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죄인이 아닐까?

[8. 15특집 - 다시 항일유적지를 가다 17 마무리 회] 귀국 여객기에서

등록 2004.08.21 15:23수정 2004.08.23 11:47
0
원고료로 응원
a 앞의 밭이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둔전이고, 뒤의 산 아래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앞의 밭이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둔전이고, 뒤의 산 아래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 ⓒ 박도

10일째 2004년 6월 3일 목요일 맑음

'민족의 얼'을 세워야



05:00, 연변대 빈관은 이용료가 싸고 조용하며 회의나 접대하기에 시설이 좋으나, 한 가지 흠은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점이었다. 아마도 성수기가 아니기에 그런 모양이었다. 일어난 후 곧장 연변대 앞 대중욕탕에 가자 첫 손님으로 탕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몸을 닦고 온탕에 들어가자 온몸이 가뿐했다.

07:30, 이곳 언론인인 동포 주성화씨가 찾아왔다. 필자와는 <오마이뉴스> 기사로 알게 되었다. 지난 해 그가 나의 <항일유적답사기>를 보고는 '허형식' 장군 관련 사진을 요청해 와서 서로 알게 된 사이로, 사진을 보내주느라 몇 차례 메일이 오간 적이 있었다. 마침 이번 중국 방문을 앞두고 그에게 연변대 빈관 예약과 박창욱 교수 면담 주선을 부탁한 바, 그가 모두 성사시켜 주었다.

인터넷신문의 위력은 대단했다. 연초에 필자가 언감생심, 감히 생각지도 않았던 워싱턴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가게 된 것도, 미국 현지에서 수많은 동포들의 정성어린 도움을 받은 것도, 모두 네티즌들의 도움이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라고 할 만큼 사회 모든 분야에 끼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특히 해외 동포들은 국내 네티즌보다 더 인터넷으로 고국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a 왼쪽부터 박창욱 교수 권순태 PD,  이항증 선생

왼쪽부터 박창욱 교수 권순태 PD, 이항증 선생 ⓒ 박도

그는 출근길에 잠시 들렀다면서 서로 인사만 나누고 곧 헤어졌다. 잠깐의 대화에서 그가 일제시대 사진자료를 모으는 수집광임을 알았다. 현재까지 1000여점을 모았다고 했다.


그가 떠난 후 일행과 오늘 일정을 상의한 결과, 오전에는 박창욱 교수 인터뷰를 하고, 오후에는 각자 자유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안동MBC 팀들은 그 시간에 연길 시내를 둘러볼 예정이라고 했다.

10:00, 박창욱 교수님이 오셨다. 5년만에 다시 만났으나 조금도 변함이 없어 보였다. 그 사이 정년퇴직을 했지만 지금도 집필과 강의로 바쁘게 지낸다고 하셨다. 박 교수님은 연변대 민족문제연구소 교수로, 항일 역사에 원로 학자이시다.


그분은 연변뿐 아니라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분으로, 언론 매체마다 만주 항일 역사에는 약방에 감초처럼 나오셔서 피어린 항일 역사를 증언해 주신다.

박 교수님은 카메라 앞에서도 지난 역사이야기를 시냇물이 흐르듯 거침없이 쏟으셨다. 마치 지난날 우리 국문학계의 태두 무애 양주동 박사처럼, 항일 역사에는 국보와 같은 인물이다.

a 파안대소하는 박창욱 교수

파안대소하는 박창욱 교수 ⓒ 박도

박 교수님의 말씀 내용은 우리 민족지도자들의 만주로 건너온 경위와 이주 초기의 활동, 추가가,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부민회, 서로군정서,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조선혁명군, 대종교, 동북항일연군 등 독립운동사의 전편으로 막힘없이 이어졌다.

상해 임시정부 대목에서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을사오적'보다 더 나쁘다고 혹평을 하셨다. 그 이유인즉, (임시정부)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제 스스로 미국에 위탁 통치를 부탁하고, 동포들이 모아준 독립자금을 유용한 혐의로 탄핵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해방 후 그런 사람이 다시 대통령이 되어서 친일파 처단은커녕, 오히려 그들을 등용하여 민족정기에 먹칠을 한 인물이라고 아주 가혹하게 매도하셨다.

1931년 만주사변 후 일제는 동북에다 만주국을 세우고 관동군 70만을 풀어서 독립군들을 빗질 토벌하는 바람에 대부분 민족주의 진영은 상해로 국내로 잠입 탈출하였고, 동북에는 동북항일연군이 항일 명맥을 유지하였다면서, 언젠가는 남과 북의 독립운동사를 통합해서 객관적으로 다시 써야 할 것이라고 하셨다.

