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자식들은 부모의 희생으로 자란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43) 텃밭에서 가을걷이를 하면서

등록 2004.10.17 13:49수정 2004.10.1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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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서리가 내린 날


a 된서리 내린 날 거둔 일곱 덩이의 애호박

된서리 내린 날 거둔 일곱 덩이의 애호박 ⓒ 박도

모든 산업 중에서 농사는 기후적인 요인에 가장 민감하므로 농사꾼들은 유독 날씨에 관심이 많다. 얼치기 농사꾼도 안흥 산골에 살면서 날씨에 더욱 관심이 많아졌다. 이곳 강원 산간지역은 겨울이 다른 곳보다 빠르며 길다고 한다. 10월 초순이면 서리가 내린다고 하여 얼치기 농사꾼도 일찌감치 텃밭의 남은 작물을 하나씩 거둬들였다.

옥수수는 이미 8월 하순에 모두 거둬들였고, 고구마도 추석 무렵에 다 캐서 갈무리하고 있다. 고춧대도 모두 다 뽑아서 붉은 고추, 푸른 고추, 고춧잎 등으로 나눠 이미 손질을 끝냈다. 그러나 팥과 콩이 다 여물지 않은 것 같아서 된서리가 내릴 때까지 며칠 더 두었다. 마침내 지난 13일, 된서리가 내렸다.

텃밭에 나가 보았더니 '된서리 맞다'라는 속담처럼, 농작물들이 초록빛을 모두 잃고 시들어 버렸다. ‘몹시 심한 꼴을 당하거나 모진 타격을 받다’라는 뜻의 '된서리 맞다'는 일년생 채소류나 곡식에게는 사형선고를 받는 일과 다름 없다.

일단 서리가 내리면 비닐하우스와 같은 인공적인 재배가 아닌 다음에야, 천연의 노지 작물 농사는 대부분 그걸로 끝이다(추위에 강한 시금치나 배추 등 일부 예외 작물도 있다).

늦둥이 수세미는 나의 바람과는 달리 끝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 버렸고, 호박들은 '서리 맞은 호박잎 같다'라는 속담처럼 하룻밤 새 아주 처절하게 시들어 버렸다. 그래도 그 호박그루터기에서 일곱 덩이의 끝물 애호박을 땄다. 아내는 끝물 애호박은 유난히 더 맛이 있다며, 그 중 세 덩이는 썰어서 말리고 두 덩이는 서울 아이들 몫, 두 덩이는 우리 몫으로 나눠 갈무리했다.


a 끝내 시들어 버린 늦둥이 수세미

끝내 시들어 버린 늦둥이 수세미 ⓒ 박도

텃밭에 남은 가짓대도 뽑고 팥, 콩도 모두 뽑아 묶어서 양지 쪽에 세워두었다. 바짝 말린 다음 도리깨질로 타작해야 하는데 얼마 되지 않기에 작대기로 두들겨 추수할 예정이다. 이로써 사실상 얼치기 농사꾼의 일년 농사는 끝난 셈이다.

첫 농사였지만, 대체로 평년작 이상이었다. 하늘은 이 얼치기 농사꾼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내가 노력한 이상으로 열매를 주셨다. 그리고 그 열매들은 내 땀이 들어간 탓인지 하나 같이 맛이 있었다.


나의 얼치기 여름짓기(농사)는 그야말로 무공해 유기농이요, 친환경 농사였다. 이런 얼치기 농사꾼에게도 귀한 열매를 주신 하늘에 감사하고 감사할 일이다.

모든 생명들의 자식 사랑은 같다

추수 이튿날 한 출판사와의 일로 이틀 동안 서울에 다녀왔다. 텃밭 옆에다가 주차를 하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아내가 메말라 버린 호박잎을 보고는 매우 안타까워했다. 아내는 호박잎을 무척 좋아한다. 여름 내내 호박잎을 쪄서 그 찐 잎에다 밥을 싸서 된장으로 간을 해서 먹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장모에게 호박잎으로 국을 끓인 걸 배워온 바, 그 호박잎 국도 맛이 담박한 별미였다.

