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라도 볼 거냐고? 내가 좋아서 한다!"

[현장] 비문해 성인학습자들을 위한 제2회 한글날 글쓰기 대회

등록 2004.10.09 20:29수정 2004.10.1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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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청명한 가을 하늘'. 9일 국회 의원동산에서 전국 문해·성인기초교육협의회(협의회)가 주최한 제2회 한글날 글쓰기 대회가 열렸다.

'청명한 가을 하늘'. 9일 국회 의원동산에서 전국 문해·성인기초교육협의회(협의회)가 주최한 제2회 한글날 글쓰기 대회가 열렸다. ⓒ 김진석

전국 문해·성인기초교육협의회(아래 협의회)가 주최한 제2회 한글날 글쓰기 대회 '글자를 넘어 또 다른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 9일 이른 11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의원동산에서 열렸다.

이번 글쓰기 대회는 비문해 성인학습자의 학습 의욕을 높이고, 문해 교육의 사회적 인식을 넓히기 위해 지난 해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올해에는 소외계층의 문예정보화 교육사업을 추진 중인 한국정보문화진흥원도 함께 해 컴퓨터 대회가 추가되고, 참여인원도 느는 등 한층 풍성한 자리가 되었다.

이른 11시 간단한 개회식 후 주최측이 글쓰기 시작을 알리자 분위기는 좀더 진지해졌다. 전국 각지에서 새벽잠을 설쳐가며 여의도로 왔을 500여명의 참가자들에게선 피곤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마다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써내려 간다. 친구들 혹은 선생님을 붙잡고 철자를 묻느라 바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벌써 다 쓴 글을 돌려보며 애정이 가득한 심사평을 주고받는 모듬도 있다. 전자의 긴장과 후자의 여유가 선선한 가을바람에 뒤섞여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a 지난 1회 대회는 청와대 대정원에서 열렸다. 지난 대회보다 인원도 늘고 분위기도 좋아졌다.

지난 1회 대회는 청와대 대정원에서 열렸다. 지난 대회보다 인원도 늘고 분위기도 좋아졌다. ⓒ 김진석


"그 재미를 말로 못하지"

작년 청와대에서 열린 1회 글쓰기 대회에도 참가했다는 경기도 하남 모범학교 김석출(73), 윤남임(71)씨도 여유로운 축에 속했다. 이들은 유경험자(?)인 탓인지 기자가 소개하기도 전에 "우리, 신문에 내려고 왔구먼" 하고 웃으며 반겨주었다.

"글 모를 땐 어찌나 답답했던 지 몰라. 모범학교에서 보도 읽도 못하는 사람을 가르쳐줬지."(김석출씨)


"난 산중에 살아서 야학도 한번 못 가봤다구. 70이 넘어 가지고 한글 배우려니깐 머리에 안 들어가. 한 귀로 들어가선 곧바로 맞은 편 귀로 나온다니까(웃음)."(윤남임씨)

"나도 읽는 건 곧잘 하는데 쓰는 건 영 어려워. 받침은 복잡해서 통 모르겠어."(김)


"그래도 얼마나 재미난데. 70 넘은 노인네가 학교 가려고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책가방 메고 나오는데 그 재미를 말로 못하지."(윤)

마치 만담 하듯 대화를 이어나가던 두 사람은 "두 번째 대회인 만큼 상을 탈 수 있지 않겠냐"는 기자의 물음에 손을 내젓는다.

"우린 상탈 정도는 안 돼. 아직 멀었어. 그저 참가하는 데 의미가 있는 거지. 내년이나 되면 모를까?"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슬며시 끼어 드는 이가 있다. 바로 모범학교 반장 신순화(53)씨다. 7남매 중 맏이로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신씨는 작년 8월부터 모범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러운 거 보다도 갑갑했죠. 이젠 그러지않지, 은행에서 내 손으로 일 보고 버스 탈 때도 정류장 놓칠까봐 조마조마하지도 않구요. 한 자 한 자 배우는 게 정말 좋아요."

적지 않은 나이에 글을 배운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살림과 일을 하느라 시간을 낼 수 없어서 글을 배우지 못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신씨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의 대답은 시원하다.

"살림도 하고 부업도 하거든요. 피곤하죠, 그래도 밤이면 내일 학교 갈 생각에 행복해져요. 부끄러운 거요? 못 배운 게 한이 되면 부끄럽지도 않더라구요."

"반지보고 'ㅇ' 자도 알았습니다"

기자에게 글을 봐달라며 대뜸 종이를 내미는 참가자도 있었다.

a 머리가 하얗게 변한 세월. 그간 배우지 못했던 할머니의 손에 쥔 연필이 또박또박 세월을 써 내려가고 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한 세월. 그간 배우지 못했던 할머니의 손에 쥔 연필이 또박또박 세월을 써 내려가고 있다. ⓒ 김진석

제목: 낫놓고 ㄴ자 알기

-지은이 김순자

오십육년 고닫한 내인생
낫놓고 ㄱ자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인연되어 만난 한글학교 바쁜 틈틈이 시간내어
눈을 드드려 합니다
낫놓고 ㄴ자도 알았구요
반지보고 ㅇ자도 알았습니다

김순자 이게 내 이름이구요
박희남 이게 내 금쪽같은 아들이름임니다
내일은 물어보지 않고
버스도 타고 장도 보고
가벼운 발걸음을니다것임니다


"너무 잘 썼다"며 칭찬을 하자 김순자(51)씨는 "나의 직감으로 썼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남의집살이를 해야했던 김씨는 3개월 전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다. 그는 "무려 왕복 4000원의 교통비를 들여가며 배우니까 본전을 해야한다"며 의지가 대단하다.

