씨의 피살 소식을 접한 오늘,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해서 둥실 떠오른 무지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너무나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그의 넋처럼 여겨졌습니다. 죽고 싶지 않았던 그의 소망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죽은 후에 저렇게 환한 그리움으로 피어난 것이 아닌가 여겨졌습니다.

위의 시에서 ‘이 세상에 때묻지 않은 죽음이여/ 너는 다시 무지개의 七色으로 살아나는가’라고 노래하고 있는 김명수 시인처럼, 저는 어두운 하늘에 떠오른 무지개의 환한 빛깔 속에서 그의 마지막 절규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막을 수도 있었던 그의 죽음 앞에 슬퍼하고 분노하지 않을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처럼 외국에 나와 사는 재외동포인 경우에는, 슬픔과 분노와 함께 심한 부끄러움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지금은 이라크인들에게 통치권 이양을 앞두고서 많은 나라들이 파병했던 군인들을 철수하고 있는 판인데, 한국은 오히려 추가 파병을 결의해서 이번 김선일씨의 죽음을 자초했으니 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이라크에 파견했던 비전투요원 군인들을 단계적으로 철수를 하고 있는 이곳 뉴질랜드의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하고 의아하게 여길 것을 생각하니, 차마 부끄러워서 하루 종일 고개를 들지 못하겠더군요.

그런데도 한국 정부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이라크 추가 파병 원칙에는 흔들림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제게는 그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운 일로 여겨집니다. 미국의 눈치를 보다가 명분 없는 전쟁에 휘둘리게 되어 애꿎은 한 청년의 죽음을 야기한 것만으로는 아직도 부끄러움을 느끼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인가요?

김선일씨의 죽음이, 국민의 뜻보다 미국의 눈치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정부 때문에 명분도 실리도 없는 전쟁의 비바람과 폭풍우에 휘말리게 된 우리 젊은이들의 목숨을 구해내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분명 우리에게 이 전쟁의 부당함을 명백하게 알려 주는 계기가 되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거리로 나서고 있습니다.

이 전쟁을 일으킨 미국이 바라는 평화라는 것은 사실은 죄 없는 자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 억지이며, 또한 그들이 부르짖는 정의라는 것은 사실은 힘 없는 자들의 팔뚝에서 강제로 피를 뽑아내기 위한 기만입니다.

이제 세계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이 진실을 오직 한국의 정치인들만 애써 외면하고 거부한다면, 김선일씨의 죽음은 이번 한번만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세살의 젊은 나이에 낯선 이국땅에서 외로운 혼령이 된 김선일씨의 넋 또한 편히 잠들지 못하고 계속 이 지상을 떠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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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오늘 먹구름이 잔뜩 낀 저 하늘 위에 솟은 무지개는 바로 그런 김선일씨의 넋입니다. 평화를 내세운 전쟁에, 정의를 가장한 불의에 목숨을 빼앗긴 그의 넋이 저리도 선명한 빛깔로 피어나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극도의 외로움과 공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을 그를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고 분노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슬픔과 분노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그의 죽음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그의 죽음 앞에 당당하게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정부가 그 일을 못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 국민들이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이 김선일씨의 넋이 비로소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입니다.

‘혼자서/ 하늘 나라로 하늘 나라로/ 무죄의 층계를 밟아’ 오르는 그대 김선일이여, 무지개다리 너머 그곳, 비 개이고 맑은 언덕, 전쟁 없는 세상에서 부디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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