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 등을 따라 해송 사잇길을 올라가 보니

서귀포 70경(25) 솔바람 소리 가득한 제지기 오름

등록 2004.06.25 18:55수정 2004.06.25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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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갯가에 떠 있는 제지기 오름

갯가에 떠 있는 제지기 오름 ⓒ 김강임

제주의 여름 해는 바다 색깔에 따라 변한다. 바다가 쪽빛이면 해의 색깔은 붉은 색이다. 그리고 바다가 잿빛이면 해의 색깔은 하얗게 변한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가장 많은 서귀포. 그러나 서귀포에 가면 하루 해가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가야할 곳은 많은데 아름다운 풍경이 옷소매를 붙들고 있으니 마음만 조급할 따름이다.

a 행인을 유혹하는 표지판

행인을 유혹하는 표지판 ⓒ 김강임

보목리 포구에서부터 시작된 70리 길. 자리물회로 허기를 채웠더니, 원기가 회복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서귀포 70경을 떠나는 발걸음이 거뜬하게 느껴진다.


서귀포에서 동쪽으로 긴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와 보목마을 안마당에 서면 보목 마을의 제일 어르신이 마을을 지킨다. 포구의 갯가에서 부서지는 파도의 거품을 먹으며 서 있는 어르신은 바로 제지기 오름이다. 몸을 소나무 숲으로 감싸고 갯가에 앉아 있는 제지기 오름은 마치 거북이 등 같다.

a 정상까지 400m

정상까지 400m ⓒ 김강임

제주 사람들에게 오름은 삶의 터전이자 영원한 안식처다. 오름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돼 있고 마을 주변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 들판은 태고 적부터 농부들의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아 왔다. 특히 광활하게 펼쳐진 오름의 허리에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자리잡고 있다.

제지기 오름도 그러했다. 오름 아래에 옹기종이 모여 앉은 마을을 둘러쌓고 있는 감귤 밭은 신이 내려준 선물이다. 보목리 포구를 따라 동쪽으로 걸어가니 갯가 바로 옆에 '제지기오름 산책로'라는 표지판이 있다.

a 해송 사잇길을 따라 올라가니

해송 사잇길을 따라 올라가니 ⓒ 김강임

지나가는 행인을 유혹하는 표지판은 이정표와도 같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마주치는 행인은 아주 드물다. 만나는 행인들은 주로 관광객들이었다.

마을 주민처럼 보이는 행인에게 제지기 오름에 대해 물어본다.


"아줌마! 제지기 오름 정상까지 올라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행인의 대답은 나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행인은 서툰 말로 " 나-는-중-국-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보목리 사람들은 지금쯤 바다와 감귤 밭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a 돌무덤이 있고

돌무덤이 있고 ⓒ 김강임

'정상까지 400m'. 여행을 떠나올 때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맸는데도 벌써 느슨해졌다. 다시 제지기 오름에 첫발을 디디기 위해서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맨다.

해송 사잇길은 계단으로 되어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해송 사이에서 솔바람이 불어 왔다. 그 솔바람은 심호흡을 하는 내 폐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a 하얀 야생화가 피어 있고

하얀 야생화가 피어 있고 ⓒ 김강임

소나무 숲을 가로질러 100m 지점에 이르니 보목리 포구 1km 지점에 떠있는 섶 섬이 제지기 오름을 바라보고 있다. 섶 섬은 제지기 오름과 마주보고 있으니 외롭지 않겠다. 어느 화가가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낼 수 있을까?

계단 오른쪽에 쌓아 놓은 돌무덤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늘 돌무덤만 보면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산을 오를 때마다 돌무덤만 보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합장한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는 길을 가다 돌무덤을 보면 "산신령님이시여!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며 두 손을 비비고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이셨다.

a 솔바람소리 들으며

솔바람소리 들으며 ⓒ 김강임

제지기 오름의 정상에 가까워 질수록 솔바람은 서늘하였다. 300m지점에 이르자 오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야생화들이 새소리와 함께 조회를 이룬다. 하얀 꽃 앞에 다가서자 소나무 숲에서 노래를 부르는 새 소리가 정적을 깨뜨린다.

남녘 끄트머리에서 듣는 새 소리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오묘했다. 정상 400m 지점에서 행인을 제일 반겨주는 것은 갖가지 운동기구였다. 바위굴과 절터가 있다는 제지기 오름은 옛날에는 '허배구 동산'이라 불렀다 한다. 동산의 모양이 거북이가 바다 쪽으로 향하여 절을 하는 모양이라 부르던 것이 와전되어 '허박이 동산' 이라 불렀다고 한다.

a 서로 공생공존하며

서로 공생공존하며 ⓒ 김강임

제지기 오름은 옛날 굴사가 있고 이를 지키는 절지기가 살았다하여 '절오름', '절지기오름'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지기 오름은 화산활동으로 분출한 용암이 넓게 흐르지 못하고 화구상이나 주위에서 굳어져서 생긴 용암의 언덕인 용암원정구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정상 산책로를 한바퀴 돌아본다. 늙은 해송 사이로 보이는 바다 풍경에서 잠시 삶의 여유를 갖는다. 마을 포구에서 들었던 파도소리는 솔바람 소리로 들려왔다.

제지기 오름 주변에 '터'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마을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a 정상에 앉아 포구를 보니

정상에 앉아 포구를 보니 ⓒ 김강임

a 오름 주변에 '터'를 이룬 마을 풍경

오름 주변에 '터'를 이룬 마을 풍경 ⓒ 김강임

이렇듯 제지기 오름 정상에서 보이는 세상은 제주의 바다 색깔처럼 각양각색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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