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새들은 다시 날 수 없을까?

시험에 든 '실험정신'

등록 2004.08.16 09:26수정 2004.08.1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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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실험을 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인내심의 한계를 저울질이라도 하듯 수업시간마다 산만한 행동을 일삼는 아이들이 바로 그 실험대상이다. 잠자리의 기억력이 7초라고 했던가? 잡힐 듯하다가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부지한 잠자리가 겁도 없이 그 예정된 죽음의 자리로 되돌아와 앉는 시간이 딱 그쯤 된다는 말이겠지.

"잠깐 나와 볼래?"
"예? 저요?"
"응. 잠깐 나와 봐. 괜찮으니까 어서 나와 봐."

수업이 끊기는 것도 싫고, 너무 자주 지적하는 것도 피차 괴로운 일이어서 눈짓으로만 여러 차례 신호를 보냈는데도 눈이 마주친 뒤 7초가 채 못되어 다시 몸이 뒤로 돌아가는 한 아이를 조용히 불러낸다.

"몇 번 눈짓을 보냈는데 계속 떠드네. 그래서 나오라고 한 거야. 들어가면 또 떠들 거야?"
"뒤에서 자꾸만 건드려요."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 나는 잠깐 주춤한다. 이런 경우 실험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인간성 운운하며 핏대를 세우고 버럭 소리를 지를 것을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날 일진이 사납기라도 하면 제자와의 볼썽사나운 말다툼에 휘말릴 수도 있다. 다행히도 내 안에는 나를 다독이며 지금은 실험중이라고 속삭여주는 또 하나의 '나'가 있다.

"그래? 그럼 뒤에서 건들지만 않으면 떠들지 않고 수업 잘하겠네. 그런가?"
"예? 예."
"좋아. 믿어보지. 들어 가."

이쯤 되면 돌아서는 아이의 뒤통수가 간지러운 법이다. 웬만큼 뻔뻔하거나 웬만큼 속이 없는 아이가 아니라면 돌아가서 7초만에 다시 떠들지는 않는다. 만약 30초만에 다시 몸을 뒤로 돌려 잡담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엄청난 발전이다. 그 발전을 인정하면 교실은 평화롭고 아이와의 인간관계도 깨지지 않는다.


이런 교사로서의 노하우랄까 마음가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매를 들거나 화를 내지 않고도 아이들과 잘 지내는 편이다. 문제는 정규수업시간에만 그런 실험정신과 전문성이 발휘된다는 점이다. 방과후나 방학중에 하는 특기적성교육시간에는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

"고생해서 학교에 왔으면 공부를 해야지 왜 떠드는 거야. 네가 원해서 온 거잖아."
"제가 원하지 않았는데요."
"그런 게 어딨어? 특기적성교육은 희망자에 한하여 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 반은 강제로 하는데요."
"그럼 공부를 열심히 하든가, 아니면 못하겠다고 하든가."
"그럼 담임한데 죽는데요."


평소 수업시간에도 공부와는 거리가 먼 아이들이 동무들의 들러리가 되어 멍한 눈으로 앉아 있거나 쉬지 않고 잡담을 하며 시간 때우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자꾸만 화가 치민다. 그렇다고 그 화를 발할 대상이 마땅치도 않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담임은 담임대로, 관리자는 관리자대로 할 말이 있을 터.

그 할말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변명에 지나지 않지만 원칙보다도 변명이 더 쉽게 이해되고 용인되는 세상이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아무튼 나는 정규수업시간에는 아이들에게 다정하고 실험정신이 가득한 나름대로 전문성을 갖춘 교사이다가 특기적성교육시간만 돌아오면 너무 쉽게 마음의 평정을 잃고 어딘가 깜깜하고 아득한 곳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이중인간이 된 기분이랄까?

그래도 나는 실업계 학교에서 근무하다보니 그런 이중인간으로서의 고민이 덜한 편이다. 그만큼 교사로서 추락하는 시간이 적다는 말도 되겠다. 교사로서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재충전할 시간도 없이 방학 내내 교실에 갇힌 아이들의 풀죽은 눈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교사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방학을 빼앗긴 아이들의 마음이야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렇다면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을 찾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혹은 우리가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방학인데도 아이들을 교실에 가두고 문제지를 풀거나 정답을 외우게 하는 것만이 최선의 교육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동안 우리 교육은 천길 벼랑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까마득한 먼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새만이 다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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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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