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고스톱 쳐서 돈 벌어 올까?"

토라진 엄마를 달랠 때, 저는 이렇게 합니다

등록 2004.08.31 21:59수정 2004.09.0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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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광숙


회사를 그만둔 지 수개월이 지나자 조금씩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 듯한데 하루는 금세 지나가 버려 시나브로 9개월이나 된 것이다.


처음에 회사를 그만 둘 때는 20년도 넘게 회사를 다녔는데 '내 맘껏 쉰다 한들 어떠랴'하는 생각으로 '1년 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놀리라'고 작심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터넷을 뒤지고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등 자신도 모르게 차츰 일할 것을 알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부터 컴퓨터에 앉아 뉴스도 보고 이런저런 사업 정보도 찾아 보고 있자니 옆 침대에 누워만 있던 엄마는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놀아 주지도 않고 말도 시키지 않으니 심심하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당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토라진 엄마를 달랠 때는 고스톱이 최고

한참을 침대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더니만 "일어나고 싶다"며 일으켜 달란다. 컴퓨터에 정신 팔린 내가 화급히 엄마를 일으키고는 또 컴퓨터에 눈길을 돌리니 엄마는 뎅그르 다시 침대에 누워 버렸다. 5분도 안돼 다시 일으켜 달라 하여 일으키면 엄마는 다시 눕고, 다시 일으켜 달라기를 반복하다 보니 팔목이 또 아파왔다.

그렇게 해도 내가 엄마에게 주목하지 않자 엄마가 급기야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꼭 집에 가야겠다"며 보따리를 싸는가 하면 집에 데려다 달라고 떼까지 쓴다. 이쯤 되면 엄마와 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더 방치했다가는 스트레스를 받은 치매 5년차인 엄마가 정신을 아주 놓아 버려 헷갈림이 심해지다 못해 나까지 알아 보지 못하게 되면 더 수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엄마, 심심하지? 우리 뭐 할까?"
"심심하긴 뭐가 심심해? 아, 집엘 가야지.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이집 살림이 전부 우리 꺼야, 이걸 다 어떻게 가지고 가지?"

엄마는 화가 나서 이리 저리 다니며 널려져 있는 옷가지며 이불을 차곡차곡 쌓았다. "얘, 이거 쌀 보자기 좀 가지고 와라. 가위 좀 가지고 와 이거 잘라서 끈으로 쓰게."


엄마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침대 커버를 자르려고 하니 가위를 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사태가 심각해졌다. 어떻게 하든 엄마의 기분을 돌려 놓아야 하는데 엄마의 기분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난 얼른 지갑을 가지고 와 지갑 안에 있던 만원권 모두를 꺼내 놓았다. "엄마, 나 돈 많지? 나랑 돈내기 고스톱 치자. 엄마 돈 있어? 있으면 나랑 돈내기 고스톱 쳐. 응?" 아양과 약올림으로 슬슬 꼬드겨 엄마를 거실 마루에 앉히면 일단 성공이다.

"난 돈 없어. 돈 없어도 난 니돈 다 딸 수 있어." 이 기세등등한 한마디로 엄마의 기분이 조금 풀어졌음을 알 수있다. 화투를 가지고 와 판을 벌리면 엄마는 고스톱 칠 자세로 바로 들어간다.

엄마와 내가 치는 고스톱은 8장을 깔고 8장을 나누어 갖는데 5점이면점수가 난다. 무조건 점당 백원씩 쳐서 5점이 나면 5백원이고 10점이나면 천원이 된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재미있고 실감나게 엄마에게 잃어 주느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투를 나누자마자 엄마의 패를 즉시 읽어야 한다. '일, 삼, 구, 육, 팔, 십이…' 최대한 엄마 손에 들린 화투의 패를 눈으로 재빨리 훔쳐 읽고 내 손에 든 엄마의 패를 엄마가 먹을 수 있도록 미리 내 주면 되는 것이다.

"아휴, 먹을게 하나도 없네. 오늘은 어째 이렇게 뒷손이 안 풀려."
"엄마는 고스톱 박사야, 박사. 매일 고스톱만 쳤나?"

적당한 시점에 이런 저런 후렴구를 넣어 고스톱판의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 지기 위해 화투를 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마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 알지 못하리라.

