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부님의 장례를 치르고

등록 2004.07.15 14:08수정 2004.07.1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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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게는 오직 한 분뿐이셨던 숙부님이 지난 10일 79세를 일기로 이승을 하직하셨다. 나는 10일 저녁 서울 금호동의 병원 장례식장으로 가서 이틀 밤을 지내고, 12일 영구차로 숙부의 유해를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 선영의 한 자리에 안장을 했다. 그리고 어제 다시 내려온 숙모님, 사촌 동생들 가족과 함께 삼우제를 지냈다.


삼우제까지 마치고 나니, 허전한 심사 속으로 숙부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오는 듯하다.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사는 누이가 메일을 보내왔다. 그 메일에는 내 선친과 숙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있었다. 나는 얘기를 거듭 읽고, 숙부에 대한 연민을 다시금 반추하게 된다.

숙부님은 4형제분들 중에서 막내이셨던 분답게 마지막으로 세상을 뜨셨다. 맏형이셨던 분이 69세로 별세하셨고, 중형이셨던 분은 6·25 사변의 혼란 속에서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고, 바로 위형이었던 내 선친은 66세로 세상을 하직하셨으니, 그런 형들에 비하면 79세로 삶을 마감하신 숙부님은 장수를 하신 셈이다.

하지만 어떤 병을 얻어 병고 속에서 돌아가신 게 아니고 단순한 노환으로 눈을 감으신 것이니, 그것을 생각하면 노인들이 여든 살을 넘기는 것은 보통이고 기본이다 싶은 요즘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나는 어렸을 적 숙부님에 대해 몇 가지 기억하는 것이 있다. 그림 같은 그 기억들이 아련하면서도 명료하다.

맨 처음의 기억은 숙부님이 군에 입대할 때의 모습이다. 읍내 지서 앞마당에 큰 트럭이 있었는데, 그 위에 장정들이 가득했다. 그 장정들 가운데 내 삼촌이 있었다. 장정들은 하나같이 이마에 띠를 두르고 모두 함께 팔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고함을 질렀다.

나는 그 광경이 무섭게 느껴졌던 것 같다. 큰소리로 삼촌을 부르며 엉엉 울었다. 내 나이 네 살이나 다섯 살 때였지 싶다. 그 장면이 무서울 뿐만 아니라 삼촌이 트럭을 타고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어느 먼 곳으로 떠나가리라는 예감이 들어서 나는 그렇게 삼촌을 부르며 마구 울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먼 훗날 나는 그 날의 그림을 떠올리면서 내가 왜 그렇게 삼촌을 부르며 울었는지 의아해했다. 어쩌면 삼촌이 나를 예뻐해 주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촌과 꽤나 정이 들었기에 내가 그날 그토록 삼촌을 부르며 울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6·25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날 그렇게 군에 입대한 삼촌은 당연히 일선에 배치되었고, 수송병으로 복무했다. 트럭을 몰고 격전지로 들어가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싣고 나오는 것이 삼촌의 임무였다고 한다. 트럭에다 시신들을 포개고 겹쳐서 가득 싣고 나오는 일을 수없이 했고….


삼촌은 5년이나 군대 생활을 했다. 제 때에 제대를 하기가 어려웠던 당시의 특수 상황 탓이었던 듯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대를 아예 피하는 사람도 많건만….

또 하나의 그림은 삼촌의 결혼식 장면이다.

내 초등학생 때의 일인데 몇 학년 때였는지는 기억이 명확치 않다. 삼촌은 트럭을 타고 읍내에서 멀지 않은 정주내라는 동네로 장가를 갔다. 그 트럭의 적재함에는 우리 꼬마들이 여럿 탔다. 삼촌이 장가가는 차를 나도 함께 타고 간 그 그림은, 지금도 내가 차를 탈 때 간혹 떠올리는 잊을 수 없는 그림이 되었다.

그 집 안마당에서 올려진 전통 혼례식 장면은 정말로 아련하고도 그립다. 간혹 영화 같은 데서 그 장면을 보게 되면 가슴 짠하게 반가워지는 이유를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아챌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장면은 삼촌의 생업과 관련되는 그림이다.

삼촌은 맏형 집에서 독립을 한 다음 신 시장에서 국수공장을 했다. 기계에서 국수를 뽑아 마당의 가로지른 나무들에 걸어서 말리곤 했다. 나무에 걸려 길게 늘어뜨려진 조밀한 국수 가닥들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살금살금 몸을 움직이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그런 내게 삼촌은 꾸중도 했지만 밥풀이 묻은 밀떡을 주기도 했다. 그 시절의 밀떡 맛을 어떻게 표현할까. 생각하면 지금도 내 입안에서 군침이 돈다.

삼촌은 고향에서의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너무도 가진 것이 없이 맨손으로 시작한 생활이라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내 소년 시절의 기억 속에는 삼촌과 백모님이 대각을 이루고 있는 우울한 삽화도 하나 있다. 누구 제사인지는 모르지만 제삿날 밤에 있었던 일이었다.

