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원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친구

[서평] 귀뒬의 <도서관에서 생긴 일>

등록 2004.08.12 16:21수정 2004.08.14 12:02
0
원고료로 응원
a 도서관에서 생긴 일

도서관에서 생긴 일 ⓒ 리더스가이드

[강동준 기자] 청소년 시절, 경험과 지혜를 쌓도록 하기 위해 어른들은 많은 것을 권장한다. 독서, 모험, 여행, 놀이, 봉사활동……. 그러나 대학입시라는 현실 속에서 청소년이 실제로 해볼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방학이 되면 오히려 학원에 가는 시간을 늘리는 부모,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강요하는 교사 앞에서, 경험의 폭을 넓히기 위한 여행과 체험의 비중은 작아지기만 한다.


그나마 독서 정도가 어른들에게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요즘에는 논술이니 심층면접이니 해서 점차 독서의 중요성은 커져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즐거운 마음으로 독서를 하고 있을까.

지금 청소년들의 독서는 그 목적이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논술, 면접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닌지, 책 속의 빛나는 문장과 사상들은 나의 생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 채점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독서는 이미 입시를 위한 하나의 과목으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보면 청소년들이 독서를 멀리하는 것은 당연한 듯하다. 시험을 위한 책읽기가 어찌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청소년의 처지에서 보면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이 '청소년 회피 도서 목록'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책, 이해도 못할 책을 읽기를 강요하는 것은, 청소년들이 책읽기를 점점 멀리하도록 만드는 원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귀뒬의 판타지 소설 <도서관에서 생긴 일>은 청소년과 책이 친숙해 지도록 만들어 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간단한 줄거리임에도 청소년들에게 책읽기와 글쓰기란 고역이 아니라 즐거움이고 기쁨이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드러낸 책이다.


책읽기를 싫어하는 소년 기욤은 매일 밤, 늦은 밤까지 창가에서 글을 쓰는 할머니를 바라본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새벽녘 할머니가 잠자리에 들자마자 건물에서 나와 어디론가 뛰어가는 소녀이다. 궁금증으로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은 밤, 기욤은 그 소녀의 뒤를 밟아 거대한 도서관으로 뛰어든다.

그가 뒤쫓은 소녀의 이름은 '이다'이다. 그 소녀는 실체가 아니라, 글 쓰는 할머니의 어린 시절의 환영이다. 할머니는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 환영의 모습으로 보들레르, 랭보, 뒤마, 발자크, 생텍쥐페리 등 대작가들이 가지고 있던 '문학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마법서'를 찾고 있다.


그런 이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기욤은 그녀를 도와 마법서를 찾겠노라고 약속하지만, 할머니는 다음 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다를 잃은 슬픔에 빠진 기욤은 곧 자기가 만난 이다가 바로 할머니의 회고록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다와 다시 만나기 위해, 마법서를 찾기 위해 스스로 글쓰기와 책읽기를 다듬고 뒤돌아보며 모험 속으로 뛰어든다.

기욤은 마법서를 찾기 위해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홍당무> <레미제라블> <어린 왕자> 등의 작품을 가로지른다. 그러는 사이, 기욤은 문학 작품에 녹아 있는 감수성에 의해 성장해 간다. 기쁨, 슬픔, 연민, 사랑 등과 같은 풍부한 감정이 읽는 사람을 얼마나 성장시키는지 이 책은 잘 드러내고 있다.

책읽기는 죽을 만큼 싫어하고 글쓰기는 죽기보다 싫어하는 기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이다를 되살리기 위해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면서, 진정성이라는 것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잘 알 수 있다.

기욤의 형편없는 문장력과 맞춤법으로 인해 괴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이다를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문법과 맞춤법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기욤을 보면 자발적인 동기가 사람에게 얼마나 적극적 의지를 부여하는지 느낄 수 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글쓰기는 행복한 일이다.

글쓰기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나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괴물처럼 변한 이다를 예전의 아름다운 이다로 만드는 글쓰기는 곧 기욤의 변화,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책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특정 목적을 위하여 억지로 읽는 것은 힘들고 지치는 일이다. 벗고만 싶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는 친구로 여길 수 있는 책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이 소설은 늘 만나고 싶은 친구로서의 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청소년들에게 독서의 당위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책읽기에 대한 호감과 의욕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우리나라의 작품을 기대해 본다.

도서관에서 생긴 일

귀뒬 지음, 신선영 옮김,
문학동네, 200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2. 2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3. 3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4. 4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5. 5 올해 포도 색깔이... 큰일 났습니다 올해 포도 색깔이... 큰일 났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