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태양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20) 무더위와 뙤약볕에 감사하며

등록 2004.08.08 11:22수정 2004.08.08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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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무더위와 뙤약볕에 무럭무럭 자라는 수세미

무더위와 뙤약볕에 무럭무럭 자라는 수세미 ⓒ 박도

가을의 문턱에서


어제가 절기로 입추이고, 내일이 말복이다. 그러나 아직은 한낮뿐 아니라 아침 나절의 뙤약볕도 만만치 않다. "이놈의 더위"하고 짜증을 내다가도 한편 생각하면 더 없이 고마운 무더위다.

이런 무더위와 뙤약볕에 산과 들에는 오곡백과가 잘 자라고 열매가 충실히 여물고 있다. 어제 올들어 처음으로 포도를 맛보았더니 예년 없이 달콤했다. 올해의 기후가 아주 포도재배에 좋았나 보다.

옛 어른들은 "들판의 곡식을 곳간에 넣기 전에는 풍년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만큼 자연의 변화, 특히 기후는 변화무쌍하기에 들판에 곡식을 다 거둬들이지 않고는 섣불리 풍년을 예단치 말라는 경계 말씀이리라.

하기는 그랬다. 내가 어린 시절로 어느 해 낙동강가의 갯밭에 보리농사가 유난히도 잘 되었다. 어느 하루 보리를 추수할 일꾼을 사서 보리밭의 보리를 몽땅 다 벤 뒤 보리단을 밭둑에 세워두고 2,3일 말린 후 거둬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웬걸, 그날 밤 장대비가 밤새 쏟아졌다. 그 즈음에 우리 고향마을에는 "안동 처녀가 강물에 오줌만 싸도 낙동강 강물이 넘친다"고 할 만큼 수해가 잦았다. 이튿날 강물이 넘쳐서 온통 개땅이 물에 잠겨 버렸다. 닷새 후 갯밭에 가 보니 보리이삭 한 톨 없이 싹 다 떠내려가 버렸다.


아직은 올 가을 작황을 미리 말하기는 이르기는 하나, 필자의 현재 예측으로는 오곡백과가 잘 여물고 특히 과일 맛이 어느 해보다 더 좋을 듯하다.

그 까닭은 올해 기후, 특히 비가 봄부터 순조롭게 내려서 '가물다'는 얘기가 거의 없었다. 또 장마가 일찌감치 알맞게 그쳐줘서 일조량이 예년에 없이 길었다.


거기다가 무더운 날씨가 오래도록 계속되어 농작물이나 과수들이 열매가 영글기에는 아주 최적의 날씨였다. 다만 앞으로 심술궂은 태풍만 없기를 바란다.

a 풀더미를 헤치자 애호박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다

풀더미를 헤치자 애호박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다 ⓒ 박도

사람들이란 몹시 간사해서 여름에는 더위에 비명을, 겨울이면 추위에 아우성을 친다. 조금만 더운 날씨가 계속되면 몇 십년이래 가장 덥다고 가장 춥다고 온통 매스컴마다 아우성이다.

하지만, 여름은 더워야 하고 겨울은 추워야 한다. 덥지 않은 여름도, 춥지 않은 겨울도 자연의 재앙이다.

1980년 그해 여름은 덥지 않았다. 여름 내내 썰렁한 날씨가 계속되고 바다에는 냉수대를 이루어 고기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해 가을에도 일찌감치 한파가 몰아닥쳐서 농부들은 들판의 곡식을 거둬들여도 빈 쭉정이들뿐이라고 한숨을 지었다. 사람들은 그해 봄부터 불어닥친 신군부의 피의 숙정 서슬이라고, 억울하게 죽은 광주의 원혼 때문이라고도 했다.

여름다운 게, 겨울다운 게 자연의 순리다

여름다운 게, 겨울다운 게 자연의 순리다. 여름은 더워야 곡식도 잘 여물고, 또 더워야 여름 장사도 잘 된다. 여름이 끝나면 얼음장사도 한 밑천 움켜쥐어야, 해수욕장 숙박업자도 주머니를 채워야 긴 겨울을 날 수 있고 자식들 공부도 시킬 수 있다.

겨울 역시 마찬가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은 저마다 그 이름에 걸맞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 네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축복받은 나라다.

몇 해 전에 필자가 북 유럽 지역에 갔더니 그들 나라는 여름이 몹시 짧다고, 햇볕을 쬘 수 있는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웃통을 죄다 벗고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그들에게는 잠깐의 여름 햇볕이 '오! 나의 태양'이었다.

a 지난 봄, 주인을 잘못 만나 시들었던 고구마 순

지난 봄, 주인을 잘못 만나 시들었던 고구마 순 ⓒ 박도

a 그 새 온 밭고랑을 뒤덮은 고구마 순

그 새 온 밭고랑을 뒤덮은 고구마 순 ⓒ 박도


이즈음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와 뙤약볕도 그 실상을 알고 보면 하늘의 축복으로 우리가 '찜통' '가마솥' '불볕이라고 짜증낼 게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 무더위와 뙤약볕 아래 온갖 곡식과 과일들이 충실히 자라고 있다. 아마도 올 가을은 풍성한 계절이리라.

내 글방 창 밖으로 보이는 수세미가 아침 햇살을 듬뿍 받으며 살랑대는 바람이 흥에 겨운 양 춤을 추고 있다. 하던 일을 밀치고 텃밭에 나가자 옥수수도 고추도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서 여물고 있다. 올 봄에 시들시들 죽어가던 고구마순도 그새 하늘이 내린 비와 뜨거운 햇볕 덕분에 온 밭고랑을 덮고 있다.

텃밭에서 자연의 혜택에 감탄과 감사를 하는 새, 아내는 아침을 짓고자 텃밭으로 나와 호박과 풋고추 가지를 따 간다. 잠시 후면 저 푸성귀가 밥상에 올라올 테다.

이 무더위와 뙤약볕이 없다면, 어찌 우리에게 날마다 이 풍성한 싱그러운 먹을거리가 있겠는가?

a 옥수수가 뙤약볕에 한창 여물고 있다

옥수수가 뙤약볕에 한창 여물고 있다 ⓒ 박도


a 고추가 엄청 달렸다

고추가 엄청 달렸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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