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좋아한다는 건 다 뻥이야!"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의 사랑이야기(24)

등록 2004.09.22 16:21수정 2004.09.23 09:2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둘째 넝쿨이를 꼭 옆에 끼고 잠을 잤습니다. 서재에서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다가 자야 할 시간이 돼 두 아들 녀석에게 "누가 아빠랑 같이 잘래?"라고 물으면 넝쿨이가 마지못해 베개를 들고 건너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들이고 딸이고 구분 없이 다 내 새끼니 예쁘고 귀여웠습니다. 딸이 없다는 것에 아무런 유감이 없었습니다.

화성군 남양에서 살 때였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수원에 영화를 보러 다녔지요. 아내와 같이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종종 혼자 가기도 했습니다.

a 아딧줄이 같이 가겠다고 먼저 오토바이에 올라 탄다.

아딧줄이 같이 가겠다고 먼저 오토바이에 올라 탄다. ⓒ 박철

그러면 큰 아들 아딧줄 녀석이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자기가 먼저 집 앞에 나와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쓰며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딧줄을 오토바이 기름통에 앉히고는 떨어지지 않게 기저귀로 아딧줄을 내 허리에 묶고 수원까지 영화를 보러 가곤 했습니다.

아딧줄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자기표현이 분명했고, 둘째 넝쿨이는 말 수도 적고 혼자서도 잘 놀았습니다. 두 녀석 성격이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 승합차를 몰고 이 녀석들을 데리러 학교엘 가면 아딧줄은 먼발치에서 나를 발견하고 "아빠!"하고 달려와서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런데 넝쿨이는 전혀 반가워하지도 않고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나는 외출할 때에는 주로 아딧줄을 데리고 다녔고, 밤에 잘 때는 단골로 넝쿨이를 데리고 잤습니다. 다 자란 이 녀석들에게 내가 어쩌다 "오늘 누가 아빠랑 같이 잘래?"하고 물으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칩니다.

그러다가 10년 전 은빈이가 태어나고부터는 두 아들 녀석은 완전 찬밥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딧줄과 넝쿨이는 내가 업어준 적이 거의 없었지만 은빈이는 자주 업어 주었습니다. 은빈이가 태어나면서 집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은빈이가 내게 애교를 떠는 게 아니라 아빠인 내가 주책없이 은빈이에게 애교를 떤다고 합니다. 일단 은빈이가 옆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습니다. 종알종알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성가시지 않습니다. 전에는 내가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무얼 사 가지고 온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사탕 한 봉지라도 사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은빈이는 우리 집안의 꽃이 되었습니다. 아들 녀석들도 자기들은 이제 찬밥 신세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모두 은빈이를 좋아하고 예뻐합니다. 가끔 동생에게 짓궂은 장난을 쳐서 울리기도 하지만 다 동생을 사랑하지요.

a

ⓒ 박철

은빈이가 태어나고부터는 가급적 은빈이를 데리고 잡니다. 그런데 새벽 알람소리에 잠에서 깨고 보면 나와 같이 자던 은빈이가 어느새 아내 품에 안겨 있습니다.

잠자기 직전에 내가 "은빈아, 아빠랑 같이 자자!"하고 은빈이를 부르면 마지못해 내게 와서 자는 척 했다가 내가 잠이 들면 살며시 엄마 품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은빈이에게 점수를 따려고 애정공세를 폅니다. 그런데 애정표현은 주로 말로 하는 것이기에 면역이 되어서 별다른 효과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은빈이에게 아빠랑 같이 자자고 부르면 냉큼 달려왔는데, 이제는 뜸을 엄청 들이고 잘 오지도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잠에서 깬 은빈이를 아무리 불러도 아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은빈아! 너 엄마만 좋아하고 아빠는 안 좋아하는구나?"
"아녜요, 좋아해!"
"얼마큼?"
"아빠는 하늘만큼 땅만큼 좋아하고 엄마는 우주만큼 좋아해요."

그 말에 약간 기분이 상했습니다. '엄마는 우주만큼 좋아한다 이거지?'

a

ⓒ 박철

"오 그래! 아빠는 은빈이를 손바닥만큼 좋아해."
"나는 아빠를 모래알 크기만큼 좋아해. 눈에 잘 안 보일 걸요."

"이건 좀 어려운 건데 네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제 삼성이라는 회사에서 60나노 플래시메모리를 개발했거든. 세계 최초래. 그런데 크기가 머리카락 4천분의 1일이라고 그러더라. 아빠는 은빈이를 60나노 플래시메모리 칩만큼 좋아해. 약 오르지?"

"아빠, 4천분의 1일이 얼마만한 크기인데?"
"너무 작아서 현미경으로 보아도 잘 안 보이는 크기일 걸."

설마 은빈이가 60나노 플래시 메모리 칩보다 더 작은 크기를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기분 좋게 웃었습니다.

"응, 하나도 약 올라. 나는 아빠 하나도 안 좋아하거든. 아빠 좋아한다는 건 다 뻥이야. 난 엄마만 좋아해."

은빈이는 씩씩거리며 방을 나갔습니다. 정작 화가 난 사람은 나였는데 말입니다. 하루에도 한두 번, 많을 때는 서너 번 은빈이와 티격태격 합니다. 그래야 소화가 잘 되지요.

"당신은 은빈이가 장난감이에요. 왜 맨날 은빈이를 놀려요?"

아내의 볼멘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왔습니다. 아침이 시작되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2. 2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3. 3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4. 4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5. 5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