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능 숲을 걷노라면 사방에서 보석이 나온다

초록풀 사이로 살짝 숨은 버섯들

등록 2004.08.13 07:56수정 2004.08.1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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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공능 숲.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공능 숲. ⓒ 한성희

검초록으로 짙푸른 한여름의 숲도 더위에 지쳐 헐떡거리는 듯 싶을 정도의 폭염이 계속된 지도 보름이 넘는다. 그래도 더위를 피해 도망칠 곳은 숲과 물뿐이니 어쩌랴.

공능(경기도 파주시)의 숲은 짙고 푸르다. 사이사이 곳곳에 발목에 찰 정도의 시냇물들이 여기저기 돌아나오면서 졸졸 흘러내려 더위를 피해 오는 휴식처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이다.


뜨거운 한낮의 살인적인 태양볕에 신나무(단풍나무과)가 며칠째 잎을 펴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여기저기 돗자리와 도시락을 준비해온 사람들이 숲에 저마다 자리를 잡고 누워서 낮잠을 즐기거나 냇물에 발목을 담그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흙을 밟으며 40만 평에 달하는 넓은 공능 숲을 천천히 걸어보자. 그늘진 숲길은 그래도 견딜만할 정도로 시원하다. 간간히 숲 사이로 싱그런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라도 불면 더위의 산책길도 기운이 난다.

a 버섯

버섯 ⓒ 한성희

카메라를 들고 공능 숲을 천천히 걷는다. 며칠 전 이곳에서 봤던 버섯들을 찍으려고 느린 걸음으로 찬찬히 풀 사이를 내려다본다. 버섯의 모양은 동화 속 집을 연상케 해서 매력적이다. 피터팬이 살던 집도 버섯지붕을 가진 집이었고 만화영화에도 흔히 등장하는 버섯 모양의 집은 빙그레 웃음이 나오면서 환상의 동화 속으로 이끈다. 어릴 때 이담에 저런 버섯 모양의 동화 같은 집에서 살고싶다는 꿈을 꿨는데.

갖가지 버섯의 예쁜 색과 둥근 기둥곡선과 도톰한 둥근 갓은 보기만 해도 귀엽다. 풀 사이로 고개를 내민 버섯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보물찾기를 하는 가슴 두근거리는 기쁨이 있다. 밑둥이 불룩하게 둥근 버섯의 기둥은 귀여운 아기 엉덩이처럼 통통하다.

빨간 버섯과 노란 버섯, 점박이 버섯 등등 한 시간 넘게 여름 숲을 헤치며 셔터를 눌러대는 동안 더위도 잊었다. 엊그제 보지 못했던 버섯들이 지나갔던 초록빛 야생초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나도 요기 있지" 하면서 혀를 쏙 내미는 것 같다.

도토리 가지 자르기 선수 도토리거위벌레


a 버섯

버섯 ⓒ 한성희

숲은 날마다 변한다. 찬찬히 바닥을 들여다보면, 지난 가을 내내 쌓였던 낙엽들이 5월까지만해도 수북하게 썩지 않은 채로 있던 것이 장마비 몇 번을 맞더니 푹 줄어들어서 거름이 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상수리 나무 근처를 지나다가 가지들이 잘린 채 여기저기 내동댕이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토리 몇 개를 달고 가지째 잘려 있는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이곳은 청설모가 많은지라 처음엔 청설모 짓인 줄 알았다. 그놈 참 이상한 장난도 하네. 아직 크지도 않은 도토리를 까먹는 것도 아니고 가지를 잘라 내던지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거요? 도토리거위벌레가 한 짓입니다. 청설모가 아니예요. 칼로 잘라도 그렇게 반듯하게 자르진 못할텐데."
"도토리가위벌레요?"
"도토리거위벌레요."