"나한테 고스톱을 이길라 그래? 어림없지"

그러니 엄마는 늘 이길 수밖에 없다. 엄마 앞에 천원짜리가 수북해지고 마침내 만원짜리가 놓이게 되면 엄마의 신명도 더해진다. "나한테 고스톱을 이길라 그래? 어림없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뒷손이 맞아 내가 자꾸 이기게 되면 이런 낭패가 없다. 내가 두번쯤 연속으로 이기기라도 하면 엄마는 아예 돈을 주지 않는다. 따서 준다는 것이다. 이럴 때 재미를 더하기 위해 나는 돈을 달라고 떼를 쓴다. 엄마는 돈 달라고 떼쓰는 나를 따돌리는 재미까지 더해 기분이 최고가 된다.

하지만 엄마가 '육백'과 혼돈하여 '비 광'으로 바닥에 깔린 아무 패나 '잡아갈' 때나 (육백에서는 '비 광'으로 자신이 원하는 패를 가지고 갈 수 있음) 초든 똥이든 같은 패가 두세 장이 깔리기라도 하면 엄마는 "내가 먹은 것인데 안 가져 왔다"며 슬그머니 가지고 가버리는데 난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 몇 점이야, 한번 세어봐, 야~ 십오점도 넘었네. 고 몇 번했지? 십오점에 고 세번이면 몇 점이지? 맞아, 천팔백원, 아이쿠 또 잃었네."
"도대체 얼마를 딴 거야? 이만원이 넘었어. 내 돈 다 가져가네, 맙소사. 고스톱 박사님."

나의 이야기와 엄마의 신명나는 웃음소리까지 더해져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치열한 고스톱 한판으로 보여질 것이다.

엄마의 고스톱 실력은 가히 십여 년을 갈고 닦은 실력이다. 같은 동네에 살던 몇 살 아래의 친구분과 형님, 아우하며 단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의 집을 오가며 '십원짜리'고스톱을 다툼까지 해 가며 치열하게 쳤던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엄마가 고스톱을 육백이나 민화투와도 헷갈려 하고 점수 계산도 헷갈리는 것을 보면 오히려 내가 엄마의 그 '화려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아프다.

난 엄마가 허리 굽혀 고스톱 치는 것이 힘들어질 즈음(이삼만원 정도 잃을 때)이면 화투치기를 그만한다. "엄마, 돈 많이 땄네. 이거 가지고 나 맛있는 것 사줘. 뭐 사줄 꺼야?" 기분이 좋아진 엄마가 "그러마"하고 치킨을 시켜 먹을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엄마는 돈을 작게 접어 어딘가에 깊이 숨겨 놓는다.

엄마와의 고스톱 중 가장 중요한 마무리는 단연 엄마가 딴 돈을 어디에 두느냐를 확인하는 일이다. 만일 이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그 돈은 그냥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팬티 고무줄을 잡아 댕겨 그 안에 접어 넣거나 어딘가의 책 사이에 집어 넣어 둔다거나 혹은 돌아다니는 가방 속에 숨겨 놓아 아예 찾지 못하거나 세탁기 속에서 찾는 경우가 수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난 엄마와의 고스톱놀이가 처음엔 너무나 지겨웠다. 치매에 고스톱이 좋다고 하니, 혹은 엄마의 무료한 시간을 덜기 위해 의무적으로 하기는 했지만 엄마의 억지와 순서에도 맞지 않는 뒤죽박죽 고스톱이 재밌을 리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나와 치는 고스톱을 매우 재밌어 했을 뿐 아니라 돈을 따면 더욱 행복해 하기까지 했다. 가만 생각하니 아무리 돈을 많이 잃어준들 그 돈이 내게 다시 돌아오는데 이왕이면 눈치 안챌 정도로 왕창 잃어서 엄마 기분을 더 좋게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엄마의 무료함도 덜고 웃음과 즐거움은 물론 치매에 효과까지 있다 하니 일거삼득이 아닐까? 엄마의 어거지와 '잃어 드리기' 위해 내가 애써야 할 에피소드로 나 또한 즐거움을 갖게 되니 백만원을 잃는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다. 그 돈은 다시 나한테 돌아올 것이므로….

삼만원 정도의 돈을 딴 엄마는 종전의 짜증은 다 어디로 가고 얼굴 가득 흡족한 웃음이 가득하다. 이때 엄마의 결정적 한마디.

"나, 내일부터 고스톱 치러 나가서 돈 벌어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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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마이뉴스의 정신에 공감하여 시민 기자로 가입하였으며 이 사회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글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회가 평등한 사회가 되는 날을 앞당기는 역할을 작게나마 하고 싶었습니다. 여성문제, 노인문제등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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