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비 견적 80만원으로 잠양과 빼마를 곤경에 빠트렸던 강아지 펩시.김남희
어느 날 제임스가 동네 하수구 앞에 버려진 더럽고 꾀죄죄한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들어왔다. 불쌍해서 데리고 왔다면서. 그렇게 주워온 강아지가 어느새 세 마리. 문제는 두 번째 강아지였다. 한 농장에 묶인 채 버려져 있던 푸들이었는데 병원에 데리고 가니 각종 병 치료 및 수술비 견적이 80만원(백내장, 귀의 염증 두 군데, 목뼈 기형 등)이었다. 빼마는 그 강아지를 끌어안고 울면서도 속으로는 ‘도로 갖다 놔야지’라고 생각했다.
“얘 불쌍해서 어떡해?”
울먹이는 빼마에게 잠양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뭘 어떡해? 치료해야지.”
두 사람이 버는 돈을 다 합해도 월수입 100만원이 안 되던 때였다. 어이없어 하는 빼마에게 잠양이 한 말.
“네가 이 강아지를 버리면 얜 두 번 버림받는 거잖아. 그럼 이 강아지를 버린 사람과 네가 다른 게 뭔데?”
결국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치료비로 50만원 가까이 쓴 후에야 동물보호협회와 연결되어 무료치료를 받게 되었다.
잠양은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뭔지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가 그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게 고작 자본주의가 뭔지 정도뿐이라니….
“잠양, 다른 깨달음은 없었어?”
부끄러움을 숨기며 묻는 내게 잠양이 대답한다.
“아, 빼마의 어머니요! 장모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언제나 남을 위한 봉사를 생활의 일부로 실천하며 살아온 빼마의 어머니를 보며 그는 깨달았다. 어머니의 품이 얼마나 넓은지, 남에게 베푼다는 것이 뭔지, 끝없이 받아들여주는 존재가 어머니라는 것을. 그래서 장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열심히 연습했다. 잠양이 날마다 나에게 불러주는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 봐”, “자옥아”, “댄서의 순정”(그는 가사도 안 틀리고 3절까지 다 부른다)같은 노래는 그때 연습한 곡들이다.
한국을 떠나 이곳 맥그로드 간즈에 정착한 후에도 두 사람이 살아온 환경의 차이는 크고 작은 문제를 만들곤 했다. 카페를 열 때의 일이다. 돈이 부족했던 두 사람은 구조 변경에서 실내 디자인, 페인트칠까지 모든 일을 직접 해냈다. 빼마가 지금도 눈물을 글썽이며 이야기하는 사건은 페인트 상회에 페인트를 주문했을 때 일어났다.
판매 책자에 나온 붉은 색을 주문했으나 점원은 끝내 그 붉은 색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자신이 만든 분홍색을 붉은 색이라고 우기기만 할 뿐이었다. 페인트 가격은 700루피였다(점원의 한 달 급여의 절반 정도 된다). 빼마는 이 페인트를 사주는 것은 결코 점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페인트를 사준다면 그가 계속 이런 식으로 일을 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우기기만 하는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잠양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이 페인트를 못 사겠다고 하면 당연히 인도인 주인은 점원 월급에서 700루피를 제할 텐데, 이 사람의 월급이 전 가족의 유일한 생활비라면? 그렇게 남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면서까지 이 색을 고집할 이유가 있는가? 그 분홍색 페인트를 사오면서 잠양은 가게 점원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이 색을 그냥 사지만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하면 절대로 사지 않겠다”고.
‘내 돈 내고 페인트 하나 제대로 못 사나’ 싶어 빼마는 페인트를 사들고 오면서 엉엉 울었다. 우는 빼마를 달래며 잠양이 말했다. “너는 내가 달래줄 수 있지만, 만약 그 사람의 어깨에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있는데, 우리가 안 산 페인트 때문에 생계가 위협된다면, 그 사람은 누가 위로해 주겠니?”
또 이런 일도 있다. 잠양에게 자주 돈을 받아가는 거지 할아버지가 있다. 빼마는 무조건 돈을 주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를 말리지만 잠양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돈으로 할아버지의 삶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아. 하지만 할아버지는 지금 당장 배가 고프고, 밥 먹을 돈이 필요한데 그걸 외면해야 돼? 난 그저 할아버지에게 지금 필요한 것, 내가 줄 수 있는 걸 드리는 거야. 그리고 그 할아버지 나한테 매일 오는 것도 아니야.”
"티베트 노인들 위한 공동체 만드는 게 꿈“
누구에게나 그렇듯 두 사람에게도 꿈이 있다. 빼마와 잠양의 꿈은 이곳에 티베트 노인들을 위한 건강하고 밝은 분위기의 공동체를 만드는 거다. 잠양은 부모님이 ‘이제 네가 다 컸으니 우리는 죽어도 좋다’라는 말을 할 때가 가장 싫다고 한다. 아무 할 일도 없이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의 모습이 가슴 아파 노인들을 위한 공동체를 생각하게 되었다.
“잠양, 한국에서 돈 벌어서 시작하는 게 쉽지 않아? 여기서 밥 팔아서 버는 돈보다 훨씬 많이 벌잖아?”
“그러기 싫었어요. 누나, 만약 제가 한국에서 돈을 벌어 와서 공동체를 꾸렸다면 여기 젊은 애들이 그랬을 거예요. 쟨 외국여자랑 결혼했으니까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 인상을 주기 싫어요. 누구나 꿈이 있다면, 이곳에서도 열심히 일을 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누나, 전 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해는 세상을 밝게 비춰주지만 우린 태양을 바로 바라볼 수도 없고, 그 아래 오래 있을 수도 없잖아요? 하지만 달은 태양처럼 환하지는 않지만 오래 바라볼 수 있고, 달빛 아래 종일 머물 수도 있어요. 전 그런 달빛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꿈을 향해 걸어가는 젊은 부부의 발걸음은 느리고, 조심스럽다. 어쩌면 길이 굽어 오랫동안 에돌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먼 길을 걸어 꿈의 문을 여는 날, 맥그로드 간즈에 크고 환한 달 하나 둥실 떠오를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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