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정리, 그것이 왜 필요한가? ②

과거사 청산 작업에 거는 기대와 희망

등록 2004.10.14 08:16수정 2004.10.1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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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성과 참회, 그리고 정당성의 관계


오직 인간만이 가진 '마음'들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값진 것은 무엇일까? 나는 세 가지를 꼽는다. 감사하는 마음, 동정심, 그리고 수치심이다. 나는 이 세 가지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는 마음이라고 본다.

이 세 가지 마음은 결코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 유기적인 것이고 삼위일체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인격체는 이 세 가지 마음을 늘 고르게 지니고 산다.

나는 이 세 가지 마음 중에서도 요즘에는 수치심의 문제를 가장 많이 생각한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우리 시대에는 더욱 필요함을 느낀다. 수치심을 모르거나 잃은 행위들이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많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심의 한 가지이기도 한 수치심은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성찰 능력을 키워주며 분별심도 올곧게 유지시켜 준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는 통절한 반성과 참회를 낳게 한다. 반성은 수치심을 키워주고, 수치심은 반성을 견인해 줌으로써 사람은 분별을 잘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수치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기본적인 수치심의 작용을 안고 산다. 교육받은 사람들이 많은 이 시절에는 수치심에 대한 인식 범위도 자연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수치심이 반성이나 참회만을 견인하는 것은 아니다. 수치심의 작용이 때로는 역작용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자신의 치부를 애써 감추거나 분식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느 정도 수치심의 반작용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자 하는 의지는 곧 억지와 거짓을 낳는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악과 타협하는 것이 되고 만다. 양심이나 수치심의 작용이 거의 없는 경우도 있겠으나, 자신의 치부를 어느 정도 인식함으로써 갖게 되는 그 '가면의지'는 여러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 또 교육받은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에는 특히 논리를 가진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 가면의지가 더욱 다양하고 집요한 형태로 나타나고 횡행한다.

반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 안에서 참으로 고귀한 미덕이다. 무릇 인간의 올바른 향상의욕은 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개인이나 사회공동체 모두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발전은 이런저런 경험과 관련하는 반성으로부터 연유한다. 그러므로 반성은 발전의 원천이며, 따라서 거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존재한다.


그리고 반성은 일차적으로 과거의 경험과 연관한다. 지난 일을 오늘 바르게 인식하고 뉘우치는 것이 반성이다. 반성은 과거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늘 현재적인 것이며 미래지향적인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무시할 수 없다. 과거가 없는 사람은 오늘과 내일도 없는 법이다. 과거를 무시하는 사람은 오늘과 내일을 제대로 가꿀 수 없다. 과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다. 뒤를 제대로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먼 미래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는 법이다.

우리 사회에는 과거에 대한 망각을 미덕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모든 과거사를 단지 지난 일로만 여긴 나머지 모두 잊고 용서하자고 하는 사람들이다.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반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진정한 희망이 존재할 수 없다.

과거의 치부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어느 정도 인식을 함으로써 수치심의 반작용으로 가면의지를 갖는 사람들의 힘은 오늘도 여전히 막강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치부를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둔갑시키려고 한다. 그리하여 고도의 지식을 무기로 그럴듯한 수많은 논리들을 생산해 낸다.

이민족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무리들, 이민족의 통치를 받는 긴 세월 동안 민족의 고혈 위에서 호의호식하며 부역을 아끼지 않았던 민족반역자들, 오랜 군사독재 치하에서도 힘겹게 걸음을 떼는 민주주의를 능멸하고 훼방하며 독재권력의 주구로 봉사했던 사람들이 오늘날 애국의 이름으로 나라 걱정을 가로채서 다 한다. 갖가지 방법으로 나라의 혼란 상태를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면서 그 기이한 혼란을 빌미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고 한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오늘도 그들의 최대의 무기는 반공 이념이다. 북한의 김정일을 최대한 이용하는 일이다. 그것 외로는 그들이 지닐 수 있는 명분이란 아무 것도 없다. 물론 경제난국을 무기로 삼기도 하지만, 오늘의 경제문제가 노무현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고 노무현 개인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의 책동으로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도 잘 아는 나머지 한편으로는 나라 걱정을 하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라를 흔들고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갖은 술수를 다 부린다.

그들의 그런 책동이 부분적으로는 현실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고, 또 우리 민족의 슬픈 현실 속에서 그들의 반공 이데올로기 무기는 최대한의 효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 역시 한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오늘의 종합적인 조건과도 어울리지 않고 결코 미래지향적인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양심이나 수치심의 작용에 의한 반성이 없다. 반성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 그들은 반성이라는 말 자체를 금기한다. 일종의 수치심의 역작용이기도 한 치부 인식으로 말미암아 그 치부를 감추기 위한 가면의지에 더욱 몰두한다.

