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의 '사상감정소', 양지로 나오다

[토론회 : 공안문제연구소를 아십니까?] "우리를 해방시켜달라"

등록 2004.09.22 20:27수정 2004.09.23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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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식 열린우리당 의원은 22일 국회 도서관 회의실에서 `공안문제연구소를 아십니까`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각계 전문가들로 부터 연구소의 문제점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윤황 공안문제연구소 연구관이 토론자들의 공안문제연구소 해체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
최규식 열린우리당 의원은 22일 국회 도서관 회의실에서 `공안문제연구소를 아십니까`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각계 전문가들로 부터 연구소의 문제점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윤황 공안문제연구소 연구관이 토론자들의 공안문제연구소 해체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오마이뉴스 이종호

이적표현물을 '감정'해 주는 곳이 있다. 경찰대학 부설의 공안문제연구소(이하 공안연구소). 이 연구소는 경찰·국정원·기무사 등이 의뢰하는 출판물에 대해 '용공성', '좌익성' 여부를 판단해왔다.

이들의 감정결과는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근거로 작용하며 어떤 경우 감정서는 검찰의 기소장과 법관의 판결문과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옮겨질 때도 있다. 그런 관례로 인해 시국사범 피해자들은 공안연구소가 "빨갱이를 양산해 내는 사상검증소"라고 비판해왔다.

1988년 설립된 이래 7만여 건의 출판물에 대해 이적감정을 해온 공안문제연구소가 처음으로 사회적 공론의 장에 나왔다. 최규식 열린우리당 의원의 주최로 22일 국회 도서관 소회실에서 열린 '공안문제연구소를 아십니까' 토론회. 이 자리에는 공안연구소 연구원이 직접 토론자로 나섰고, 또 반대측 토론자로 피해자랄 수 있는 <한국사회의 이해> 저자 정진상 교수(경상대 사회학과)가 나와 눈길을 끌었다.

대학 교양과목 교재였던 <한국사회의 이해>의 저자인 장상환(경상대 경제학과)·정진상 교수는 1994년 YS 정권 당시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으로 신공안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이적표현물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으나, 1·2심 모두 무죄를 선고받고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사회적 공론의 장에 나온 공안문제연구소

<한국사회의 이해>의 저자인 정진상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가 공안문제연구소에 대한 정책토론회에 참석했다.
<한국사회의 이해>의 저자인 정진상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가 공안문제연구소에 대한 정책토론회에 참석했다.오마이뉴스 이종호
정 교수는 이날 토론회에서 자신의 저서에 대한 공연연구소 유동렬 연구위원의 감정서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다음은 <한국사회의 이해>의 한 대목.

"한국의 법체계는 지금까지 권력의 지배질서를 유지하고 민족민주운동을 진압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온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법의 지배' '법치국가'라는 구호로 표상되는 법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법파괴행위는 은폐하면서 대중을 독재적 법질서에 충실하게 만들어 왔다.


이에 대한 공안연구소의 감정결과는 이렇다.

"남한사회 법체계(사법부·검찰·경찰·안기부·군 등)가 권력유지를 위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민중의 사상의 자유와 정치적 활동을 탄압해왔다고 비방하며, 이들 억압적 국가기구와 국가보안법 등 악법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현 정권의 법체계와 법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주장이다. 또한 북한의 상투적인 대남선동과 역학을 같이하는 내용이다.


당시 공안연구소는 이 서적을 '좌익이적성 문건'으로 판단했다. 정 교수는 건전한 상식에 기초해야 할 이적표현물에 대한 판단을 공안연구소의 감정서가 왜곡한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경찰과 검찰을 상대로 '강의'를 하듯 조사에 임했다고 토로했다. <한국사회의 이해> 30여권을 급히 구해 해당 법원의 모든 판사들에게 돌린 까닭은 그 때문이다. 정 교수는 검찰의 구속영장을 법원이 기각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의 이해>를 감정서보다 '먼저' 읽은 까닭이라는 것이다. 감정서가 되려 건전한 상식에 기초한 판단을 방해한다는 주장이다.

