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우체국 앞에서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노라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 분투기(27)

등록 2004.09.21 05:47수정 2004.09.2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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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편지는 부치지 못했지만 부치지 못할 편지에 대한 미안함을 이렇게 우편엽서 이미지로나마 대신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주려무나, 친구야 ⓒ 김정은

가을 우체국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멀리 가는걸 보네



문득 어디선가 매우 친근한 노래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라는 윤도현밴드의 노래를 듣다보니 비 때문에 눅눅했던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푸근해진다.

이 비가 그치면 거리마다 이제 가을 색이 제법 나타나겠지!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쌓인 빨간 우체통, 좀 이르긴 하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 한쪽이 시큰거린다.

이 참에 오랜만에 친구에게 편지를 써보리라 서랍을 뒤져 오래된 편지지를 꺼내 끄적거려 보았지만 차마 친구에게 부칠 수는 없었다. 편지지 위에 적혀있는 내 글씨가 왜 이리 어색하고 못나보이는지….

그러고보니 누군가에게 이메일이 아닌 자필로 편지나 엽서, 하다못해 카드라도 보냈던 적이 언제였는지도 모를 만큼 까마득하다. 글 쓰는 작업 또한 필기도구보다는 대부분 PC를 사용하고,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경우가 많다보니 자연스레 필기도구보다는 PC의 키보드와 다음 글을 기다리는 듯 모니터에 반짝거리는 커서의 환경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이런 습관이 붙다보니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호흡이 짧아져 필기도구로는 호흡이 긴 글 쓰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다. 또 한 가지 문제는 필기도구를 잘 쓰지 않아서인지 예전에 썼던 내 글씨체를 잃어버려 글씨체가 조잡해졌다는 점이다.


예전 서양인들의 글씨체가 형편없었던 이유가 타자기를 주로 쓰다보니 필기연습에 서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데, 십년이 훨씬 지나 나 자신이 예전 서양인과 같은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하얀 종이 위에 깔끔하고 곱게 써내려간 편지의 추억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 뿐인가? 이제는 때만 되면 크리스마스 카드 구매율이 급감하고 우표 구매율이 떨어진다는 뉴스 보도가 전혀 낯설지만은 않게 되었다. 누구라도 조금만 끄적거린 후 보내기 버튼을 누르면 눈 깜짝할 순간 금방 원하는 이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이메일이나 휴대폰 문자서비스의 편리함에 저도 모르게 길들여진 탓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내려간 깔끔한 글씨체의 편지를 봉투에 넣고 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 며칠간을 기다리는 그런 가슴 설레는 인내심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디지털 시대에서는 무리인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까지도 이 디지털 환경 속에서 우표와 편지와 우체국이 명맥을 유지하며 살아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가슴 한쪽에서는 부치지 못하는 편지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결국 우리는 편리하고 빠르다는 핑계로, 정작 우리 주변에 아름다울 수 있는 모습을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저런 이유로 부치지 못할 편지는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지게 되었다. 너무 쉽게 우리 주위를 떠나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인 초가을 저녁, 스피커에서는 내 아쉬움을 아는 듯 애절한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같이
하늘아래 모든것이
저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친구야! 편지 보내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비록 편지는 부치지 못했지만 부치지 못할 편지에 대한 미안함을 이렇게 우편엽서 이미지로나마 대신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주려무나,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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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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