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장학회 '공적 구조' 유족도 동의
부친 친일의혹 제기 저의 의심된다"

[인터뷰] 박 정권에 '부일장학회' 강탈당한 고 김지태씨 유족

등록 2004.08.04 12:44수정 2004.08.0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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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박정희와 김지태' 1970년 11월 30일 7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한국생사 대표로 은탑산업훈장을 받고 있는 고 김지태씨. 평전은 이날 그의 표정이 밝아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박정희와 김지태' 1970년 11월 30일 7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한국생사 대표로 은탑산업훈장을 받고 있는 고 김지태씨. 평전은 이날 그의 표정이 밝아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 고 김지태씨 평전


"명예회복을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했는데, 거꾸로 명예를 완전히 짓밟는 '마타도어'에 걸렸으니‥. 정수장학회 이전에 친일관계에 대한 명예회복이 먼저다. 정말 짚고 넘어가야겠다."

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 MBC>, <부산MBC>를 고스란히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뺏긴 고 김지태씨 유족들은 '강탈의 세월'보다 갑작스런 선친의 '친일' 풍문에 더 울분을 토했다.

이들은 이번 논란이 정치문제로 불거진데 대해 당혹해 하면서 가장 큰 바람으로 선친의 명예회복을 꼽았다. 우선 정수장학회의 본래 명칭인 '부일장학회'로 이름을 되찾고, 또 고인의 뜻에 따라 장학회가 운영된다면 어떤 형태의 소유구조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고 김지태씨 첫째 아들 김영구(66) 전 조선견직 회장과 셋째 아들 김영주(59) 전 삼화 회장은 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소재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단독인터뷰를 갖고 선친 소유의 장학회 및 신문·방송사가 강탈당한 과정을 소상하게 밝혔다.

"엉뚱한 '친일' 시비로 명예회복하자는 유족 가슴에 못박아"

그러나 지난 7월 말 열린우리당이 진상조사단을 구성하는 등 정수장학회 문제가 정치쟁점화 되면서 유족들은 우려를 금할 수 없게 됐다.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이 선친의 친일의혹을 제기하는가 하면 노무현 대통령과의 연관설을 부각시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족들은 근거 없는 주장이나 보도에는 법적 대응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는 방침이다.

3남인 김영주 전 회장은 인터뷰 내내 선친 친일의혹 대목이 나오면 말을 잇지 못한 채 여러번 눈물을 훔쳤다. 1일 MBC 토론프로그램 <이슈&이슈>에서 '일제 앞잡이''일제 재벌' 등으로 선친을 표현한 이규택 한나라당 의원에게는 합당한 방식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김지태씨는 친일 기업인이었나?'라는 부제로 선친의 친일 의혹 논란을 보도한 <동아닷컴>과 노무현 대통령이 삼화고무 고문변호사로 활동했다고 적시한 <조선일보> 등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날 유족들은 박정희 정권이 어떻게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 MBC>, <부산MBC> 등을 강탈했는지 증언했다. 유족들은 강탈의 결정적인 이유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군사쿠데타 거사자금으로 요청한 500만환(현시가로 약 5억원)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선친이 박정희 정권의 강요에 못 이겨 부일장학회와 소유 언론사 운영권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김영주 전 회장은 "1962년 3월 27일 부정축재처리법 위반과 재산해외도피 등 혐의로 입건된 아버지는 구속 두 달 만인 5월 23일 군사법정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며 "바로 다음 날 부일장학회와 소유 언론사 운영권 포기각서를 썼고, 그로부터 이틀만에 풀려났다"고 증언했다.


"아버지는 수갑 찬 채 '만들어진' 포기각서에 도장만 찍었다"

a 고 김지태씨.

고 김지태씨. ⓒ 고 김지태씨 평전

큰 아들인 김영구 전 회장은 "포기 각서를 쓰는 날 아버지 인감도장을 갖고 당시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로 갔더니 각서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고, 아버지는 수갑을 찬 채 도장만 찍었다"고 목격담을 확인했다.

김영주 전 회장은 조봉암 진보당 당수와 선친의 특별한 관계도 밝혔다. 그는 "아버지는 조봉암 선생을 '당대에 가장 촉망받는 정치인'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그의 선친은 1958년 조봉암이 간첩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뒤 <부산일보>(10월 27일자)에 인간 조봉암을 논한 사설을 직접 썼다고 한다.