정 교수는 "사상과 학문을 국가기관이 감정하는 것은 중세기의 종교재판과 다를 바 없다"며 공안연구소의 해체를 주장했다. 자유민주주의=반공주의로 등치시키는 공안연구소는 오히려 자유민주주의 가치, 즉 국민의 신체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문의 자유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사상과 학문 감정은 중세 종교재판과 다를바 없다"

이날 토론회의 발제자로 나선 한상희 교수(건국대 법학과)는 공안연구소의 업무 중 60% 이상이 공안관련 사건의 문건 감정 및 분석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철저한 비밀주의를 통해 자의적·편의적 권력행사를 해왔다"고 비판했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김창국) 역시 국가보안법의 적용 과정에서 나타난 인권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를 내고, 공안연구소가 "표현물 전체의 맥락보다는 몇몇 문장을 문제삼아 감정의 결과를 작성하고 있다"며 "보안법 공안사범을 양산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공안연구소의 업무는 △좌익이념 및 이론에 대한 비판논리의 체계적 연구와 대응론 제시 △국내 좌익세력의 실상과 전술 등의 실태 및 문제점 파악 △공안관련 정책방향 제시와 대안개발 및 자문 △공안관련 사건에 관한 문건 감정 및 분석 등이다. 이중 문건감정이 업무의 대부분으로 16명의 연구원은 평균 하루 2건의 문건을 감정하고 좌익성, 친북용공성, 용공성, 반정부성으로 분류한다.

"좌익성의 분류기분은 '현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거나 공산주의 사회건설을 위한 계급투쟁을 선전선동하는 것'으로 개념규정되고, 용공성은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적 계급투쟁을 수용, 용인 동조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친북용공성은 '북한의 대남선전선동 주장과 같은 맥락'에 서기만 하면 해당되며, 이러한 좌익성, 용공성, 친북성이 없더라도 현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표현은 '반정부적 성향'으로 낙인찍고 있다."

한상희 교수는 위와 같이 말하며 공안연구소의 감정기준은 사실상 체제위협에 대한 현저한 위험 여부라기 보다 "비판하면 곧 반국가단체의 주장과 일치되는" 인상비평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안연구소 "우리를 해방시켜달라" 업무과중 호소

<한국사회의 이해>의 저자인 정진상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가 공안문제연구소에 대한 정책토론회에서 박광작 교수의 토론을 손가락을 입에 문채 지켜보고 있다.
<한국사회의 이해>의 저자인 정진상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가 공안문제연구소에 대한 정책토론회에서 박광작 교수의 토론을 손가락을 입에 문채 지켜보고 있다.오마이뉴스 이종호
이에 공안연구소의 윤황 연구원은 "맞다, 죽는다, 잠 못잔다, 우리도 정책연구하고 싶다, 밖에 떳떳하게 명함 내밀고 싶다"며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우리를 공안감정 업무에서 해방시켜달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한발 나아가 윤 연구원이 "우리 연구원들의 인간해방을 할 수 있도록 제발 해달라"고 '우는' 소리를 하자 정진상 교수는 "해방은 스스로 하는 거다, 우리더러 도와달라 하지 말고 내부에서 요구하라"고 맞받아치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졌다.

윤 연구원은 정 교수가 제시한 감정서의 문제를 일부 시인하면서도 "전문적 지식, 양심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감정업무를 하고 있다"며 "논거나 근거를 제시하는 감정서도 있다"고 강변했다. 이어 윤 연구원은 감정분류기준의 용공성을 들어 "용공·좌익이 법리적, 학술적 용어가 아닌 것은 알지만 그렇게 표현하면 경찰들이 빨리 이해하더라"며 분류개념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이어 윤 연구원이 정 교수를 향해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간곡히 기원한다"고 말을 맺자, 정 교수는 "국가기관인 공안연구소가 공식적으로 유죄라고 판단해 놓고 무죄를 기원한다고 말할 수 있냐, 혼란스럽다"고 말해 실소를 자아냈다.