그들이 비록 자신들의 살길은 오로지 반공뿐이라는 외골 인식으로 말미암아 그 이념의 푯대에만 계속 의지한 채 비루한 지식인들의 갖가지 논리들을 무제한 생산하여 널리 퍼뜨릴 수 있는 막강한 현실 능력을 오늘도 지니고는 있지만, 진정한 수치심에 의한(과거의 치부들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참회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절대로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들이 아무리 자신을 분식하며 정당성을 가장한다 해도, 반성과 참회가 없는 곳에 근본적으로 정당성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3. 민족의 자존심, 정의로운 미래

소설가 이문열은 대표적 '친일 언론' <조선일보>의 '친일 불가피론'을 옹호하면서 자신도 일제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친일을 했을 것이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이 말에 대해서는 지난 2001년 7월 <일제 시대를 비켜 태어난 것에 대한 이문열의 생각을 보고>라는 글에서 충분히 논박을 했으므로 여기에서는 재론하지 않는다.

이문열은 그 말과 함께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히 단죄했던 프랑스의 나치 치하 4년과 우리나라의 일제 치하 36년을 단순 비교할 수 없다는 말도 했다. 조선일보 식의 친일 불가피론을 옹호하기 위해서 자못 그럴 듯한 궤변을 생산해낸 것이다.

그의 말대로 프랑스 나치 치하 4년에 비해 우리나라의 일제 치하 36년이 몇 배로 길어서 그만큼 친일을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심화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용인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친일의 죄상은 그대로 남는 것이고, 과거사 청산의 명제는 변함없이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광복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일찍이 반민족행위자들을 단죄하지 못한 것이 우리 사회에 큰 업보로 남아 있고 또 오늘에도 줄기차게 과거사 청산 논의가 제기되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반드시 필요하고도 중요한 일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역사는 계속적으로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단 근현대사에서 부끄러운 역사를 갖게 되었다.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36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도 부끄러운 역사이고, 광복 후에 반민족행위자들을 단죄하지 못했다는 것도 부끄러운 역사이다. 이민족에게 지배를 당하고 풀려난 후에 민족반역자들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고, 세계인의 의아심과 비웃음을 살 일이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우리의 빈약하고도 부끄러운 역사는 그러나 그것을 자각하는 국민들을 마냥 무시하며 나아갈 수 없었다. 우리는 저력을 지닌 민족이다. 해방 이후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민족의 정기를 포기하지 않고 과거사 정리라는 이름의 새 역사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국민이다.

참으로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는 일이다. 해방 이후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추구함으로써, 우리가 결코 쓸개빠진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계인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해방 이후 60년이 지난 세월 속에서도 우리가 기필코 이루어 내야 하는 과거사 정리는 우선 세 가지 면에서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하나는,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다.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36년이나 지배를 당했으면서도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지 못했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참으로 중심이 없는 열등한 민족임을 세계에 증명하는 꼴이었다. 그 사실에서도 일본인들은 내심 우리를 깔보았고, 미국인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와 일본을 현격하게 차별 대우하게 하는 한 가지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민족의 자존심을 확실하게 세워야 한다. 중심이 없는 흐리멍덩한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

또 하나는, 민족의 정기를 세우는 일이다. 온갖 바르지 못한 것들 속에서 겨레의 바른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거짓되고 바르지 못한 것들은 현실적인 단죄를 받거나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이 확연해질 때 숨죽였던 정기는 소생하고 똑바로 설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삶에 바른 기운이 바탕을 이루고 또 넘쳐나야 한다. 옳은 것들에 대한 신뢰와 추구의지가 생동해야 한다. 그래야 참다운 애국심도, 자기 본분에 대한 사명감도 강건해질 수 있다. 오늘의 과거사 정리는 적어도 민족 정기의 중요한 단초를 이룰 수 있다.

마지막 하나는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역사에 대한 성찰의 눈을 갖게 하는 일이다. 우리 국민은 역사의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결코 국외자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지금은 민중의 시대다. 국민 모두 역사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역사를 바르게 만들어 가야 한다.

역사에 대한 책무와 함께 역사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국민, 그런 민중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과거사 정리는 그런 국민을 만들어 가는 중요한 단초가 될 수도 있다. 바르지 못한 부끄러운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여 역사의 심판이 준엄함을 보여줄 때 국민들은 역사와 대한 책무와 신뢰와 애정을 새로이 자각하게 될 것이다.

아직은 과거사 정리(특히 친일 문제)가 어떤 방식과 절차로, 또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알 수 없다. 많은 잡음과 어려움을 힘겹게 돌파하며 진행이 된다 하더라도 과연 어떤 실효를 거두게 될지는 더욱 속단할 수 없다.

하지만 목표만큼은 분명해야 한다. 모든 국민이 민족의 자존심을 지니고 올바른 기운 속에서 스스로 역사를 만들고 가꾸어 가는 계기를 낳을 수도 있는 일이므로, 해방 후 60년이 지나고 있는 오늘의 과거사 정리는 참으로 중요하고도 절실하다는 사실을 가슴에 아로새겨야 한다.

과한 욕심일지 모르지만 그런 가치 지향을 분명히 할 때 우리의 역사적 과제인 과거사 정리는 능히 힘을 받고 또 속 빈 강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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