이미 메말라 버린 호박잎과 줄기지만 가까이 가서 혹이나 아직 시들지 않은 게 있나 이 구덩이 저 구덩이 살폈다. 하지만 잎과 줄기는 이미 모두 초록빛을 잃었다. 그런데 풀숲 사이로 초록빛이 보여서 풀숲을 헤치자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끝물 애호박이 나왔다. 잎과 줄기가 모두 메말라 버린 호박에서 여태 초록의 애호박이 달려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a 풀숲에서 나온 끝물 애호박 세 덩이

풀숲에서 나온 끝물 애호박 세 덩이 ⓒ 박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머지 아홉 호박 구덩이의 호박 줄기 모두를 뒤졌다. 주먹 만한 애호박 두 덩이를 풀숲에서 더 찾아내었다. 순간 나는 모든 생명의 자식 사랑은 다 같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호박은 줄기와 잎이 된서리를 맞아 메말라 죽을지언정 제 열매만은 하루라도 더 살려서 제 몫을 다하도록 풀숲에다 가려두고 주인을 기다리게 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요, 바로 어버이의 마음이다.

풀숲에서 찾아낸 끝물 애호박을 보자, 그 애호박이 마치 전영택의 <화수분>에서 갓난애 '옥분이' 같았다.

화수분은 양평서 오정이 거의 되어서 떠나서 해져갈 즈음에서 백리를 거의 와서 어떤 높은 고개에 올라섰다. 칼날 같은 바람이 뺨을 친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앞을 내려다보다가 소나무 밑에 희끄무레한 사람의 모양을 보았다. 그곳에 곧 달려가 보았다. 가 본즉 그것은 옥분과 그의 어머니다. 나무 밑 눈 위에 나뭇가지를 깔고, 어린 것 업은 헌 누더기를 쓰고 한 끝으로 어린것을 꼭 안아 가지고 웅크리고 떨고 있다. 화수분은 왁 달려들어 안았다. 어멈은 눈은 떴으나 말은 못한다. 화수분도 말을 못한다. 어린것을 가운데 두고 그냥 껴안고 밤을 지낸 모양이다.

이튿날 아침에 나무장사가 지나다가 그 고개에 젊은 남녀의 껴안은 시체와, 그 가운데 아직 막 자다 깬 어린애가 등에 따뜻한 햇볕을 받고 앉아서 시체를 툭툭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어린것만 소에 싣고 갔다.
- 전영택의 <화수분>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이태 전 여름, 무너미 마을로 찾아뵐 때였다. 마침 그날 선생님의 글방 창문에 오이덩굴이 뻗어 오르는 것을 보고 얘기를 하신 것을 들은 바, <우리 말 우리 얼> 제16호에 실린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창문 앞 오이덩굴이 자꾸 뻗어 올라가는데, 나중에는 창틀 아주 위쪽까지 올라갔고, 거기 오이가 달렸다. 너무 높아 따지 못하고 두었더니 오이는 자꾸 굵어졌다. 그래도 오이는 감 따는 장대로 어찌어찌 해서 겨우 오이를 땄는데, 크게 놀랐다. 무거운 그 오이를 받쳐준 것이 받침대 나무의 옹이였던 것이다. 그 옹이가 있는 곳까지 가서 오이를 받쳐 놓았으니, 오이덩굴은 눈도 귀도 코도 입도 손도 발도 다 있고, 마음도 다 있는 것이 틀림없다.

a 풀숲에 가려진 애호박, 사진 촬영을 위해 풀숲을 걷었다

풀숲에 가려진 애호박, 사진 촬영을 위해 풀숲을 걷었다 ⓒ 박도

하늘의 마음, 하늘의 뜻

봄부터 이제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살펴본 바, 식물들도 눈 귀 입 손발이 다 있는 듯이 보였다. 수세미나 강낭콩 덩굴은 눈이 있는 것처럼 지줏대를 찾아 올랐고 호박과 오이들은 장마철은 용케도 열매를 키우지 않고 떨어트렸다.

모든 생명체는 종족을 보존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속성은 자기희생이다. 동물들에게 이런 속성은 대체로 암컷에게 강한데 견주어 드물지만 수컷이 더 강한 놈도 있다. 가시고기란 놈이 그렇다고 한다. 또 곤충류 중에는 새끼가 어미의 몸뚱이를 파먹으면서 자란 놈도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세상을 떠난다. 사람들이 제가 잘나서 자란 것 같지만 곰곰 따져보면 모두 자기 부모의 희생을 발판으로 자랐다. 그것은 하늘의 마음이요, 하늘의 뜻이기도 하다.

오늘 따라 메마른 호박잎과 줄기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잔영처럼 느껴지면서 새삼 그분들의 희생에 고개 숙여진다.

a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텃밭, 내년 봄까지 긴 겨울잠에 빠질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텃밭, 내년 봄까지 긴 겨울잠에 빠질 것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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