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쇼다, 이것도 쇼다!"

연극 <갱스터스 파라다이스>

등록 2004.10.04 01:48수정 2004.10.0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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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갱스터스 파라다이스. 동남아 순회 공연을 막 마쳤거나 준비하고 있는 가수와 댄서들이 오색 조명 아래서 노래하고 춤추는 카바레다. 가수와 댄서들이 한바탕 질펀하게 놀고 나자 한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회자(이종윤)의 소개처럼 황당하고 기이한 이야기다.

a "비무장지대, 그 곳에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진다!"

"비무장지대, 그 곳에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진다!" ⓒ 청색시대

휴전선 초소에서 근무하는 철호(최진영)와 정수(정의갑). '초소에서 여자와 해 보는 것'이 꿈인 철호에게 여자를 구해 주기 위해 정수는 은행을 턴다. 이때 마주친 법대생 은채(박수은)는 정수의 설득으로 초소에서 철호와 섹스를 한다. 내친 김에 "북쪽 사내에게도 주고 싶다"는 은채의 제안에 둘은 비무장 지대로 들어가고 북한 병사 민주(최교식)와 마주친다.


이후 갱이 된 은채와 정수는 비무장지대를 일종의 성역으로 규정하고, 비무장지대를 사들일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을 본격적으로 털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역에 들어갈 수 없는 정·재계의 인사들을 차례로 제거한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한국은행. 최고의 방어벽을 자랑하는 한국은행도 탱크와 총,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무모함이라는 무기 앞에선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그들, 갱스터들은 유유히 사라진다. 호탕한 웃음을 뿌리면서.

a 우리 시대의 갱스터 정수(정의갑)와 은채(박수은)

우리 시대의 갱스터 정수(정의갑)와 은채(박수은) ⓒ 청색시대

황당한가? 하긴, <갱스터스 파라다이스>(원작 박청호·각색/연출 최원석)에선 모든 일이 쉽게 일어난다. 비무장지대 초소에서 옷을 벗고 섹스를 하고 총을 구해 사람을 죽이고 탱크로 한국은행을 터는 것까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들이 한 점의 주저함도 없이 일어난다.

그 사건들을 이어가는 인물의 면면도 황당한 정도로 보자면 뒤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고 군대로 숨어 들어와 '여자와 실컷 섹스나 하는 것'을 꿈으로 삼는 철호와 모든 폭력과 부조리에 폭력과 부조리로 맞서는 정수, 이들에게 동등한 애정과 성을 나누어주는 은채. 거기다 '새로운 반죽을 만들어 내는' 경험을 안겨준 여자를 찾아 남으로 건너온 민주까지.

이런 줄거리는 다소 황당무계 하게 보인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도 이 황당황과 그리 다르지 않다. 자신이 믿는 신에게 지역을 봉헌한다는 한 도시의 시장이나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 여전히 금배지를 달고서 국회의원 행세를 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욕망 또한 어떠한가. 벼락을 두번 연속으로 맞고 1년에 다섯 차례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보다 낮다는 로또에 우리는 이미 열광하고 있지 않은가. '은행이나 털어 볼까' '잘 빠진 저 남자 혹은 여자와 섹스해 봤으면' '저 나쁜 놈을 확 쏴 죽이면 좋겠는데' 따위의 상상을 시시때때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다채로운 욕망들을 그대로 펼쳐낸다면 그 그림은 또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그래서 <갱스터스 파라다이스>는 황당하다고도 할 수 없는, 그저 '쇼'일 뿐이다. 우리의 어이없는 현실을 '보여 주고' 머리 속에 웅크린 기이한 욕망을 '보여 주는' '쇼'.

이 연극은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지 않는다. 이것이 옳다거나 저것이 틀렸다거나 하는 진지함 따위는 가진 척할 의사조차 없다. 다만 그들이 말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슬쩍슬쩍 건드린다. 원작인 박청호의 소설 <갱스터스 파라다이스>가 갈등과 욕망, 권력에 대해 세밀하고도 차분하게 사고하는 반면 연극 <갱스터스 파라다이스>는 그것들을 거칠게 툭툭 치고 지나간다. 그리고는 막을 내린다. 호탕한 웃음을 뿌리면서.


a 빛의 동굴에서 마주앉은 철호(최진영)과 민주(최교식)

빛의 동굴에서 마주앉은 철호(최진영)과 민주(최교식) ⓒ 청색시대

300여쪽의 소설을 두 시간 분량의 극으로 소화시키느라 배우들은 중간중간 과감한 멀리뛰기를 해야 한다. 다행히 배우들의 멀리뛰기 실력은 과히 나쁘지 않아서 보는 이들이 어리둥절해할 일은 없을 것이다. 각각의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므로 관객들이 그들에게 공감하는 것도 어렵잖을 듯하다.

특히 사회자는 자칫 무겁고 지루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그야말로 '쇼'로 승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민주적 공연문화의 정착을 위해서" 관객에게 극 진행의 선택권을 주는데 그것도 '쇼'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결과가 똑같다. 너무 분노하진 마시라. 어차피 쇼는 각본대로 흘러가게 되어있는 법 아닌가? 그저 속는 셈치고 사회자와 배우들이 얼마나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풀어가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갱스터스 파라다이스>로 들어갈 때 유의할 사항은 단 한가지다. 따지지 말고 상상할 것. 상상하고 또 상상하다보면 어느새 '당신들의 파라다이스'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참, 그 파라다이스에서는 맥주를 마시거나 담배를 펴도 괜찮다. 심지어는 '공연의 악'으로 규정되는 휴대전화의 사용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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