또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선친의 관계를 언급한 대목에 대해 "노 대통령이 삼화고무의 고문료를 매달 받는 고문 변호사로 활동했다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고 김지태씨가 사망한 이후 82년 당시 삼화그룹의 상속세 등과 관련한 소송대리인을 맡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학회 강탈과정에 대한 진상규명과 함께 선친의 명예회복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며 정수장학회 이사장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용단을 촉구했다. 그는 "지금은 정치 문제가 돼서 구체적 언급이 부담스럽다"면서도 "제1야당 대표로서 박근혜씨가 깨끗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과거부터 털고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정수장학회' 전신 부일장학회 설립자 고 김지태씨는 누구?

1950∼1970년대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재력가이자 기업인. 1908년 부산에서 태어나 1982년 세상을 떠난 그는 24살부터 말년까지 50여년간 조선견직, 한국생사, 삼화고무, 대한판지 등을 설립·운영하며 기업가로서 활동했다.

당시 '서울은 이병철(전 삼성그룹 회장), 부산은 김지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1979년에는 삼화그룹을 형성하여 회장을 지냈다. 은탑 및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일제시대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20세 되던 1927년 일제가 식민지 토지 및 자원을 관리할 목적으로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 입사했다. 1932년 동척을 그만두면서 동척 소유 울산지역 전답 2만평을 10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불하받았다. 광복 후 섬유·화학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또 재력과 지역기반을 바탕으로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 때 부산갑구 무소속으로,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는 자유당으로 출마해 당선된 정치인이기도 하다. 이어 1949년 <부산일보>와 1959년 <부산MBC> 인수하고, 1961년 <한국문화방송(MBC)>를 창립한 언론인이다. 이어 1953년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수장학회 전신인 부일장학회를 설립, 장학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62년 5월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밀수입과 국내재산해외도피, 농지증명서허위작성 등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구속됐다. 그는 징역 7년이 구형됐으나 공소취하 대가로 부산일보, 부산MBC, MBC 운영권과 부일장학회 기본 자산이었던 부산 일대 땅 10여만평을 헌납 형식으로 포기하고 풀려났다. / 신미희 기자

이날 인터뷰에서 당사자들의 거부로 사진촬영은 이뤄지지 못했으며, 기자의 질문에 대답은 주로 김지태 전 회장의 셋째 아들 김영주 전 삼화 회장이 맡았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 MBC>, <부산MBC>를 뺏긴 과정을 설명해달라.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의 강요에 못 이겨 부일장학회와 소유 언론사 운영권을 포기했다. 박정희 정권은 5.16쿠데타를 일으킨 다음해 1962년 3월 27일 부정축재처리법 위반과 재산해외도피 등 혐의로 아버지를 입건했다. 군사법정은 5월 23일 아버지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아버지는 바로 다음 날 부일장학회와 소유 언론사 운영권에 대한 포기 각서를 썼다. 부일장학회의 경우 기본재산인 부산진구 서면 일대 땅 10만여 평을 헌납형식으로 포기했다. 그리고 이틀만에 아버지가 풀려났고 닷새 뒤 부일장학회는 5.16장학회로 바뀌었다."

- 선친이 수갑을 찬 상태로 포기 각서에 날인했다고 하는데.
"그렇다. 아버지가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로 끌려간 뒤 큰 형(김영구 전 조선견직 회장)이 인감도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구속된 지 두 달만인 1962년 5월 24일, 인감도장을 가져오라고 해서 큰 형이 갔다. 아버지가 징역 7년을 구형받은 다음 날이다. 당시 부산에 있던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에 가니 포기 각서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고, 아버지는 수갑을 찬 채 도장만 찍었다. 큰 형이 직접 봤다."(김영구씨도 이 사실을 확인했다)

