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너무 좋아서 잠이 잘 안 와요."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의 사랑이야기(22)

등록 2004.09.07 08:46수정 2004.09.07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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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늦둥이 은빈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어른들이 드리는 저녁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가 원해서 한 일이지요. 은빈이는 목청이 좋아서 큰 목소리로 찬송가를 따라 부릅니다. 대답도 크게 하지요. 예배를 인도하면서 은빈이가 똑바로 앉아서 예배에 집중하는 것을 보면 여간 기특한 게 아닙니다.


a 은빈이에게 내 손에 쥐어준 쪽지.

은빈이에게 내 손에 쥐어준 쪽지. ⓒ 박철

예배를 마치고 피아노 후주가 시작되고 교인들이 묵상기도를 올리는 사이, 은빈이는 얼른 강단 앞까지 나와 내 신발을 돌려놓고 나를 기다립니다. 신랑신부가 결혼식을 마치고 마지막 결혼행진을 하듯이 은빈이는 내 손을 잡고 현관까지 퇴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다음에 자기가 결혼식을 올리게 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신부입장을 연습해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제는 은빈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 손에 쪽지를 쥐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은빈이 손을 잡고 예배당 현관까지 걸어 나온 다음 쪽지를 펴 보았더니 ‘아빠 사랑해요!’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은빈이가 가끔 늙은 아빠를 위해서 작은 이벤트를 합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나는 그때마다 행복감을 느낍니다.

오늘 아침, 아내가 실수로 내 안경을 밟아 안경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안경을 새로 맞추러 강화읍내엘 나갔습니다. 안경을 새로 맞춰 쓰고 이번에는 자전거상회를 찾았습니다. 은빈이에게 새 자전거를 사주려고요. 마침 은빈이가 타기에 안성마춤인 자전거가 한 대 있었습니다.

가격도 비싸지 않고 모양도 예쁘고 장바구니가 달려 있는 자전거였습니다. 어려서 세발자전거는 사준 적은 있었지만, 두발 자전거는 중고를 사준 적은 있었어도 새것은 처음 사주는 것이었습니다. 은빈이가 좋아서 펄쩍 뛸 것을 생각하니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자전거 사달라고 노래를 했었지요. 그때마다 다음에 사 주겠다 했습니다.

a 새 자전거가 그렇게 좋을까요?

새 자전거가 그렇게 좋을까요? ⓒ 박철

그러고 보면 우리 은빈이에게 운동화나 학용품을 빼고는 돈 주고 사 준 것이 별로 없습니다. 모두 재활용품이었지요. 그래도 은빈이가 한 번도 새 옷을 사달라고 조른 적도 없었고, 왜 매번 헌옷만 얻어 입느냐고 떼를 쓴 적도 없었습니다.


자전거를 승합차에 싣고 집에 돌아오면서 은빈이가 자전거를 받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제 마음은 차를 샀을 때보다 기뻤습니다. 오후 3시 넘어 집에 도착했습니다. 승합차에서 자전거를 내려놓자마자 은빈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정말 자기 것이 맞느냐고 몇 번을 확인하더니 책가방을 어깨에 멘 채로 자전거에 올라타면서 한 마디 합니다.

"아빠! 내가 자전거 사달라고는 했지만 오늘 이렇게 사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엄마 아빠, 고맙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저녁 늦게까지 집엘 들어오지 않습니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모여들자 은빈이는 아이들 앞에서 익숙한 솜씨로 자전거 시범을 보입니다. 서로 질 새라 자전거를 타고 어지럽게 교회 마당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저녁밥을 먹으면서도 은빈이는 흥분이 채 가라않질 않는 모양입니다. 넝쿨이에게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넝쿨오빠, 내 새 자전거 좋지? 엄청 잘 나간다."
"우리 은빈이 참 좋겠다. 밥 먹고 나서 오빠도 좀 타 보자."
"응. 그렇게 해. 나는 벌써 자전거 타고 학교에도 갔다 왔다. 차타고 학교에 가는 것보다 나는 자전거 타고 학교에 가는 게 훨씬 더 좋다."

a 은빈이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잘 탄다.

은빈이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잘 탄다. ⓒ 박철

은빈이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뒤척 하고 있습니다. 아마 내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은빈아, 빨리 자야지."
"아빠, 너무 좋아서 잠이 잘 안 와요."

나는 어제 은빈이가 건네준 쪽지를 내 지갑에 넣어두었습니다. 어쩌다 지갑을 열게 되면 "아빠 사랑해요!"라고 또박또박 쓴 은빈이의 글씨를 읽게 되겠지요. 은빈이가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에 비하면 자전거는 작은 선물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은빈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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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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