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고 한양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길 안내라도 하듯 소나무 숲을 뚫고 우뚝 솟아 있다김정봉
한식이나 추석이 되면 성묘객들로 번잡하지만 평소에는 찾는 이 없어 음산한 분위기인데 이런 곳에 어떻게 이처럼 큰 석불이 서 있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돈의문-녹번-고양(벽제)-혜음령-쌍불현-광탄-파주-임진-개성-의주로 이어지는 의주로 옛길 가운데 쌍불현은 용미리 석불입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고개라고까지 할 수 없을 정도의 언덕길이지만 예전에는 지금보다 높아 '현(峴)'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는 되지 않았나 싶다.
의주로 가운데의 혜음령은 북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마음을 다시 한번 가다듬는 곳이요, 서울에 진입하기 전에 여독을 풀며 마음을 추스르는 곳이었다. 혜음령은 보광사를 가기 위해 넘어가는 됫박고개와 함께 북으로 가려면 넘어야 하는 주요, 고개였다.
됫박고개는 됫박처럼 생겼다 하여, 혜음령은 그늘에 은혜를 입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의 고개는 대개 별명을 갖고 있는데 됫박고개는 영조와 그의 생모가 누워 있는 소령원 사이를 이 고개가 멀게 한다고 하여 영조가 더 파 낮추라고 해서 '더파기고개'라고도 한다. 혜음령은 고개 아래 벽제관에 이르기 전에 쉬었다 가는 고개라 하여 '쉬엄령고개'라고도 한다.
석불입상 앞길은 통일로와 자유로가 뚫려 한적한 곳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지름길이었으며 중국으로 통하는 주요 도로였다. 간선도로 주변에는 사신들과 왕의 행차를 위해 적당한 곳에 숙박 시설을 두었는데 혜음령을 사이에 두고 벽제관과 혜음원이 있었다. 지금은 건물은 소실되고 주춧돌과 그 터만 남아 있다.
벽제관은 조선시대의 역관터로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에 역관이 10여 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 나라의 사신들도 이 곳에서 머물렀다. 지금의 벽제관터는 인조 3년(1625년) 고양군의 관아를 옮기면서 지은 객관 자리로 일제시대에 건물의 일부가 헐렸고 한국 전쟁 때 문(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