- 이후 소유과정이 어떻게 바뀌었나.
"아버지는 풀려난 뒤 그해 7월 23일자로 부산일보 사장에서 물러났다. 신문 1면에 짧은 사임 인사만 남기고 쓸쓸히 퇴장했다. 이후 부산일보와 MBC, 부산MBC는 5.16 깃발 아래로 빨려들어갔다. 5.16장학회는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부일장학회의 토지 10만여평과 부산일보 주식 100%, MBC 주식 100%, 부산MBC 주식 100% 등 당시 시가 100억환 상당을 기본 재산으로 6월 1일 장학재단 설립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7월 7일 초대 이사장 이관구가 취임했다. 군인들 작품으로 보기에 매우 빠른 솜씨였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용 '정치자금'을 요구한데 대해 협조하지 않아서 장학회 등을 강탈당했다는 게 사실인가.
"'정치자금'이 아니라 '거사자금'이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당시 황용주(작고) <부산일보> 주필에게 500환(현시가로 약 5억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황 주필은 박정희 부탁을 아버지에게 전하지 않았다. 가장 핵심되는 미스터리이다. 어떤 명분이든 군의 정치개입을 용납할 수 없다는 아버지 뜻을 간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거사 직전 다시 부산일보 사장실로 찾아왔다. 그러나 급한 일이 생긴 아버지는 박정희가 왔다는 기별도 받지 못한 채 나가게 됐다. 그때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던 박정희에게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나갔다고 한다."

- 선친이 풀려난 뒤 수감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던 적이 있는가.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좋은 일이라고 떠벌리고 그런 일도 없었다. 평전 <문항라 저고리는 비에 젖지 않았다>에 나와 있는 정도다. 수감 당시 부산MBC 전속악단과 가수들이 몇 번 재소자를 위한 연주회를 했을 때 사장으로서 웃어할 지 울어야 할지 기가 막혔던 일, 고등군법회의 결심공판을 기다리는 사이에 아버지 측근이 면회와서 문화사업체에서 손떼라고 일러준 일, 석방된 뒤 포기약속을 이행하겠다고 하니까 당국자들이 번갈아 아버지를 압박한 일, 그들이 각종 양도서를 직접 작성해와 내민 일 등이다."

"정권이 바뀔 때면 언급되곤 하지만 제대로 조명된 적 없다"

- 부일장학회 강탈사건에 대한 언급은 수 차례 되지 않았는가.
"정권이 바뀔 때면 언급되곤 했다. 처음으로 정치문제화 된 것은 1964년 12월. 당시 야당의원이었던 정일형과 서민호가 대정부 질문을 통해 5.16장학회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사태 핵심인물로 황용주 전 부산일보 주필을 지목했다. 그러나 정부쪽에서 제대로 된 답변이 나올 턱이 없었다. 1971년 대통령선거 당시 김대중 신민당 후보도 5.16장학회 탄생배경을 폭로하며 박정희를 공격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도 조금 거론됐다. 그리고 지난 1988년 부산일보 노조가 5일째 파업을 벌이며 편집권 독립투쟁을 할 때 재조명되는 듯했다."

- 그러나 진상규명은커녕 제대로 조명조차 못 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당시 부산일보 노조측 공격이 정수장학회로 돌려지면서 주요 신문이 부산일보 인수배경과 문제점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그때 노조 파업현장을 방문한 김영삼 민주당 총재도 국회 문공위 차원의 진상규명 의지를 밝혔다. 같은 해 10월 옛 부산일보 관계자들이 '부산일보 등의 소유권원상회복'을 국회에 청원했고, 14명의 부산출신 국회의원 전원이 소개의원으로 서명 날인했다. 그러나 광주민주화항쟁 청문회 등에 묻혀버렸다. 사건이 지역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중앙의 관심을 끌지 못한 측면도 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으나 청와대로 가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 당시 청원했던 내용과 지금의 유족 요구가 같은가.
"선친의 뜻에 따라 장학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명칭을 복원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명예회복을 해달라는 것이다. 매우 상징적인 차원의 명예회복이다. 단, 이전에는 유족이나 옛 부산일보(부일장학회 포함) 관계자들이 진상규명을 청원했던 데 비해 이번에는 정치권 내부에서 먼저 얘기가 나온 게 다르다. 소유지분 원상회복 포함 여부는 자칫 재산반환 시도로 비춰질까봐 조심스럽다. 그건 우리가 얘기할 문제가 아니다."

- 정수장학회 문제와 관련, 공공 성격의 소유구조로 전환하자는 방안도 나오고 있는데.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유족으로서는 이게 좋다, 저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명예회복이 되고, 고인의 뜻에 따라서 장학회가 건전하게 운영된다면 어떤 형태의 소유구조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사회합의를 거쳐 공공적 소유구조로 된다면 따르겠다."