"과거라도 볼 거냐고? 내가 좋아서 한다!"

이날 행사에는 지난 해 으뜸상 수상자 박순옥(76·대구 글사랑 학교)씨도 참석했다. <꿈>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인생사를 썼던 박씨는 부상으로 4박 5일 일본 연수를 다녀오는 행운을 안기도 했다.

"일본은 평생교육이 잘 되어 있더라구요. 선생들도 다 월급 주는데 여기 우리 선생님들은 월급 못 받잖아요. 그런 거 부럽지. 우리 선생님한테 미안하고."

그는 현재 글사랑 학교에서 한글 이외에도 영어, 컴퓨터, 수학 등을 배우고 있다.

"나이 많다고 한숨지을 거 하나도 없어요. 사람들은 그거 해서 뭐하냐고, 과거라도 볼 거냐고 하지만 뭘 하냐는 건 둘째예요. 내가 좋아서 하는 게 첫째지. 지금도 학교 안 나오면 막 머리 아프다구, 그래 아이들이 학교 가라고 그러지."

박씨의 다음 목표는 영어와 한자를 익혀 외국인들과 대화를 해보는 것이란다.

다들 글을 쓰느라 시끌벅적한 와중에 외따로 앉아있는 참가자가 눈에 띄었다. 유태순(79)씨는 "친구들이 차도 비니까 놀러 가는 셈 치고 가자고 해 왔다"며 웃었다.

"아버지가 딸년들은 글 배우면 시집가서 친정에다 편지한다고 못 배우게 했어요. 한 날은 야학 가서 공부를 했는데 그게 걸려 가지고 아버지한테 쫓겨나서 한 데 서있기도 했지. 그 길로 못 배웠어요. 그러고 나서 오빠한테 '가, 나, 다' 뭐 이런 거는 배웠지. 기본적인 건 읽지만 쓰진 못해."

친구들은 글을 배워서 글도 짓는데 부럽지 않느냐며 짓궂은 질문을 던지자 유씨는 태연스럽게 대꾸한다.

"이제 배우면 다 할 수 있는걸 뭐. 내년에 글 배워서 또 오면 돼."

a 올해 글짓기 대회에는 컴퓨터 부분도 있었다. 컴퓨터로 진지하게 삼행시를 쓰고 있는 할머니.

올해 글짓기 대회에는 컴퓨터 부분도 있었다. 컴퓨터로 진지하게 삼행시를 쓰고 있는 할머니. ⓒ 김진석

a '글자를 넘어 세상을 배웠습니다.'

'글자를 넘어 세상을 배웠습니다.' ⓒ 김진석

"문해학습권 국가가 보장해야"

평생을 먹과 함께 친구삼아 살아가리
솜씨 삐뚤삐뚤 꼬부랑 길을 가고있어
마다 발전하며 붓끝이 춤을 추네


역시 이번 대회 참가자인 한글공부 1년차 윤금출(54·대구 아름다운 학교)씨의 '한글날' 삼행시다. 이처럼 의원동산에서 만났던 여러 참가자들은 공부에 대한 의욕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공부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란 없다'는 진리를 몸으로 보여주는 한편 "고마운 선생님들이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한글날을 맞아 과학적이고 쉬운 언어, 한글이 여기저기서 칭찬을 받고 있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세계적으로 낮은 1%대라고 한다. 그러나 그 1%의 고통과 설움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글 교육을 비롯한 평생교육 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비문해자들이 그 1%를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은데도 말이다.

a 민주노동당 최순영의원이 글짓기 행사장을 찾아 어머니들을 격려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최순영의원이 글짓기 행사장을 찾아 어머니들을 격려하고 있다. ⓒ 김진석

이에 대해 협의회 대표 만희(41)씨는 "우리 헌법은 보장하고 있는 차별 받지 않고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며 "문해 학습은 국민으로서 마땅히, 당당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말했다.

문해 학습권 보장을 위해 협의회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문해는 사회적·국가적 문제이므로 소관 부처와 재정 지원의 근거 규정을 명확히 하는 성인기초교육법 제정, 둘째 교육인적자원부의 체계적인 문해 실태 조사와 성인 문해 학습권 보장 정책 실시, 셋째 평생교육정책사업 중 사문화되어있는 비영리 민간단체지원사업 실시를 통한 300여개의 비영리 문해학습 공동체 적극 지원 등이다.

만희씨는 "일본의 경우 야간 중학교를 만들고 정식 교사를 배치하고 급식도 제공한다"면서 "비문해자들의 경우 잘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수가 많으므로 지방자치단체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문해 교육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은 "학력만 인정하는 학벌주의에서 벗어나 평생 교육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인정하는 법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최 의원은 "특히 의무교육 기간에 배우는 글의 교육은 국가가 당연히 서비스를 해야하는 부분인데도 그런 인식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평생 교육하면 꽃꽂이, 노래교실 정도를 떠올리는 현재 교육 수준 또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최 의원은 "평생교육을 위한 지원책 마련이 17개 민주노동당 정책에 포함되어 있다"며 "외국 사례 분석, 토론회를 거쳐 고민을 넓혀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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