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장한 두 손은 무엇을 빌고 있나?

의주로 옛길에서 만난 우리의 유산, 용미리 석불입상·벽제관터·혜음원지

등록 2004.10.10 13:11수정 2004.10.11 11:12
0
원고료로 응원
용의 머리는 한양에 두고 꼬리는 이곳에 머물러 용미리라 했던가? 용미(龍尾), 용의 꼬리를 의미하지만 무덤의 꼬리 부분을 일컫기도 하니 이 지역은 천상 묘지하고 관련이 깊은 모양이다. 용미리 시립묘지를 그윽하게 내려보는 석불입상은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 주기라도 하듯 혜음령 너머 장지산 자락에 우뚝 서있다.

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고 한양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길 안내라도 하듯 소나무 숲을 뚫고 우뚝 솟아 있다
북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고 한양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길 안내라도 하듯 소나무 숲을 뚫고 우뚝 솟아 있다김정봉
한식이나 추석이 되면 성묘객들로 번잡하지만 평소에는 찾는 이 없어 음산한 분위기인데 이런 곳에 어떻게 이처럼 큰 석불이 서 있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돈의문-녹번-고양(벽제)-혜음령-쌍불현-광탄-파주-임진-개성-의주로 이어지는 의주로 옛길 가운데 쌍불현은 용미리 석불입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고개라고까지 할 수 없을 정도의 언덕길이지만 예전에는 지금보다 높아 '현(峴)'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는 되지 않았나 싶다.

의주로 가운데의 혜음령은 북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마음을 다시 한번 가다듬는 곳이요, 서울에 진입하기 전에 여독을 풀며 마음을 추스르는 곳이었다. 혜음령은 보광사를 가기 위해 넘어가는 됫박고개와 함께 북으로 가려면 넘어야 하는 주요, 고개였다.

됫박고개는 됫박처럼 생겼다 하여, 혜음령은 그늘에 은혜를 입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의 고개는 대개 별명을 갖고 있는데 됫박고개는 영조와 그의 생모가 누워 있는 소령원 사이를 이 고개가 멀게 한다고 하여 영조가 더 파 낮추라고 해서 '더파기고개'라고도 한다. 혜음령은 고개 아래 벽제관에 이르기 전에 쉬었다 가는 고개라 하여 '쉬엄령고개'라고도 한다.

석불입상 앞길은 통일로와 자유로가 뚫려 한적한 곳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지름길이었으며 중국으로 통하는 주요 도로였다. 간선도로 주변에는 사신들과 왕의 행차를 위해 적당한 곳에 숙박 시설을 두었는데 혜음령을 사이에 두고 벽제관과 혜음원이 있었다. 지금은 건물은 소실되고 주춧돌과 그 터만 남아 있다.

벽제관은 조선시대의 역관터로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에 역관이 10여 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 나라의 사신들도 이 곳에서 머물렀다. 지금의 벽제관터는 인조 3년(1625년) 고양군의 관아를 옮기면서 지은 객관 자리로 일제시대에 건물의 일부가 헐렸고 한국 전쟁 때 문(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벽제관터.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초석만 남아 을씨년스럽다
벽제관터.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초석만 남아 을씨년스럽다김정봉
그 후 객관의 문도 무너져서 현재는 건물의 초석만 남아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중남미문화원'의 표지판만 커다랗게 설치하고 벽제관터에 대한 안내 표지판은 전혀 설치하지 않아 바로 옆에 두고 위치를 물어 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혜음원지는 파주시와 고양시를 잇는 고개인 혜음령의 동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혜음원에 대해서는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려 예종 16년(1120년)에 착공해 1121년 2월에 완공된 국립숙박시설로 특히 왕의 남행(南行)시 행궁의 기능도 담당했다 한다.


혜음원지. 고려 때 건립된 국립 숙박시설로 2001년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2007년까지 연차적으로 발굴할 계획이다.
혜음원지. 고려 때 건립된 국립 숙박시설로 2001년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2007년까지 연차적으로 발굴할 계획이다.김정봉
2001년부터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행궁을 포함해 모두 24동의 건물지와 더불어 각종 청자류 및 불구(佛具), 기와편 등이 출토되어 창건 당시의 웅대했던 모습이 확인됐다. 2007년까지 연차적으로 발굴 및 유적 정비사업을 벌인 뒤 국가문화재로 지정할 계획이다.

