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이야기-(3) 빛은 휘지 않고 바로 간다

실업고 이야기

등록 2004.08.05 16:20수정 2004.08.0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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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담을 쌓은 학생들은 칠판을 거의 보지 않는다. 앞의 학생도 거기에 해당된다. 나는 그에게 질문을 한다.

a 시험치는 모습

시험치는 모습 ⓒ 이태욱

“빛은 바로 간다고 생각하니? 아니면 곡선처럼 휜다고 생각하니?”
“바로 가지요.”
“그럼 네가 보고 있는 방향이 창문 쪽인데 지금 너에게는 바깥이 보이겠니? 칠판이 보이겠니?”

그때서야 말뜻을 알아듣고 바로 앉는다. 공부와 담을 쌓은 녀석들이 칠판을 보지 않는 것은 그들만의 교실에서 살아남는 비법이다. 아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면서 영어, 수학이 가득한 칠판을 하루 종일보고만 있으라면 그런 학생은 학교를 졸업할 때쯤이면 최고의 철학자가 되어있든지, 아니면 정신병원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네가 만약 빛이 휘는 걸 발견했다면 그건 진짜로 위대한 발견이다. 그걸 발견할 때까지 계속 옆으로 앉아서 관찰해라. 알겠제?”

학생의 자세가 삐딱하면 “빛이 바로 가니, 휘어서 가니?”라고 묻는다. 그러면 그 학생은 머쓱해 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바로 앉는다.

필기는 거의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글씨는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내가 주로 주장하는 지렁이체 또는 갈지자체의 창조자이다.

“이 세상에 글 못쓰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단지 읽을 수 없을 뿐이다.”
“남이 알아 볼 수 있는 지렁이체는 지렁이에 대한 모독이다”이라는 지렁이체의 강령을 외우면서 은근슬쩍 학생을 압박한다.


이런 학생은 잔소리라고 생각하면 무조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거절이다. 오랜 습관 중의 하나다.

이런 학생들의 부모들은 대체로 바쁜데다 학생에 대한 기대가 크다. 부모의 욕심을 따라오지 못하면 부모는 자신도 모르게 잔소리를 하게 되어있다.


어릴 때는 어리니까 어느 정도 제압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자라면 아이는 부모의 말을 피해가는 법을 알게 된다. 잔소리만 피할 수 있다면 거짓말도 자연스레 하게 되고 조금만 더 크면 반항하기 시작한다.

밤늦게 컴퓨터게임에 몰두하다보면 아침에 빨리 일어나지 못한다. 등교시간에 마음이 바쁜 엄마는 아침부터 잔소리 한다. 학교 갈 녀석이 일어나지도 않는다고 고함을 친다. 밤에는 자지 않고 무얼 하였냐는 둥, 정신상태가 틀렸다는 둥, 그러는 사이에 학생과 부모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우리 학교 들어와서도 이 학생은 엄마 말이라면 무조건 거꾸로 생각한다. 엄마도 이 녀석을 지극히 불신한다. 서로에게 너무나 귀한 엄마이고,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고슴도치 사랑이랄까? 서로가 사랑하여 가까이가면 갈수록 서로에게 침을 찌르는 원리이다. 엄마는 자식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걸 표현할 줄 모른다.

학생은 학생 나름대로 오랜 경험 끝에 엄마는 자기를 지극히 미워한다고 생각한다. 엄마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무조건 칭찬만 해 줄 것. 아니꼬와도 칭찬하고, 더러워도 칭찬할 것. 미워도 칭찬만 해 줄 것.

학생에게 하는 질문.

“네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가장 먼저 물에 뛰어 드는 사람은 누구게?”
“?”
"물에 뛰어드는 사람은 샘도 아니요, 친구도 아니요, 헤엄도 못 치는 엄마."

교육이란 똑같은 주제를 두고 모양만 바꾸어 가면 수없이 반복을 시켜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젖어들게 된다.

어느날 덧셈, 곱셈도 잘 하지 못하는 이 학생이 수학시험을 70점을 받았다. 사실 우리의 시험이라는 게 문제 가르쳐 주고 답 가르쳐 주고 치지만 그래도 많은 학생이 0점에 가깝다.

평양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고 아무리 정답을 가르쳐 줘도 안 쓰는 걸 어떡하랴. 그들은 빵점을 받기 위해 역사적 사명감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 같다.

그런데 이 학생이 지조를 버리고 나의 과목 수학에서 70점을 받았다. 그날 그는 나의 칭찬을 너무나 많이 받았다. 알을 깨는 아픔, 아프락시스 뭐 그런 전문용어까지 들어가며 칭찬을 받았다. 그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몰랐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자기에 대한 충분한 칭찬이라는 것은 충분히 감지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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