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슬프고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기억

[서평] 안도현의 <짜장면>

등록 2004.07.26 16:11수정 2004.07.2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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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 열림원

요즘 주변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다이어트와 몸 만들기'이다. 내가 아는 누구는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석 달만에 6킬로그램을 줄였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관리사와 상담을 나누며 살빼기 작전에 돌입해 과학적인 시스템으로 5킬로그램을 뺐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오로지 운동만이 살빼기의 해결책이라며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다. 그런 이야길 들으면 자연히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일구어낸 그들의 인내력에 감탄과 경이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내 눈에는 이제 모든 음식이 새롭게 보인다. 이제 더 이상 음식은 우리의 몸에 영양을 공급해 기운을 북돋워주는 감사와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끊임없이 경계하고 거부해야 할 악마의 유혹과도 같다.

그 악마의 유혹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에 속하는 것이 바로 자장면이다. 자장면 한 그릇이 900칼로리가 넘는다고 하니, 다이어트를 하는 이들에게는 어찌 악마의 유혹이 아닐 수 있겠는가.

맛깔스러운 한 그릇의 자장면을 보면서 어린시절 아련한 향수와 그리움보다 칼로리가 얼마인가부터 따지는 나, 그 옛날 외할머니가 오셨을 때나 겨우 시내에 나가 먹을 수 있었던 자장면에 대한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기억을 다 잃어버렸다.

그러기에 <짜장면>의 작가 안도현은 열 일곱, 열 여덟의 나이를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자장면을 고칼로리 음식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빈약한 감성과 상상력으로 인생을 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작 더 슬프고 억울한 것은 나는 열 일곱살에도 별로 아름답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에겐 푸르렀다고, 아름다웠다고 말할 만한 시절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안도현이 책 앞머리에 고백한 구절이 책 전체의 내용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안도현은 '화끈하게 가출 한 번 해보지 못했다는 것,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무치게 원망하거나 증오해보지 못했다는 것, 어른들의 눈을 피해 오토바이 꽁무니에 여자아이를 태우고 멋지게 달려보지 못했다는 것'을 후회하며 자신의 어린 청춘에게 진 빚을 이 책을 통해 갚고 싶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어른이 되었다. 나이가 든다고 다 어른이 아니듯이, 나이가 어리다고 다 청춘이 아님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마음 아프게 확인한다.

학창시절 너무도 조용하고 얌전한 모범생이었기에 교사의 말이나 부모의 말이나 어른들의 말이 틀리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면서도 오로지 '학교의 목적이 입시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선생님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 옆의 짝이 담임선생님에게 출석부로 머리통을 맞아도 '맞을 짓을 했으니 맞는 거야'라고 생각했던 살벌하고 무서운 아이가 바로 나였다. 도대체 '나'라는 인간의 심장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안도현의 <짜장면>은 나에게 말한다. 학교 다닐 나이에 학교는 안 다니고, 가출해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자장면 배달이나 한다고 그들이 모두 문제아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학교에서는 근엄한 얼굴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보다 아내를 더 하찮게 여기는 주인공의 아버지나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은 하나도 표현할 줄 모르고 오로지 희생과 인내로만 끔찍한 삶을 견디는 주인공의 어머니의 삶의 방식이 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의 주인공도 결국은 혹독한 통과의례를 거치고 남들처럼 조금씩 어른의 삶에 편입해가는 방법을 배우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찬란하게 슬프고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꺼지지 않는 빛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웬만한 병은 앓으면서 자연스레 치유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러한 병을 통해 우리의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담금질되는 무쇠처럼 강해지는 법이거늘…. 제대로 된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나는 앓을 만큼 앓은 후 낯선 세상을 보게 된 자에 대해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긴 생물시간에 배운 어줍잖은 지식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애벌레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모든 생물이 다 애벌레의 시기를 거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난 불완전한 성충으로 분류될 수 있는 유전자를 가졌나보다.

짜장면

안도현,
열림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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