발굴시 나온 기왓장 더미. 또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듯하다
발굴시 나온 기왓장 더미. 또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듯하다김정봉
표지판도, 아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 혜음원지를 찾아가기가 무척 어렵다. 벽제에서 혜음령을 넘으면 용미4리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정확하게는 오거리) 거기에서 4시 방향으로 들어가면 된다. 워낙 찾는 이가 없어 한적하기만 한데 들길과 논길을 따라가다 보면 멀찌감치 소나무 몇 그루가 보이는데 그 밑이 혜음원지다.

혜음원지 가는 길. 논길을 타고 올라가면 혜음원지가 나온다
혜음원지 가는 길. 논길을 타고 올라가면 혜음원지가 나온다김정봉
벽제관과 혜음원은 서울을 넘나드는 주요 길목에 있다. 아마도 이곳을 거쳐 장정에 오르는 사람들 혹은 장정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의 안녕과 안위, 포근함과 평안을 비는 대상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용미리 석불입상은 바로 그곳에 위치하고 있다. 용미리 석불입상은 마을의 안녕을 빌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행인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서산마애삼존불이 백제 때 서산의 외진 산에 세워진 까닭과 통한다. 서산은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공주와 부여로 가기 위해 거쳐야하는 길목에 위치했다. 교역로 길목에는 행인의 안녕과 평안을 빌고 행인의 마음의 위안이 될 만한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교역을 하기 위해 왕래하는 행인들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이 꽤나 위안이 되었을 게다.

서산 마애삼존불. 볼이 터질 듯한 미소는 행인들에겐 꽤나 위안이 되었을 게다.
서산 마애삼존불. 볼이 터질 듯한 미소는 행인들에겐 꽤나 위안이 되었을 게다.김정봉
용미리 석불입상은 천연암벽을 몸체로 삼아 그 위에 목, 머리,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 놓은 석불이다. 왼쪽의 불상은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고 오른쪽의 불상은 원형의 갓을 쓰고 있는데 마을 앞의 장승처럼 각각 여상과 남상을 하고 있다.

머리 위에 갓을 씌우는 것은 눈이나 비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고려시대에 특히 유행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나 신복사지 석불좌상 등에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모습은 한국적인 미륵불의 특징처럼 나타난다.

용미리 석불입상. 생긴 대로의 석벽을 다듬어 몸을 만들고 그 위에 따로 목과 머리, 갓을 차례로 올려 놓은 불상으로 마치 장승을 보듯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용미리 석불입상. 생긴 대로의 석벽을 다듬어 몸을 만들고 그 위에 따로 목과 머리, 갓을 차례로 올려 놓은 불상으로 마치 장승을 보듯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김정봉
미륵상은 신체 비율에 맞지 않고 조각 수법도 뛰어나지 않지만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조각했기 때문에 위압감이 있다. 안동 제비원 석불을 연상시키나 근엄하기보다는 친근하고 토속적인 색채가 가미되어 있다.

뒤에서 본 용미리 석불입상. 용미리 묘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더욱 장대하게 보인다.
뒤에서 본 용미리 석불입상. 용미리 묘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더욱 장대하게 보인다.김정봉
오른쪽 석불의 합장한 모습은 석불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기라도 하듯이 지극히 내려보면서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다. 합장한 모양이 벙어리 장갑을 끼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을 자아낸다. 뒤쪽으로 올라가 보면 용미리 무덤이 훤히 보이고 장대함이 더욱 돋보인다.

합장한 두 손은 무엇을 빌고 있을까요?
합장한 두 손은 무엇을 빌고 있을까요?김정봉
서산마애석불이나 용미리 석불입상은 모두 시대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인다. 지금은 서산마애석불의 환한 미소는 어지러운 세상에 등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편히 해준다. 용미리석불은 용미리 묘지에 누워 있는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 주고 합장한 두손 끝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것 같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 2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3. 3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4. 4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5. 5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