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통 컨테이너에서 힘겨운 여름나기

열대야 피하려다 컨테이너 위에서 떨어진 태국인 수탓 이야기

등록 2004.08.13 10:59수정 2004.08.1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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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는 열대야가 한풀 꺾이기 시작했는지 선선한 바람이 불더군요. 집사람이나 아이들에 비해 더위를 많이 타는 저는 열대야로 인해 잠을 설치는 밤이 올해는 다 갔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외국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면서 이맘때쯤에 열대야로 인해 겪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열대야가 전국을 뒤덮던 한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점심시간쯤 해서 사무실로 찾아온 사람은 임금체불 문제로 만난 적이 있던 태국사람 수탓이었습니다.

그는 장난기 있는 얼굴로 살짝 웃으며 아무런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한 손은 턱을 받치고 있고, 한 손은 머리를 누르고 있는데 머리에는 수건으로 보이는 천이 접혀져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하도 장난스러워서 "무슨 좋은 일 있어요? 밀린 월급 받았어요?"라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 없이 문가에 서서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세 그의 장난기 있어 보이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그의 앞으로 가서 보니, 턱은 찢어져 피가 굳어있고, 머리를 누르고 있던 수건에는 피가 배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건으로 누르고 있던 부위에는 모래가 잔뜩 묻어 있었는데 피는 지혈이 된 것 같았습니다.

부랴부랴 차를 타고 평소 무료진료를 해 주시던 의사선생님이 계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 선생님은 여름휴가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는데, 친구 대신 잠시 병원 일을 봐 주고 계신다는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어떻게 머리를 이렇게 다치고 이제야 왔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혈이 되긴 했지만, 여름이라 다친 부위에 진물이 흘러 머리에 박힌 모래들이 잘 씻기지 않아 치료하는데 애를 먹었고, 머리 같은 곳은 치료를 제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제야 그가 어떻게 하다 그렇게 다쳤고, 다친 부위의 피가 굳을 때까지 뭐하다가 뒤늦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우리말이 서툰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그저 의사선생님이 치료를 잘 해 줬으니 걱정 말라고 전하고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수탓은 태국어 통역봉사를 하시는 분하고 같이 사무실에 들렀습니다. 통역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열대야'로 인한 사건이었습니다.

컨테이너에서 숙식을 하고 있던 수탓은 열대야로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컨테이너에서 잠을 자기 어렵자, 자정쯤에 컨테이너 위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컨테이너 위에서 앉아 있는 동안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컨테이너 모서리에 앉아 있던 그는 그만 깜빡 졸다가 컨테이너 아래 땅바닥에 떨어져 머리가 박힌 것이었습니다.

밤이라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어떻게 할지를 몰라 그냥 수건과 손으로 지혈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아 회사 사람들이 출근할 때쯤엔 이미 피가 멎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저 "야, 아프면 병원 가 봐!"라고만 말하지, 누구 하나 큰 관심을 갖고 병원으로 데려다 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머리를 다쳤는데, 걱정이 되지 않았느냐. 혼자라도 병원에 갈 생각을 못했느냐"고 역정을 내자, 수탓은 특유의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싱긋 웃고 마는 것이, 어릴 적 늘 보아 왔던 사람 좋아 보이는 시골의 이웃 같았습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다보면, 크게 다쳐도 어떻게 처치를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시간만 보냈던 수탓과 같은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게다가 말이 서툴고 아는 친구가 없는 사람은 더욱 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막막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조금만 신경을 써 준다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병을 키우는' 일들은 줄어들 것입니다.

올해도 뜨거운 컨테이너에서 지냈을 수탓이 올 여름은 어떻게 났는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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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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