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복 안입은 일반인의 판결 "증거불충분 무죄"

[현장] 사법개혁위원회 주최 사상 첫 참·배심 모의재판 열려

등록 2004.08.26 23:12수정 2004.08.2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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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로 2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법원 4층 466호 대법정에서 배심·참심 모의재판이 열렸다.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로 2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법원 4층 466호 대법정에서 배심·참심 모의재판이 열렸다. ⓒ 오마이뉴스 유창재


"단순한 재판이 아니라 한편의 살아있는 법정 드라마였다."
"검사와 변호사의 진검 승부를 보는듯 했다."
"배심원에게 사건의 모든 것을 쉽고 상식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실체적 진실이 밝혀졌다."
"국민이 참여한 재판, 보다 신뢰감을 갖고 시종일관 즐거운 마음으로 경청했다."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로 2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법원 4층 466호 대법정에서 열린 배심·참심 모의재판을 지켜본 방청객들이 밝힌 소감이다. 이들은 특히 "사법개혁의 방향이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조준희 위원장. 이하 사개위)가 주최한 이번 모의재판은 앞으로 우리나라에 국민의 사법참여제도를 도입할 경우 그 방향과 구체적 내용을 결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150여명의 시민들이 자리를 메웠으며, 이들은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모의재판을 지켜봤다.

사개위가 기획한 모의 사건은 대학졸업 후 취직하지 못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있는 조무혁(가명·남·28)씨가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 공원 공중화장실에서 김미자(가명·여·45)씨의 돈을 빼앗으려다가, 피해자가 저항하자 살해한 뒤 달아났다는 내용이었다.

조씨는 강도살인 혐의(형법 제338조)로 기소됐으며, 유죄가 인정될 경우 법정 최고형인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게 된다.

이번 사건에 물증은 없었고 증인만이 있었다. 20∼30초의 짧은 시간 동안 범인의 얼굴을 봤다는 피해자의 딸과 달아나는 범인을 쫓다가 놓친 공원관리인, 용의자를 찾아낸 경찰이 검찰 측 증인이었다. 반면 사건 당시 피고인과 함께 당구를 쳤다는 친구와 당구장 주인이 변호인 측 증인으로 나섰다.

동일 사건으로 오전에는 미국식의 배심 재판이 열렸으며, 오후에는 독일식의 참심 재판이 열려 상호 대비해 볼 수 있었다.


과연 사건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재판에 참여한 배심·참심원들이 재판진행을 지켜보고 평의(합의)를 통해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배심재판] 유·무죄 놓고 검사-변호사 치열한 공방... 설명과 이해가 주요


a 일반 시민들 가운데 무작위로 선발된 41명 중 선발된 예비 배심원 2명을 포함한 14명의 배심원이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일반 시민들 가운데 무작위로 선발된 41명 중 선발된 예비 배심원 2명을 포함한 14명의 배심원이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 오마이TV 김호중

먼저 실시된 배심 재판(재판장 김홍엽 변호사)에서 재판장은 피고인을 소개했다. 이어 전날(25일) 일반 시민들 가운데 무작위로 선발된 41명 중 예비 배심원 2명을 포함한 14명의 배심원이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하면서 본격적으로 재판이 진행됐다.

"법정에서 제시되는 검사와 변호사의 증거에 대해 판사인 저는 옳은지를 미리 결정할 뿐이다. 검사나 변호사가 증거에 대해 부당하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대해 편견을 가져서는 안된다. 증인들의 증언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배심원들에게 있으며, 유·무죄를 결정하길 바란다." - 재판장.

"어느날 오후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 피해자가 증언할 수 없어 살인범을 잡기가 어렵다. 발견된 증거가 진실을 증명할 것이고, 재판이 끝나갈 때쯤이면 그 자가 범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슬픈 넋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라며, 앞으로 (이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바란다." - 검찰 측 모두진술.

"한 무고한 시민이 무참히 살해됐다. 그렇지만 당시 현장에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는 무고한 시민을 처벌하는 것은 단순한 비극을 넘어 있어서도 안될 커다란 재앙이다. 불확실한 증거를 갖고 무고한 시민을 처벌해서는 안되고 이 땅의 사법정의를 확인시켜 줄 것이다." - 변호인 측 모두진술.


이어 검찰 측이 용의자의 몽타쥬와 운동복 바지, 국과수 부검소견서, 범인식별과정을 녹화한 비디오 촬영(라인 업), 혈흔감정서, 범행현장 약도 등 다양한 과학적 수사방법에 의한 자료를 증거로 제출하면서 피고인의 유죄를 주장했다. 이에 반해 변호인 측은 검찰 측이 제시한 증거물을 반박하면서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했다.