공안연구소의 서무과장인 이승욱 경장도 마이크를 잡고 '업무과중'을 호소했다. 이 경장은 "연간 7~8천여 건의 문건감정을 하고 있다, 초인간적인 업무양"이라며 "인터넷의 등장으로 그 업무가 더욱 증가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공안문제연구소에 대한 정책토론회에서 사회를 맡은 참여연대 장유식 변호사.
공안문제연구소에 대한 정책토론회에서 사회를 맡은 참여연대 장유식 변호사.오마이뉴스 이종호
그간 철저히 베일에 싸여온 공안연구소가 처음으로 입을 연 날, 플로어에는 그 피해자들이 많았다. 민가협의 박석희씨는 공안연구소가 분류해 온 감정목록의 공개를 요구하며 이적표현물로 규정된 <다시 쓰는 현대사>가 고등학교 권장도서로 선정되었다는 점을 들어 "이는 이적표현물을 고등학생들에게 권장하는 셈 아닌가"라고 따져 물었다.

이에 윤황 연구원은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공안연구소의 명칭을 바꾸고 감정업무를 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있다"며 "국가보안법 폐지=공안연구소 폐쇄는 아니"라고 항변했다. 반면 대다수의 토론자들은 "공안연구소가 국가보안법 유지의 최첨병 역할을 해왔다"고 규정, "국가안보에 관한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있다"고 연구소 폐쇄에 입을 보았다.

토론회의 사회를 본 장유식 변호사는 "토론의 장에 공안연구소가 나왔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평했고, 주최자인 최규식 의원은 "공안연구소는 그동안 국회 행자위원회의 예결심 심사조차 한번 받지 않았다"며 국회의 방임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었다.

행자위 소속의 최규식 의원은 이번 국정감사의 증인으로 공안연구소를 신청해 놓은 상태. 국정원이 정보위원회의 통제를 받듯이 공안연구소도 국회의 감시·통제에서 제외일 수 없다고 못박았다.

[공안문제연구소 어떤 곳?] "3급 비밀! 연구원 이름도 공개할 수 없다"

공안문제연구소는 5공화국까지 치안본부(현 경찰청) 산하 남영동 대공분실 내에 설치되어있던 내외정책연구소가 민주화 바람과 함께 1988년 경찰대학 부설기관으로 변경, 설치되었다. 이 연구소는 수사기관이 의뢰하는 공안사건 관련 감정업무 처리를 주로 해왔고 정기간행물 <공안연구>를 년간 5·6회 발간하고 있다.

공안연구소는 국회의 통제를 받아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정원보다 더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라는 평을 들어왔다. 최규식 열린우리당 의원은 설립 이후 현재까지의 감정목록과 예결산 및 학술활동 내역 등의 자료를 연구소 측에 요구했지만 "3급 비밀"이라며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 감정에 참여한 연구원들의 이력에 대해서도 학력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지고 있다.

이에 대해 문성호 소장(한국자치경찰연구소)은 "경찰청 소관 상임위인 행정자치위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태나 문제점들이 현재에 이르러서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며 "국정원, 국과수에 대해 국정감사를 벌이듯이 악용의 여지를 국회가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4년 소위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이 터졌을 때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공안연구소의 설립 근거와 예산실태를 따진 적이 있는데, 서울시 예산으로 되어있던 것을 경찰청 예산으로 되돌려 놓는 것 외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이에 대해 최규식 열린우리당 의원은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공안연구소의 자료제출 문제를 위법 사항이라고 판단, 정보공개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최 의원은 "새로운 안보환경에 따라 연구소가 거듭날 수 있도록 경찰청 산하 치안연구소와의 통합 여부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공안연구소의 설치근거를 들어 감정업무는 연구소의 임무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경찰대학설치법(12조)에 따르면 공안연구소는 '경찰대학의 교육과 관련되는 학술 및 정책의 연구발전을 위한 부설연구소'. 따라서 대통령령으로 규정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에 관한 증거물의 감정' 업무는 설치법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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