지금과 달리 밤 12시에 제사를 지내던 시절이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던 시절 긴긴 겨울밤을 졸음과 싸우며 견디고 견디어서 드디어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하는 시간이었다.

맛있게 밥을 먹고 났는데, 무슨 일 때문인지 백모님과 삼촌이 말다툼을 했다. 그 말다툼의 전말이나 종합적인 상황은 모르지만 내 뇌리에 백모님의 말 한마디와 삼촌의 말 한마디, 상충되는 두 마디의 말이 뚜렷이 새겨지게 되었다.

백모님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젖먹이를 내 손으로 길러줬어. 그 공을 알아야지."

그 말에 대한 삼촌의 답변은 이런 것이었다.

"개도 그만큼은 해요."

그 순간 백모님은 치우던 밥상을 뒤엎어 버리고 말았다. 그 상황 속에서도 백부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내 아버지는 동생을 나무라는 태도를 취했다.

아무튼 그날 백모님과 삼촌의 입에서 나온 그 말들은 정말이지 내 뇌리에 깊이 새겨져서 오늘에도 무시로 재생이 되곤 한다.

유복자로 태어난 것도 부족해서 젖먹이 시절에 어머니마저 여의고, 그런 박복 탓에 소학교 문전에도 못 가보고 자란 삼촌은 스스로 한글을 깨우치긴 했지만 늘 배우지 못한 한을 안고 불리한 조건 속에서 살아야 했다.

생활이 너무도 순조롭지 않아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겨주고 가족을 이끌고 야반도주를 한 일도 있었다. 그렇게 몰래 서울로 거처를 옮긴 후 삼촌은 갖은 고생을 다하며 금호동 시장의 채소장수로 자리를 잡았다.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다음에는 고향에 와서 과거에 빚을 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죄를 하고 원금만이라도 갚는 일을 하기도 했다.

집도 장만하고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서 한동안은 생활이 괜찮았지만 자영업을 하는 아들들이 IMF를 겪으며 큰 손실을 입은 탓으로, 삼촌의 노년 생활은 다시 순탄하지 못했다.

나는 내 선친의 타계 후부터 선친의 유일한 동기이신 숙부께 신경을 많이 썼다. 내 아버지를 보듯 숙부를 대하고자 했다. 해마다 정월 초하루나 생신에는 문안 전화를 드리곤 했다. 숙부께서 명절이나 한식날 고향에 오시면 적은 금액이라도 용돈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안질 치료에 보태시라고 40만원을 보내 드린 적도 있고, 한동안은 매월 10만원씩 보내 드리기도 했다.

내가 없는 살림에도 그렇게 숙부님께 신경을 쓰는 이유를 스스로 흥미롭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소년 시절에 겪었던 어느 제삿날 밤의 사건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 날로부터 내 가슴에 자리잡은 삼촌에 대한 연민이 알게 모르게 작용을 하는 탓이 아닐까?

숙부의 그 가련했던 처지를 생각하는 일은 또 알게 모르게 한 집안의 맏이인 나의 처신을 돌아보게 하는 작용을 낳기도 했다. 맏이인 내가 어떤 책무를 가지고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나는 늘 생각하곤 했다. 숙부에 대한 연민 속에서….

내가 숙부에 대해 연민을 갖게 된 더욱 큰 동기는 동생을 가엾어하신 내 아버지의 마음을 언젠가 확실하게 접한 탓이 아닐까 싶다. 아버지는 언젠가 목멘 소리로 당신 동생의 기구한 팔자를 탄식하신 적이 있었다. 조실부모하고 자란 동생의 고생스러웠던 소년 시절을 회상하시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숙연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숙부님의 위독 소식을 듣고 지난 6월 7일 서울 금호동의 병원으로 달려가서 숙부님께 천주교 대세(代洗) 드렸다. 평소 하느님 신앙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숙부님은 마지막 순간에는 조카의 대세 권유를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숙부에 대한 고마움을 안고, 금호동 천주교회에 알려 신자들이 병실에 와서 '선종기도'를 하도록 했다.

7월 10일 오후 임종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신속하게 금호동 천주교회에 알렸다. 실로 많은 신자들이 와서 연도를 바침으로써, 나는 숙부님을 전혀 외롭지 않게 해드린 셈이 되었다. 내 숙부는 생전에 한 번도 성당에 가시지 않았지만 사후에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정식 장례미사의 은덕을 입었다.

염습이며 출관이며 운구며 하관이며 모든 장례 절차를 내 의지에 따라 천주교 식으로 치렀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상주인 사촌 동생들, 더 나아가 모든 겨레붙이들의 나에 대한 신뢰와 인정 덕분에 가능했지 않았나 싶다.

숙부님 생전이나 사후에나 내 몫을 충실히 했지 싶다. 이제는 숙모님과 사촌 동생들에게 좀더 신경을 써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내가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들에게 늘 관심을 갖고 기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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