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안식을 배려하는 사회

현대판 노예로 살았던 옥해운씨의 삶을 보면서

등록 2004.09.21 12:21수정 2004.09.21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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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옥해운(43)씨의 불행했던 삶이 방영되면서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정신지체 장애인인 옥씨는 19살 때 거리를 헤메던 중 경북 예천에 사는 한 공장 주인을 만나 감금당한 채, 온갖 학대를 받으며 무려 25년 동안 노동력을 착취당해 온 것으로 밝혀진 것.

한 제보자의 신고로 그의 불행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옥씨는 가족들을 다시 찾게 되었으며 현재 그 공장 주인은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중이다.

공장 주인은 자신의 안락(安樂)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인권을 철저하게 유린하고, 자신의 안식(安息)을 위해 타인의 소중한 안식을 말살하는 악행을 저질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그 양상만 다를 뿐 우리 사회에는 이미 이러한 비인격적인 인간 수단화 현상이 극도로 만연되어 있다고 하겠다. 특히 극단적 상업주의로 대표되는 천민 자본주의적 의식이 우리 사회의 시대 정신(時代情神)이 되면서 타자(他者)를 철저하게 수단화하는 현상들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 과학, 그리고 인간까지를 포함한 세상 전체가 수단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라고 탄식했던 현대 사상가 쟈크 엘룰(Jacques Ellul)의 말처럼, 지금 우리 사회 안에는 인간 수단화 현상으로 인한 각종 폭력과 착취 등 온갖 역기능적인 병폐들이 극에 달해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타자의 삶을 존중하는 마음과 삶의 질 회복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성서에 등장하는 지도자 여호수아는 섬김의 공동체성(共同體性)을 강조하면서 유대의 각 지파들에게 "너희들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 역시 안식할 수 있도록 반드시 도우라"라고 역설한 바 있다.


즉, 자신의 안식도 소중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안식 역시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삶처럼 때로는 자신의 안식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의 안식을 먼저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다름 아닌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할 때 비로소 가능해 진다. 즉 타인을 목적으로 대할 때 비로소 타인의 행복과 안식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기실 칸트(I. Kant)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목적의 왕국이라고 명명하면서 타인을 목적적(目的的) 존재로 여기면서 그 존재와 인격 자체로 상대방을 가장 귀중히 여길 것을 언표(言表)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인격을 목적으로 대하면서 다른 사람의 평안과 안식을 적극적으로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타인들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진정한 행복과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옥씨와 같은 그러한 불행한 일들이 이 땅에 다시는 재현되지 않기를, 그리고 그와 같은 유형의 삶들이 하루 속히 사라지고 척결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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