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깍쟁이 너는 아느냐, 군불 때는 재미를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44) 얼치기 촌부의 망상

등록 2004.10.19 00:57수정 2004.10.19 10:2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심심할 때는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요즘 나는 글이 잘 써지지 않거나 게으름이 나면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마당에 나가 도끼질을 한다. 그러면 머리가 가뿐해진다. 혼자서 아주 심심할 때는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면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면 무료함을 잊을 수 있다.

아내는 내가 하는 가사 일이 서툴다고 불만이지만 군불 때는 일만큼은 마음에 드는 양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쇠죽을 숱하게 끓였다.

그때는 장작이 귀해서 주로 짚이나 왕겨를 땠다. 짚을 땔 때는 부지런히 아궁이로 짚을 집어 넣어야 했고, 왕겨를 땔 때는 오른손으로는 풀무를 돌리고 왼손으로는 왕겨를 집어 불더미로 던져 줘야 불이 계속 타올랐다.

a 장작을 빠개는 필자

장작을 빠개는 필자 ⓒ 박소현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아궁이가 세군데였다. 안방, 건넌방 아궁이는 밥솥이 걸려 있는 부엌에 있었다. 이곳은 할머니나 어머니, 고모들이 끼니 준비로 불을 지폈고(사내아이는 부엌에 오면 고추 떨어진다고 못 들어오게 했음), 사랑은 쇠죽을 끓이는 아궁이로 남정네들이 불을 땠는데 주로 내가 많이 땠다.

우리 집만이 아니라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도 짓고 난방도 했다. 사람들이 사시사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 산들이 온통 민둥산으로 아주 볼썽사나웠다. “이 산 저 산 다 잡아 먹고 ‘어흥’하는 게 뭐냐?”는 수수께끼가 나올 정도로 '아궁이'는 산의 나무들을 다 집어 삼켰다.


아침 저녁 지을 때면 마을에는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 멀리서 보면 온 동네가 그 연기에 싸였는데 지금은 그런 광경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강원 산골에도 불을 때서 밥을 짓는 집이 거의 없다. 모두 전기 아니면 가스로 밥을 짓고 반찬을 한다. 난방도 기름 아니면 심야 전기 보일러다.

이러한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마침내 고질적인 벌거숭이 산이 산림 녹화가 잘 돼 지금은 전국의 산이 온통 숲으로 뒤덮였다. 그새 그 흔했던 나뭇꾼이 사라지고 푸나무 하는 이도 없어서 지금은 야산도 잔뜩 우거져서 벌초 때마다 산소로 가자면 곤욕을 치를 정도다.


지금 안흥 산골 집은 방이 네 개인 바, 본채에 두 개 아랫채에 두 개다. 본채는 심야 전기 난방이고, 아랫채의 하나(글방)는 전기 패널이고, 다른 하나는 온돌 아궁이다. 이 온돌방은 장판도 재래식 종이다.

요즘은 집집마다 나무를 때지 않는 탓으로 나무가 흔하다. 산에 오르면 간벌한 것도, 밭에는 옥수숫대, 콩대 등 부지런하면 얼마든지 주워서 땔 수 있다.

얼마 전에는 뒷산 주인이 산을 둘러 보려고 왔기에 나무를 좀 해서 땔감으로 쓰겠다고 하자, 잡목은 얼마든지 해서 때도 좋다고 허락했다. 산감이 나뭇꾼을 잡던 얘기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로 요즘 아이들은 그런 세월도 있었냐고 물을 게다.

불쏘시개로 장작에 불을 붙이자 그동안 바짝 메말랐던 나무가 "딱 딱" 소리를 내면서 잘도 탄다. 나는 고래로 빨려드는 불길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상념에 빠졌다.

어린 시절의 꿈

어렸을 때 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대도시가 아닌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은 점차 바래져서 초등학교보다는 중학교,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자 했고, 시골 학교보다 서울의 교사가 되고자 했고, 다시 도심의 교사가 되려고 했다.

제대 후 처음 나는 시골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 학교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서울의 중학교 교사가 된 후, 다시 도심의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30여년 교단에 섰다. 지난 학년도를 끝으로 교단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 산골로 내려왔다.

그 후 재직했던 학교 행정실에서 퇴임교사에 대한 훈장(옥조근정훈장)이 나온다고 받으러 오라고 했다. 나는 선뜻 훈장을 받으러 식장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훈장을 받을 만큼 이 나라 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는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의로운 교사가 되기보다는 분위기에 휩싸이는,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자라기보다 지식을 전수하는 월급쟁이에 지나지 않았던, 나약한 교사였다는 자괴감이 앞서서 끝내 식장에 가지 않았다.

현직에 있으면서도 학교 현장에 일어나는 일들에 때때로 괴로워했지만(하나의 예만 들면, 많은 학교들이 경쟁적으로 학생들에게 타율학습을 시키면서도 자율학습이라면서 돈을 거둬 수당을 나눠 갖는 일 등), 나는 용감하게 앞장서서 고치지도 못하고 늘 끌려 다니기만 하다가 마침내 물러났다. 참 못난 비겁쟁이였다.

지난 세월이 ‘일장춘몽’이라고 하더니, 서울에서 30여년의 교직 생활이 그렇다. 나에게 배운 학생들 모두에게 사죄하고 싶다. 이런 저런 망상을 하는데 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너 내 말 안 듣고 시골 내려가서 언제까지 있을 거냐?”고 얼른 짐 싸가지고 올라오라고 한다. 그의 긴 충고를 듣기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친구는 내가 어려울 때 밥과 잠자리를 줬던 고마운 친구였다. 그 친구의 마지막 말이다.

“이 불황에 붙어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붙어 먹지 않고, 왜 네 발로 철밥 그릇 차고 뛰쳐 나가 촌에 가서 사서 고생하니?”

‘너는 아궁이에 군불 때는 이 재미를 모를 거야, 이 서울깍쟁이야’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참나무 장작을 아궁이에 가득 밀쳤다.

오늘 밤은 방바닥이 아주 따끈할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