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3년만에 영화 필름에 담겨 귀국한다

[오클랜드 하늘에 뜨는 무지개 28]배우로 출연한 영화 <소시지 먹기>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등록 2004.10.04 14:42수정 2004.10.0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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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로 이민을 온 지 3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다른 교민들 같으면 그 사이 한 번쯤 한국을 다녀왔을 터인데, 우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모진 결심을 하고 이곳으로 건너온 이상 큰 일이 없는 한 한국행을 자제하자고 마음먹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렇게 2년 지나고 3년을 지나다 보니, 한국의 가족들과 친지들은 언제쯤 한국을 다녀가느냐고 그리움 섞인 투정을 담은 이메일을 가끔씩 보내오기도 합니다. 기회가 생기면 조만간 다녀가겠노라고 답장을 보내면서도,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여행 가방을 꾸려 한국을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곤 했지요.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면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로 한국을 다녀오는 교민들이 더 많으니, 우리가 지난 3년 동안 한국을 다녀올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고국의 가족들과 친지들이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가 될 테니까요.

그렇게 별일 없이 무사한 고국의 가족들과 친지들을 생각하며 마음 밖으로 자꾸 빠져 나오려는 그리움을 애써 누르고 달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써 달랜 그리움이 오는 7일 개막하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일이 바짝 다가오면서 다시 들썩거립니다.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 살 때, 저는 한 번도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기 했지만 서울에서 바쁘게 일했던 직장인이었으니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던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 이곳 뉴질랜드에서 사는 제게는 부산국제영화제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터인데, 무슨 까닭으로 마음이 설레느냐고요?

a <소시지 먹기> 촬영 딱딱이

<소시지 먹기> 촬영 딱딱이 ⓒ 정철용

그건 바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제가 출연한 단편영화 <소시지 먹기(Eating Sausage)>가 상영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른 단편영화들과 함께 묶여서 오는 10월 10일과 14일에 단 두 번 상영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리운 고국 땅에서 내가 출연한 영화가 상영된다는 사실에 제 마음은 몹시도 설레고 있습니다.


이민 온지 3년을 훌쩍 넘겨서야 비로소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 그것도 실제 내 몸이 가는 것이 아니라 35mm 영화 필름에 담겨 고국 땅을 밟게 되는 나의 이 특별한 고국행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소시지 먹기> 촬영 일정이 자꾸 늦춰지는 바람에 오디션에서 실제 촬영까지는 7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지요. 직접 시나리오를 쓴 인도 태생의 여자 감독 지아(Zia)와 함께 지겹도록 연기 연습을 한 끝에 올해 3월 말에 비로소 4일간의 촬영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a 인도 태생의 젊은 여자감독 지아

인도 태생의 젊은 여자감독 지아 ⓒ 정철용

매일 심야까지 강행군으로 이어진 촬영을 마친 후, 나는 지아에게 한국의 영화제에도 한 번 출품해보라고 부천국제영화제를 비롯한 몇몇 영화제 웹사이트들을 가르쳐 주었지요. 그러나 제작비가 모두 바닥이 나 자신의 컴퓨터로 손수 편집 작업을 하는 등 후반작업이 늦어져서 지아는 올해 7월에 열린 부천국제영화제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그보다 늦은 10월에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일단 디지털로 편집한 필름을 보내 ‘와이드 앵글’ 부문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영화제 사무국에서 요구하는 35mm 필름으로 변환하는 작업이 늦어져, 이것도 무산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가슴을 졸였지요.

그러다가 오는 10월 20일부터 열리는 런던 필름 페스티벌에도 <소시지 먹기>가 초청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지아가 여러 단체에 지원을 요청한 막바지 후반 작업 경비 마련이 겨우 가능해졌습니다. 그게 8월 중순 경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곧 제작진이 모두 모여서 완성된 35mm 필름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시사회가 있겠구나, 기대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9월이 깊어져 가는데도 지아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전화로도 연락이 안 되어 이메일을 띄웠더니, 지원금이 늦게 지급이 되어서 지금 웰링턴에서 마지막 후반 작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는 거였습니다.

a <소시지 먹기>의 한 장면. 여자 주인공 역을 맡은 박수애씨

<소시지 먹기>의 한 장면. 여자 주인공 역을 맡은 박수애씨 ⓒ 정철용

부산국제영화제 웹사이트의 프로그램에는 벌써부터 <소시지 먹기>가 초청작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데, 이러다가 출품기한에 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벌써 몇 군데에는 광고까지 해 놓았는데……

그러나 이런 나의 걱정은 추석 연휴 다음날 걸려 온 지아의 전화를 받으면서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지아는 며칠 전에 드디어 모든 작업을 마무리해서 특급우편으로 <소시지 먹기>의 35mm 필름을 부산과 런던에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 뿐만 아니라 지아 자신도 뉴질랜드의 한 정부기관에서 항공료를 대주어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 직접 참석하게 되었다고 몹시도 좋아하더군요.

마치 내가 가는 것처럼 기뻐서 흥분한 목소리로 잘 다녀오라고 말하는 내게, 지아는 자기가 한국 갔다 오는 길에 사다 줄 테니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말해주니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아마 자기만 한국을 다녀오게 되어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영화제 구경이나 잘하고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나 실컷 먹고 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지아가 처음 가보는 한국 땅에서 한국의 좋은 영화들을 많이 보고 좋은 한국 사람들도 많이 만나기를 빌어주었습니다.

a 나는 남자 주인공으로 <소시지 먹기>에 출연했다

나는 남자 주인공으로 <소시지 먹기>에 출연했다 ⓒ 정철용

지아는 영화제 개막일인 10월 7일에 한국으로 날아갑니다. 내 모습이 담겨 있는 영화 <소시지 먹기>는 벌써 고국 땅을 밟았겠지요? 그렇게 이미 나는 영화 필름과 함께 귀국했으니, 지아 혼자서 한국을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고 애써 위안을 삼습니다.

3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 나의 이 특별한 귀국은 영화관의 어둠 속 스크린에서 짧게 이루어지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 어둠 속에서 내가 만나게 될 수많은 관객들 중에는 분명 내가 그리워한, 아니 그보다 더한 그리움으로 나를 그리워한 이들도 있겠지요.

그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지난 3년 동안 한 번도 고국 땅을 밟지 않은 내 마음을 헤아려주기를 바랍니다. 몸은 떠나왔어도 마음만은 다 떠나오지 못한 많은 이민자들의 진심을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김치만을 먹다가 소시지도 먹어야 하는 삶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대와 불안을 함께 지닌 채 나는 부산에 도착합니다. 영화제가 끝나고 나면 지아와 함께 다시 돌아올 짧은 귀국이지만, 머무르는 동안은 부디 환영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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