검사와 변호사들은 배심원들을 상대로 강약을 조절해가며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해 나갔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변호인이나 검사가 상대방의 증인심문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의제기'를 하기도 했다. 양측의 치열한 법정 공방은 3시간여에 걸쳐 진행됐다.

결국 재판이 끝나고 배심원들은 평의에 들어갔다. 배심원들은 유·무죄에 대해 만장일치로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결론이 하나로 모아질 때까지 평의가 계속됐다. 5시간이 넘는 평의 끝에 배심원들은 '사건의 진실'에 대해 '무죄' 결정을 내렸다.

[참심재판] 참심원 직접 피고인-증인 심문

a 피고인이 참심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피고인이 참심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 오마이TV 김호중

이어 오후에 열린 참심 재판(재판장 곽태철 변호사)도 동일한 사건을 다뤘다. 재판석에는 재판장 양옆에 배석판사로 박래춘, 안지현 변호사가 자리했으며, 법복을 입지 않은 참심원 두 명이 앉았다.

참심원은 서울중앙지법 관내 관악구, 서초구, 성북구 의회에 의뢰해 선발한 40대 남성 1명과 50대 여성 1명이 참가했다. 참심원은 피고인이나 증인에게 질문을 할 수 없는 배심원들과 달리 판사와 동등한 자격을 갖고 재판장의 허가를 받아 직접 질문을 하기도 했다.

검찰과 변호인 측은 재판부를 상대로 피고인에 대한 유·무죄를 치열한 공방을 통해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검사와 변호인들은 배심원과 마찬가지로 선입견 배제를 위해 재판 기록을 전혀 검토하지 않은 참심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치열한 논리전을 펼치면서 공판중심주의에 한층 다가섰다.

양측의 주장을 경청한 재판장은 "참심재판의 경우 참심원 2명을 포함한 5명의 재판부가 합의를 통해 3분의 2 이상(5인 중 4인)이 찬성하면 '유죄'가 인정된다"며 "직업 법관 3명의 결정만으로 유·무죄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설명하고 합의에 들어갔다.

2시간여의 합의 끝에 참심 재판부도 변호인 측의 주장대로 범행 동기 불충분 및 검찰의 입증거 입증 부족, 증언의 신빙성 부족 등으로 피고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배심·참심 재판을 위해 각 3인씩으로 검사단(김진, 박형연, 이경현 변호사)과 변호인단(진선미, 최영동, 한택근 변호사)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결론이 나오도록 논거를 펼쳤다.

한편 모의재판에서 다뤄진 실제 사건은 확실한 물증은 없었고 피고인이 처음에는 자백했다가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한 것이었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가 항소심에서 유죄가 됐으며,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평가] "국민참여 사법제도로 뿌리 내렸으면"... "합리적 판단 위해 고민"

이날 배심·참심 모의재판은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된 20대 피고인에 대한 공판을 통해 현행 법관에 의한 재판 제도와 배심·참심제 두 제도의 장단점을 비교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 사법 체계에 비춰볼 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낯설면서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모의재판을 지켜본 모형관(24·고려대 법학과) 학생은 "일반 시민을 상대로 사건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변론해 나가는 것은 '국민참여 사법개혁'으로 기대를 갖게 했다"고 말했다.

다른 학생인 김선휴(고대 법학 3년·여)양은 "검사나 변호사들이 배심원들에게 쉽게 설명하면서 실체적 진실이 밝혀졌다"며 "시간이 많이 걸려 지치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국민 자신이 권리와 의무를 찾아 사법 참여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평가했다.

이영선 단국대 교수는 "이날 배심 재판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라며 "참심재판보다 배심재판으로 결정이 내려지길 바라고 전면적인 수용보다는 5년 이상의 형사사건 등 부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 교수는 "검사-판사-변호인가 서로 연결고리로 이어져 부정부패를 만든 기존 제도를 끊을 수 있다"며 "국민이 상식선에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살아있는 재판'을 보았다"고 말했다.

배심원 대표를 맡은 회사원 김동헌씨는 "낯설지만 여러 가지로 상당히 의미있는 경험이었다"며 "우리 정서에 맞게 제도적·법적 보안장치가 마련되어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제도로 뿌리내렸으면 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피고인의 변론을 맡았던 진선미 변호사는 "모의재판이지만 일반인들을 상대로 우리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을 했다"며 "이번 재판에서 배심원들의 법의식 수준이 상당히 높아져 있음을 확인해 국민참여제도의 도입 시기가 앞당겨질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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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대통령실 마감하고, 서울을 떠나 세종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진실 너머 저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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