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고교등급제' 즉각 백지화하라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42)

등록 2004.10.12 14:43수정 2004.10.1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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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양심을 말하지 않으면 누가 하는가?"


한 문화재전문가는 "아는 만큼 본다"고 했는데, 이 말은 아주 명언으로 작가는 "아는 만큼 쓴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2002년 7월 8일 <오마이뉴스>에 첫 기사를 올린 후 지금까지 430 건의 기사를 올렸다. 내가 가장 자신 있고 사실감 나게 잘 쓸 수 있는 분야는 '교육'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 분야의 글은 쓰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우기를 17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33년을 보낸 사람으로서 '교육' 문제에 관한 한 나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9일) 밤, 작가회의 모임에서 만난 남정현 선생이 "작가가 양심을 말하지 않으면 누가 하는가?"라고 하신 말씀에 많은 용기를 얻어 누가 뭐라든지 그때그때 내가 보고 느껴온 지난 삶의 이야기를 하찮더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 가장 큰 매력이요, 고역은 독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점이다. 독자의 댓글은 필자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경박함을 나무라거나 무식을 폭로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한 수 배우는 좋은 점도 있다. 악의에 찬 '독자의견'을 볼 때는 괜히 글을 올렸다는 후회를 하다가 그것도 나의 부덕으로 감수하기도 한다.

또 내 글을 좋아하는 독자의 격려에는 애써 자판을 두드린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진다. 한 번은 익명독자의견란에서 나의 출신 고교를 혹평한 것을 본 적이 있다. '3류 학교'니 '똥통학교'라는 표현이었다. '그런 학교를 나온 머리 나쁜 사람이 무슨 글을 쓰느냐'는 조롱 같았다. 그동안 나는 내 출신고교나 대학 이름을 밝힌 적도 없고, 의도적으로 자랑하거나 그와 반대로 비난한 적도 없었다.


그것은 앞으로의 사회는 지역이나 학벌 문벌이 행세해서는 안 된다는 나의 바탕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그 독자에게 항의의 답글을 쓰려다가 오죽 비난할 게 없으면 '출신 학교를 들먹였을까'하는 생각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사실 나는 그 독자의 지적대로 이름 있는 고교 출신이 아니다. 내 모교는 운동장도 테니스 코트 정도밖에 안 되게 좁은 데다가, 주간과 야간이 한 교실을 썼던, 화장실 냄새가 고약했던, 시설이 아주 열악한 학교였다. 그래도 나는 그제나 이제나 내 모교를 가난한 촌놈도 흔쾌히 받아준 고마운 학교로 여기고 한 편으로 늘 감사하고 있다.


지난날 어처구니 없는 제도적 입시 불공정

1961년 3월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아버지가 사서 보낸 고교 원서 4장(교통상 전기 2장, 후기 2장)을 써 가지고 서울로 왔다. 그때 서울 유학은 요즘 미국 유학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전기 고교 응시는 5대 공립고교 중 하나였다. 원서 접수 후 신문을 보니 경쟁률이 4:1 정도였다. 시험 결과는 낙방이었다. 내 실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다시 후기인 ㅈ고교에 응시했는데 학생들이 몰린 탓인지 경쟁률이 훨씬 높았다. 다행히 합격은 했으나 등록마감일까지 입학금을 내지 못해 입학이 취소된 걸 입학식이 지난 지 일주일 후에 찾아가 사정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한 달 후쯤 내가 시험을 치른 전기 고교의 2,3학년 학생들이 입학시험이 불공정했다는 이유로 데모를 했다는 신문 보도를 봤다.

내용인즉 당시 서울 시내 이른바 대부분의 명문 고교 입학 경쟁률은 신문에 보도된 대로이지만, 사실상 '동계 중학교 출신(경기중학교 출신이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식의)' 학생들에게는 특혜를 주어 낙제할 정도가 아니면 다 진학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타교생들은 한두 반밖에 뽑지 않아 사실상 타교생이 합격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타 학교 학생들에게는 경쟁률이 몇 십대 일 정도가 되는 불공정 입시였다.

후기에 합격한 ㅈ고교도 동계 진학 우선권을 줘서 ㅈ중학교 출신 110명이 합격해 사실상 경쟁률이 신문 보도보다 훨씬 높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엄청난 불공정 입시였다.

게다가 뒤늦게 ㅈ고교에 입학 수속을 마치고 교실에 가 보니, 학급당 60명 정원인데 80명이 공부하고 있었다. 그 영문도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각 반마다 20명씩 찬조금을 받고 입학시킨 보결생들이 우리 학년에만 120명이나 되었다. 내가 다닌 학교만 그런 보결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학교 이름에 따라 뒷문 입학금이 정해지고 그 돈을 교사들에게 별도로 지급하여 그 액수가 많을수록 '명문학교'였다.

그 무렵 대학의 입시 부정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정원보다 부정 입학생이 더 많은 대학도 있었다. 당시 문교부에서 감사가 나오면 임시 휴강하는 일도 있었다(불시 감사라지만 그 사실도 미리 귀띔을 받아 감사반이 허탕 치기 일쑤였다).