박정상 문화재청파주지구관리소장은 그 피해가 크다며 고개를 젓는다. 도토리거위벌레는 상수리 열매에 알을 낳고 가지를 잘라버린다. 애벌레는 도토리의 수액을 먹고 자란다고 한다. 잘린 단면을 보니 털북숭이 풍뎅이같이 생긴 놈이 주둥이만으로 어떻게 이리 깨끗하게 잘라냈는지 반듯하다. 도토리거위벌레가 아니라, 도토리가위벌레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참나무 숲을 망가트릴 정도로 해를 끼치는 곤충이라 이것을 제거하는 데 박정상 소장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이곳엔 다람쥐도 있어서 토종다람쥐를 내쫓는 청설모가 미운 마음에 괜히 청설모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 같아 좀 미안하긴 했다. 지난 주 내내 청설모가 잘라 던진, 익지 않은 새파란 잣송이가 여기저기 있어서 지레짐작을 했던 것이다. 청설모의 날카로운 이빨에 잘게 먹히고 남은 잣송이의 푸른 잔해가 어지럽게 잣나무 밑에 흩어져 있던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잘린 가지를 수거해서 불에 태우는 방법밖엔. 나무에 올라가서 저 놈을 한번 보고싶은데 올라갈 수도 없고."

딴은 이렇게 싹뚝싹뚝 가지째 잘라서 내던지는 작은 벌레가 보고싶긴 할 것이고 어떻게 잘라내는지 보고싶긴 나도 마찬가지다. 도토리 뿐 아니라 새파란 나무열매도 여기저기 잘려 있는 걸로 보아 벌레들의 극성이 만만치 않다.

a 도토리거위벌레가 잘라 내던진 상수리 가지.

도토리거위벌레가 잘라 내던진 상수리 가지. ⓒ 한성희

가끔 맨발로 흙길을 밟고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꿈틀거리는 벌레들을 보면 아직 용기가 나지 않는다. 가끔 솔잎혹파리와 송충이 때문에 방제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넓디넓은 숲을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허구헌 날 약을 뿌려댈 수도 없다.

"벌레도 좀 있어야 되겠지요. 다 없앤다면 숲이 망가질 거고요."

다 없애면 까치와 새들의 먹이는 없어지고 숲의 가치가 상실되겠지. 숲길을 걷다보니 길 옆의 나무가지에 구멍이 뽕뽕 뚫린 것이 보인다. 딱따구리가 쪼아놓은 새집 같다. 유난히 한 나무에만 구멍이 많은 걸 보니 그 새들이 점 찍어놓은 아파트가 아닐지?

숲을 걸을 때 걸음을 천천히 늦추고 시선을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으니 평소에 눈에 띄지 않던 갖가지 숲의 이야기가 보인다. 딱다구리 아파트 나무도 여러 차례 이 길을 지나갔어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름모를 풀들이 귀엽게 손바닥을 벌리는 것도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다. 공능 숲은 남한에 현재 남아있는 40여 개의 능들 중에서 자연이 가장 잘 보존 된 곳으로 손꼽힌다.

이 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려도 숲을 한가로이 걸으면서 버섯과 새와 벌레와 야생화를 보는 것도 좋은 피서방법이다. 간혹, 숲 사이로 팔랑팔랑 나비가 날아가는 것을 뒤쫒아 시선을 따라가면 아름다운 자태를 함초롬히 뽑내는 또 다른 야생화도 보인다.

사라져가는 물봉선화의 군락지도 이곳에 남아있다. 간혹 한두 개의 꽃이 핀 걸로 봐서 다음 번에 올 때는 많이 피지 않을까 싶다. 냇가 작은 돌다리 근처에서 지난 장마 때 누군가 흐르는 물에 만들어 놓았던 작은 나무 물레방아가 있지 않을까 살피지만 보이지 않는다. 나무가지를 엮어서 돌에 걸쳐놨던 작은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모습이 아주 예뻤는데 어디로 갔을까? 빙글빙글 부지런히 도는 모습에 지나치던 사람들과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내려다 봤는데.

서너 곳에서 흘러오는 시내가 합친 개울에 아이들이 들어가 참방거리며 걸어간다. 가재를 잡는다고 설치는 아이들에게 가재가 씨가 마르니 잡지 말라고 일러주고 지나친다. 오늘 카메라에 담은 버섯들도 다음 번에 오면 사라지고 또 다른 버섯이 움 틀 것이다. 숲의 생명력은 항상 생명을 싱싱하게 변화시키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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