요즘 젊은이들이 역사를 잘 알아야 할 텐데 경제만 중시한다면서, 이러다 보니 정의감은 사라지고 별별 해괴한 일도 다 벌어진다고 걱정하셨다. 독립운동가 후손은 풍비박산이 되고 친일파 후손은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에 누가 애국하겠느냐고, 정의가 사라진 세태를 한탄하시고는 '민족의 얼'을 세워야 민족도 나라도 산다고 역설하면서 긴 말씀을 마쳤다.

a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 박도


"사회주의 웃점(좋은 점)과 자본주의 웃점이 조화된 나라"

16:00, 빈관에서 취재 노트를 정리하고 있는데 김태국(40) 박사가 작별 인사차 찾아왔다. 원로학자만 아니라 소장학자의 이야기도 듣고자 몇 마디 물었다.

a 연변대 김태국 교수(오른쪽)과 필자

연변대 김태국 교수(오른쪽)과 필자 ⓒ 박도

통일 방안을 묻자 "행정적인 통일에 앞서서 문화적인 통일이 앞서야 하며, 행정적인 통일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혼란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 단적인 예로 중국의 조선족 사회도 한국으로 돈벌이 가는 사람 때문에 여간 심각치 않다. 특히 젊은 여자들이 한국으로 시집을 많이 가기에, 경제 사정이 어려운 연변의 농촌 총각들이 신붓감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여간 심각치 않다"고 했다.

돈에 대한 견해를 묻자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 조선족 사회에서도 돈은 생활하는 데 꼭 있어야 하는 절박한 문제"라고 말하면서, 이곳 조선족들은 더 돈벌이가 나은 한국으로 가려고 기를 쓴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런 목적으로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한국 정부에서 해외 동포사회가 그 소재국에서 잘 살 수 있도록 정책적인 배려를 해야 된다고 하면서, 해외에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것은 국력의 신장이요, 국토가 넓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만일 한국과 중국이 축구시합을 하면 어느 나라를 응원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단연코 한국이라고 답했다. 국가보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앞서기에 그런가 보다며 웃었다. 지난 번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오른 것을 보고, 우리 조선 민족도 하면 된다는 능력을 가늠하였다고 했다.

a 봉오동 전적지

봉오동 전적지 ⓒ 박도

김 박사는 연변대 역사학부를 졸업한 뒤 민족연구소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후, 1996년 3월부터 2002년 8월까지 서울의 국민대학 국사학과에서 조동걸 교수님 지도 아래 전액 장학금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가족으로 부인과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둔 바, 대학원을 다닐 때 부인이 서울까지 와서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당신은 이념보다는 인간을 더 중시하고,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인간 해방, 민족 해방 문제에 초점을 두고 공부한다면서, 앞으로 통일된 조국의 모습은 사회주의 웃점(복지 인간 평등)과 자본주의 웃점(창의력, 개인능력 중시)이 조화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한국과 동북의 조선족, 한국과 중국이 더 많은 교류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동반자 관계로, 서로 공생 상생하는 관계로, 더욱 발전되기를 바란다면서 대담을 마무리했다.

11일째 2004년 6월 4일 금요일 맑음

a 연길공항

연길공항 ⓒ 박도

06:50, 연길 공항에 도착하여 수속한 후 8시 20분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까지도 우리 일행은 무척 긴장했다. 10일간 애써 찍은 답사 자료를 공안에게 압수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했다. 그제야 촬영 팀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09:00, 중국 남방항공 CZ6073 여객기가 연길공항을 이륙했다. 이국의 산하에 원혼이 되신 선열들이 떠올랐다. 기내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도 그 아래 빌붙거나 그들에게 순치된 채 살아남은 사람들은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을 바친 선열들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 아닐까? 그리고 그 후손들도….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지 어언 59년, 아직도 우리는 그분들의 희생에 무관심하거나 덮어버린 채 살고 있다.

12:15, 중국 남방항공 여객기가 인천공항 활주로에 날개를 접었다. 이로써 우리 일행의 항일유적 답사 일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어느 때보다 마음 고생이 많았던 답사였다. 이나마 무사히 귀국한 것도 선열의 도움이리라.

a 백두산에서 바라본 만주벌판, 일제시대 우리 독립전사들의 활동무대였다

백두산에서 바라본 만주벌판, 일제시대 우리 독립전사들의 활동무대였다 ⓒ 박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2. 2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3. 3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