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아! 목욕탕에선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 26] 목욕탕에서 만난 제자

등록 2004.09.08 23:02수정 2004.09.0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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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람


취재 여행에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받은 쪽지함에 읽지 않은 쪽지가 1개 있다고 붉은 글씨로 표시되었다. 쪽지함을 열었다.

선생님 천경환입니다. 그 동안 찾아 뵙지도 못하고 너무 죄송합니다. 선생님 소식은 가끔 접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기사 몇 번 읽으면서도 기자 이름은 지나쳐서 선생님 글인 줄 모르고 읽다가 약 1주 전에야 알았습니다. 이렇게 쉽게 연락드릴 수 있는 것을 가끔 생각만 하고 지냈습니다.

그동안 무심했던 점, 너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횡성 쪽에 가끔 갈 일이 있습니다. 이번 가을에 꼭 찾아 뵙겠습니다. 전 딸 하나와 아들 하나인데 같이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뵙고 싶네요……. 그럼 건강하시고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20여 년 전의 제자로 학급 반장을 한 녀석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 주례로 지역구 국회의원을 모시려고 했으나 아들은 고1 때 담임선생을 기어이 주례로 모셨던 녀석이다. 그 새 네 식구라니 무척 보고 싶기도 하다. 즉시 나도 보고 싶다는 답장을 띄웠다.

깊어 가는 가을밤이다. 풀벌레들의 소리가 요란하다. 그 녀석의 쪽지가 그리운 사람들을 연상 작용으로 불러들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저마다 그리운 사람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갈 게다. 그리워하면서도 못 만나고, 그리워하면서도 아니 만나는 사람도 있을 게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그리운 사람을 마음속에 지니고 사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50여 년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지난 삶을 학교에서 맴돌았기에 대부분 교정에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이다. 내 삶의 보람을 느끼는 때는 옛 제자로부터의 안부 편지나 전화, 만남이다.

내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만남은 교사 초년 시절, 부정행위를 저질러 권고 전학 조치가 내린 녀석을 끝내 구제하지 못하고 떠나보내면서 그의 등을 두드려 줬던 일이 있었다.


그가 16년만에 찾아와서 “제가 학교를 떠날 때, 선생님이 다시는 양심을 속이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는 그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면서 교무실 맨 바닥에서 큰절을 받던 일이었다.

a 제주공항에서 만난 사제

제주공항에서 만난 사제 ⓒ 박도

어느 겨울 “아직도 박도 선생님이 학교에 계시느냐?”라고 묻는 전화가 왔다면서 한 선생님이 바꿔 준 수화기를 받고 보니, 10여년 전의 제자 박현선양이었다.

그는 고2 때 담임 반 학생으로 용의가 유난하게 단정하고 깔끔했으며 글씨를 예쁘게 잘 썼다. 학교 행사 때 그에게 일을 맡기면 그의 용모처럼 정갈하게 마무리했다. 그는 빨리 취업을 해서 홀어머니를 돕는다면서 인하대학 항공운항과로 진학했다. 그 후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

그 날 전화 이후 박양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주면서 그 동안의 일들을 전했다. 대학 졸업 후 곧장 대한항공의 승무원이 되었고, 승무원 생활 중 제주대학 교수인 남편을 만나 두 남매를 두고 있다고 했다.

첫 전화부터 나의 전 가족을 제주도로 초대했다. 그 후 편지를 보낼 때마다, 전화로 매번 초대를 잊지 않았다. 그냥 인사로 한 빈말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장편 소설 집필 기간이었는데 주인공의 아내가 뇌종양 선고를 받는 장면을 쓰고 있었다. 작품 속의 남편은 아내에게 어쩌면 마지막 여행이 될지 모르는 죽음 직전 마지막 여행지로 제주 여행을 제의한 바와 맞아 떨어져서 박양의 초대를 감사히 받아드렸다.

그 이듬해 2월 하순, 제주 공항에서 만났다. 우리 가족은 남국의 따스한 날씨 만큼 그들 내외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래서 내 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에 나오는 서 교수 내외는 그들이 모델이다.

그런데 그의 남편이 몇 해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올 여름 그는 슬픔을 딛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가족(딸 아들)과 함께 뉴질랜드로 유학차 떠나면서 인천공항에서 작별인사를 전해왔다.

무릎 꿇고 사죄하고픈 아픈 추억

수많은 만남 중 아름다운 추억만 있는 건 아니다. 다시 만난다면 무릎 꿇고 사죄하고픈 아픈 추억도 많다. 1974년 중3 졸업반 담임을 했을 때였다.

장군은 졸업을 6개월 앞두고 결석이 무척 잦았다. 등록금도 두 기분이나 밀렸다. 주소를 들고 그의 집을 찾았다. 장군의 집은 사당동 산동네로 대낮에도 전등을 켜야 될 정도로 허름한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그 날이 토요일 오후였는데 그는 혼자 집을 지키면서 그때까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부스스한 얼굴로 문밖을 나온 후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다음 주에는 꼭 등교하라고 이르고는 산비탈 길을 내려왔다. 장군은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등교하지 않았다. 보름이 지난 후, 장군의 아버지가 오셔서 가정 형편상 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말씀을 해 곧 제적 처리를 해 버렸다.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나의 몰인정과 성급한 처사가 미워졌다. 그 때 나는 그의 손에 졸업장을 쥐어 주었어야 옳았다. 때때로 그의 마지막 표정 - 초점도 잃고 의욕도 상실한 - 이 떠오를 때마다 몹시 가슴 아프다.

또 하나의 부끄러운 기억은 교사 초년 시절 1-3반을 담임할 때 일이었다. 바로 옆 반인 1-2반이 체육 시간이었는데, 운동장 수업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오니 복도 쪽 책상 아래에 둔 10여 명의 여학생 가방이 죄다 털려 울고불고 야단이 났다.

2반 학생이 목격한 바, 우리 반 두 녀석이 2반 빈 교실에 창문을 넘어 들어갔다는 것이다. 나는 두 녀석을 불러 다그쳤으나 그들은 마침 그 시간이 교련 시간이라 각반이 없어서 창문을 넘어 2반 교실에 들어가 사물함에서 각반만 꺼내 왔을 뿐이라고 했다.

워낙 큰 도난 사건인데다 많은 피해자들이 주시하기에 흐지부지할 수 없어서 두 녀석에게 “왜 남의 빈 교실 창문 넘어 들어갔느냐?”라고 흠씬 두들겨 주었다.

해가 바뀐 후에 진범이 잡혔다. 그 후 나는 그들을 불러 사죄를 했지만 그들의 구겨진 마음이야 내 사과로 펴질 수 있으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지난해 가을 어느 날 목욕탕에서 옷을 벗고 있는데 웬 녀석이 “선생님!”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때 내게 흠씬 맞은 한 녀석이었다. 그는 목욕을 막 끝내고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었다. 나는 무척 무안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놈아, 목욕탕에서 만날 때는 모르는 척하는 거야.”
“너무 반가워서 불렀지요.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해요. 저 여기 다녀요.”

그 새 그는 옷을 다 입고는 명함을 건네주었다.

“선생님 댁 아직 거기예요?”
“응.”
“이사 좀 가세요.”

그는 인사를 하고 출입문으로 나가더니 음료수 한 캔을 사서 두고 갔다. 지난 날 나의 잘못은 조금도 내색도 않은 채.

순수한 만남은 아름답다. 순수한 만남은 언제 돌이켜보아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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