그 해 5.16 쿠데타가 있은 뒤 그 이듬해부터 '연합고사'라 하여 고교 입시 출제 및 선발권이 시교위로 넘어갔다. 대학도 별별 입시 부정을 다 저질러 더 이상 그냥 둘 수 없었다. 대학 입시 부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대입 예비고사를 치르게 했다. 대학 졸업조차 믿지 못해 국가에서 '학사고사'까지 치르게 하여 그 합격자에게만 학사증을 수여했던, 지금 생각하면 믿거나 말거나 한 일들도 있었다.

변별력을 잃은 고교 내신

고교등급제가 지금 '뜨거운 감자'로 여론의 초점이 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학의 학생 선발에 대하여 나름대로 공정성만 인정된다면 제삼자가 뭐라고 말할 수 없다. 그야말로 대학의 자존심 침해요, 대학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하지만 아직도 대학은 일반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수없이 대학의 부정 입시와 입학 등을 규제해 왔으나 감시만 조금 소홀하면, 아니 감시가 삼엄한 데도 부정은 비일비재였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 도저히 그 대학에 입학할 수 없는데도 당당히 합격한 학생의 부모를 보면 권력자들의 자녀들이거나 교직원 자녀들이었다. 더 분통을 터트렸던 것은 그 권력자가 여당만이 아니라 야당의원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국정감사장에서는 대학의 부정을 지적하는 쇼를 하곤 했다. 그래서 생겨난 속어가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사꾸라'라는 말이 유행했다.

지금 여론의 화살이 대학으로만 쏠리고 있는데 대학 측에서는 대단히 억울할 것이다. 우리 학생 우리가 알아서 뽑는데 웬 말이 많으냐고. 고교에서 내신 성적표를 받아보니 맨 '수' '우'만이라 성적의 변별력을 알 수가 없어서 그동안 축적된 우리 나름의 고교 내신 자료를 뽑아서 적용시키는데 무슨 문제냐고 항변하고 싶을 거다.

맞는 말이다. 교육부에서는 고교 교육정상화를 위해 대학에서 고교 내신을 입시에 적용케 하는 큰 보도(寶刀)를 고교에 넘겼다. 고등학교가 이 보배로운 칼을 잘 썼다면 이런 고교 등급제 같은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학교마다 내 학교 학생을 하나라도 더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한 짧은 생각으로 점수를 부풀려, 잔뜩 뻥튀기한 성적을 대학에 보냈다. 대학에서 그 성적을 받고 보니 고교에서 보낸 자료로는 학생의 능력을 측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고교 등급제 논란은 그 1차적으로 대학에 잘못이 있다. 왜냐하면 고교 등급제를 시행한다면 최소한 1년 전에는 그 사실을 공표했어야 했고, 백 번 양보해서 시행 전 공표 없이 고교 등급제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면 사후에라도 그 잣대를 공개하여 공정성을 검증받았어야 한다.

솔직히 말해 지금 국민은 대학을 믿지 않고 있다. 지금도 틈만 보이면 기여 입학제나 교직원 특혜 입학 등 온갖 편법을 다 동원하여, 입시제도를 기득권층 자녀에게만 유리하게 적용하리라는 의혹의 눈초리를 지울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 크게 손 볼 곳은 교육계

어제 산골에서 만난 시골사람도 우리 사회에 크게 손 볼 곳은 첫째로 교육계라고 말하였던 바, 나는 그 얘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수십 년간 몸담아왔던 곳이기 때문이다.

대학의 입시 공정성은 지금 우리 교육계의 가장 큰 문제다. 이 하나에 우리나라 교육이 좌지우지된다.

일부 대학은 지금까지 고교 등급제로 학생을 선발하면서 그 사실을 요강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 대학은 즉각 고교 등급제를 백지화해야 한다. 그리고 입시 요강에도 없는 고교 등급제를 적용해 합격자를 선발했으므로 이후 재사정하든지, 아니면 이 일로 억울하게 피해를 본 학생이 있다면 구제 방안을 마련해 줘야 옳다고 본다.

대학은 현행 입시제도대로 시행해 보고 문제가 있으면 교육부와 고교 측과 머리를 맞대어 더 좋은 방안으로 개선해야지, 대학의 자율성과 권위만 내세워 일방으로 몰아가는 것은 또 다른 사회 문제를 조장할 뿐이다.

어른들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등급을 매겨서 어린 영혼에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 교육계에 몸담은 모든 분들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를 하려 하거나, 우리 학교 학생과 내 자식에게 특혜를 주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정말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일대 각성하고 혁신하지 않는 한,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어렵다고 본다.

그럴 자신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교육계를 떠나는 게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옳다. 왜냐하면 교육자가 흐린 물은 마치 상류에서 흐린 물과 같아서 그 피해가 하류에까지 미치고, 다시 그 시내를 깨끗이 하자면 숱한 세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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