- 강탈사건 진상규명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나 관계자들이 추가로 있는가.
"직접 관계된 분들은 거의 작고했다.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은 수소문 해보겠다. 지난해 평전간행위원회 분들이 부산일보에 보관 중인 자료를 열심히 찾았다. 더 이상 나오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최근 추가 자료를 더 찾고 있는데 새롭게 나온 것은 없다."

- 열린우리당 정수장학회 진상조사단에서 연락이 왔는가.
"아직은 없다. 자료 요청이 오면 제공할 것이고 증언이 필요하다면 나가서 증언을 하겠다. 진상조사단 활동에 적극 협조할 생각이다."

- 박근혜 대표의 용단을 촉구할 생각은 없는가.
"정치적인 문제가 돼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는게 좀 부담스럽다. 강탈사건에 대해 진상규명을 해달라는 게 지금까지 유족의 요청이었고 조속한 선친의 명예회복, 장학회 명칭의 환원 등을 바란다. 박근혜 이사장이 제1야당 대표로서 앞으로 깨끗한 정치를 해나기 위해서는 과거를 털고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원칙적인 입장만 얘기하겠다".

"명예회복 해달랬더니 친일의혹으로 유족 가슴에 못박는가"

- 최근 선친의 '친일'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데.
"이 점은 분명히 밝혀야 될 것 같다. 1일 오전 MBC <이슈&이슈> 프로그램에 장영달 열린우리당 의원과 이규택 한나라당 의원이 나와서 대담을 했다. 끝마칠 무렵 정수장학회 얘기가 나왔다. 장 의원이 포기각서 강제날인을 주장하니까 이 의원이 '당시 재산도피 등 죄를 진 게 있지 않으냐, 일제 앞장이 노릇을 했다고 하더라'며 아버지를 비난했다. 또 '일제 때 재벌'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걸 보고 가족들이 너무 놀랐다. 그날 저녁부터 <동아닷컴> 등 일부 언론이 인터넷에서 아버지의 친일행적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에서 2만평의 땅을 불하받았다는 얘기가 나와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썼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이규택 의원에게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2일 오후 이규택 의원측에 연락해 TV에서 한 얘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더니 미안하다고 했다. 보좌관이 '유족들을 모아서 사과할까요'라고 묻길래 메이저 TV에 나와서 주장한 만큼 그 형평성에 맞춰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직 답이 없다. 법적 대응할 것이다. 국회의원이 사석도 아닌 TV토론에 나와서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할 수 있는가. 명예회복하자는 유족들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이다. 야비하다. 반드시 진실을 밝혀낼 것이다. 언론도 사실이 아닌 보도를 한다면 검토 뒤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

- 그럼 선친의 친일혐의로 거론되는 동척 근무와 전답 불하에 대해 설명해달라.
"부산상고 졸업 후 동척 입사는 본인이 선택한 게 아니라 당시 학교에서 성적순으로 정해준 것이다. 5년간 근무하고 25살에 그만 뒀다. 동척 전답 2만평 불하도 10년 연부상환 조건으로 받은 것이다. 그 땅은 나중에 아버지가 직접 영농을 했다. 또 바둑 등을 통해 인간적으로 친해진 일본인 상급자나 제자를 사랑한 일본인 은사가 도와준 것을 밝힌 자서전 내용을 문제삼는다면 도대체 친일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선친은 평소 일본인과 경쟁해서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사업의 원동력이 됐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 선친의 친일의혹이 거론된 게 이번이 처음인가.
"그렇다. 그동안 한번도 없었다. 다분히 흠집내기이자 의도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해방 뒤 60년이 지났는데 그간 한마디 없다가 최근 정수장학회 논란이 일면서 터져나왔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친일청산의 일환으로 부일장학회를 뺏었다는 주장도 말이 안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측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아버지는 만주 독립군 간부였던 큰 외삼촌 영향을 받아 학교다닐 때부터 신간회 말단조직인 소년단을 조직했다. 졸업 후 조선청년동맹 부산지부 간부직을 맡았다가 반일운동을 했다고 부산경찰서에 구속까지 됐다. 정묘야학교를 설립해 직장을 마친 뒤 밤에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불우아동을 직접 가르쳤다. 한국현대사와 친일문제를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어제 고 송건호 선생이 쓰신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란 책을 사서 읽고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이 선친과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화고무 고문변호사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얘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회장이었기 때문에 가장 잘 안다. 그런데도 잘못된 기사가 계속 나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노 대통령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82년 변호사 시절, 상속세 관련 소송 대리인을 한 것은 맞다."

