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에 대한 매뉴얼

세상 사는 이야기

등록 2004.09.04 09:10수정 2004.09.04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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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 소시에 나는 대단히 소심하고 예의 바른 처자였다. 지금도 내 밑바닥 성정을 꽉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두 가지, ‘촌년’이면서 ‘선생 자식’이라는 존재적 근원의 영향이었다. 나는 매우 규범적으로 자라났고, 여전히 그 ‘규범’ 때문에 때로 고통받고 때로 견디어 버틴다.


나는 언제나 나 때문에 누군가가 불편할까봐 애를 썼다. 내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어설픈 셈속으로 남에게 신세를 질까봐 늘 전전긍긍이었다. 남들보다 먼저 인사를 했고, 한번 한 약속은 기어코 지키려 노력했고, 남의 눈이 없는 곳에서도 몸에 밴 대로 질서와 범절을 지켰다.

물론 내 유전자에는 그와 정반대인 일탈의 욕구 또한 저장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문학예술로 승화시키기에 족한 것이고, 그 문학예술의 탄력성을 위해 약간의 ‘제스처’로 표현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한 걸까, 내가 변한 걸까. 세상이 날 변화시킨 걸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런 식으로 나를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게 부질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거칠고 거침없는 태도와 공격적인 자세만이 이 전쟁터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진리를. 무섭게 변해 가는 세상의 속도에 발을 맞추지 못하는 나는,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위선자이거나, 제 밥그릇도 제대로 못 챙기는 헛똑똑이거나, 함부로 대해도 무방한 얼간이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나는 이 사회의 2등 인간인 여자이고, 홀몸으로 움치고 뛸 수 없는 애 딸린 아줌마이고, 복종의 미덕을 강요당하는 아내이자 며느리이며, 아직 나잇살로도 밀어붙일 수 없는 젊은것이다. 예의와 범절은 경조부박(輕躁浮薄 ; 마음이 침착하지 못하고 행동이 신중치 못함)한 세상에서 나를 전혀 방어해 주지 못했다.


좀더 큰 목소리, 기세등등한 눈빛, 온기가 가신 냉정한 목소리,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으려는 몸싸움의 자세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제발 나를 건들지 말라고 세상을 향해 부르짖고 싶은 나는 웬만한 싸움은 마다하고 더러운 것은 피해 가며 산다. 어지간히 타협적으로 비겁하게 변해 버린 셈이다.

하지만 역시 내 맘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다. 일상의 곳곳에서 나를 괴롭히고 모욕하는 것들과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 이 누항의 한가운데 몸을 부려 살고 있으므로.


싸우지 않을 수는 없다. 모욕을 참고 견디는 것은 이제 미덕이 아니다. 그런데 싸우려면 잘 싸워야 한다. 싸움은 이기기 위해 해야 한다. 당장은 달걀로 바위 치기에 지나지 않더라도 작은 결실이나마 축적하여 종래에 큰 승리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싸움을 잘하기는 쉬운가? 싸우지 말아야 한다,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바른생활 교과목의 정답이 여전히 규범적인 내 안에서 스멀거리고 있는데. 잘못 싸우면 죄책감과 자괴감만 쌓인다. 싸움의 대상보다 쌈닭이 되어 버린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그건 이미 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모욕에 대한 매뉴얼을 만든다. 세상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부당하게 모욕해 올 때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고 적절하게 맞받아칠 수 있는지 고민한다. 상황을 철저히 분석하고 미리 각본을 짜 둔다. 그래야 무시로 닥친 상황 앞에서 할말을 잃고 쩔쩔매다가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며 수십 번 대꾸의 말을 떠올렸다 지우는 최악의 경우를 피할 수 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 시내로 외출을 한다. 문화원 강좌를 듣는 아들과 아이의 친구를 데리고 한 시간 남짓 지하철을 탄다. 두 아이에게 손을 잡히면 나는 나를 방어할 손을 잃는다. 그래서 더욱 몸을 도사리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날 나는 어지간히 더워진 날씨에 티셔츠 아래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지하철역에서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지청구를 한다. 애어멈 옷 꼬라지가 어쩌구저쩌구, 요즘 젊은것들이 어쩌구저쩌구, 지팡이를 휘두르며 아예 한바탕 살풀이를 할 태세다. 이럴 줄 알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을 때의 매뉴얼을 펼쳐 두었다.

“남이 뭘 입든 무슨 상관이에요? 제 청바지가 아저씨한테 무슨 피해를 줬는데요? 이런저런 꼴 다 보기 싫으면 집에 들어앉아 계시지 왜 나와서 돌아다니셔요?”

어지간히도 ‘싸가지’ 없게 톡 쏘아붙였다. 아저씨 입이 닫히고, 아이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쳐다보고, 나도 속으로 놀란다. 예전 같으면 대꾸도 못하고 혼자 꿍꿍 앓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속에 저장된 모욕에 대한 매뉴얼이 타인의 취향에 대해 무례하게 간섭하는 사람들을 더는 참지 말라고 충동질한다.

술자리에서 무시로 성희롱하는 사람들에게, 길게 늘어선 줄을 새치기하며 비집어드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약하고 온순하게 보이면 당장 얕보고 물어뜯으려는 사람들에게, 예의와 범절로는 상대할 수 없는 세상에, 더는 참지 말라고.

이건 용기도 뭐도 아니다. 그저 삶의 방편이고 처세의 기법이다. 나는 마침내 그 서글픈 성찰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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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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