- 노무현 대통령이 소송 대리를 맞게 된 특별한 배경이 있는가.
"부산상고 출신 변호사로 세법 등에 밝았고 지역에서도 이름있는 변호사였다. 사실 노 대통령이 학생시절 부일장학금과 부산상고 동창회 장학금을 받은 것도 몰랐다가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아마 중학교 다닐 때 1년간 부일장학금을 받았고 부산상고 입학해서 동창회 장학금을 3년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이니 만큼 사실이 아닌 것은 밝혀야겠다. 삼화고무 고문변호사를 한 적도 없고, 고문료를 받은 적은 더욱 없다."

- 부일장학금 수혜자가 얼마나 되는가.
"5.16 장학회로 넘어가기 전 연인원 1만명이 넘을 것이다. 첫 해 3000명, 이어 2000명과 5000명, 4000명 정도로 대략 기억되는데 겹치는 인원이 있으니 그 정도로 추산된다. 그 규모는 지금으로 봐서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도 초대형 규모의 장학회였다."

"조봉암 선생 사형판결 받자 부산일보 사설 직접 썼다"

- 진보당 당수였던 죽산 조봉암 선생과도 각별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는 평소 조봉암 선생을 가리켜 '당대에 가장 촉망받는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1958년 진보당사건이 일어났을 때 부산일보는 법 정의에 입각해 조봉암의 혐의를 신중하게 판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 공작금 받은 혐의로 간첩죄가 적용된 공안사범을 신중하게 다루라는 주장은 당시로선 '멸공이데올로기'에 대한 대담한 도전이었다.

조봉암 선생이 결국 사형선고를 받자 아버지는 뭔가 얻어맞은 듯 허공만 보고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그리고 그 길로 혼자 나가셨다. 나중에 들으니 부산일보로 직행해 진보당사건을 논의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인간 조봉암'을 논한 '존엄과 비판'(10월 27일)이라는 부산일보 사설을 직접 썼다고 얘기하셨다."

- 선친은 일찌감치 신문, 방송 등 언론에 대한 큰 애정을 기울였는데 무슨 특별한 배경이 있는가.
"남다른 성격에 있다. 타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제약과 박해를 계속 받는 등 기업가로서는 단점이었다. 자유당 시대에 2, 3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와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많이 했다. 그렇게 하다가 정치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여론이 중요하고 언론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산일보에 투자를 굉장히 많이 했다. 단순히 기업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정점이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었다. 부산일보와 부산MBC가 이승만 독재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기업가의 언론사 겸영은 순수한 목적으로만 비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혹시 부산일보 설립 배경에 이같은 영향은 없었는가.
"MBC는 좀 다른데 부산일보를 만들 때는 기업으로서 채산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무모하다고 할 만큼 일방적으로 투자했다. 언론을 통한 기업보호를 생각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은 없었다. 처음 시작도 그랬고 결과도 그랬다. 기업은 뒷전이라고 할까, 언론인의 기개가 있었다. 당시 정부에 반대하는 논조의 언론사를 가진 기업가들은 고초를 많이 겪었다. 경찰이 세무조사한다고 서류를 다 가져가기도 했다. 지금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 선친이 기업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가장 긍지가 높았던 분야는.
"언론인으로서 긍지와 애정이 가장 컸다. 국회의원 할 때 '정치는 기업인으로서의 외도'라고 표현했다. 글쓰기를 매우 좋아해 모든 것을 기록했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는데 선친께서 남긴 메모 노트가 굉장히 많았다."

- 선친께서 혹시 '부산일보를 되찾으라'는 유언을 남기지는 않았는가.
"모르겠다(웃음). 그러나 살아 계실 때 부산일보를 되찾는 것에 애착이 컸다. 반환노력을 계속 하셨다. 1971년 유신 직전 경영상 어려움으로 부산일보, 부산MBC, MBC 지방국 매각설이 퍼졌을 때 김현철 5.16장학회 이사장 앞으로 진정서 형식의 문서로 인수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때 5.16장학회의 무능과 무책임함을 질타하고, 창설자로서 경영난에 허덕이는 매체를 정상화시킬 의지가 확고함을 비쳤지만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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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언련) 사무차장, 미디어오늘 차장, 오마이뉴스 사회부장 역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현재 노무현재단 홍보출판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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