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처럼 살고 싶다

이제 교동을 떠나 부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등록 2004.10.15 07:37수정 2004.10.1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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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교동의 너른 들판. 추수한 논과 추수를 기다리는 논이 다르다.

교동의 너른 들판. 추수한 논과 추수를 기다리는 논이 다르다. ⓒ 박철

교동에 들어와 몸을 의탁한지 만 7년6개월 만에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어사지간 시골생활 20년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시골생활을 접고 떠난다고 생각하니 꼭 마음이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교동은 내 인생의 두 번째 고향 같은 곳이다. 교동을 떠난다고 하니 무슨 문제가 생겨서 떠나게 된 줄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교동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변 사람들은 다 안다.

평소 내 소신은 노자(老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과 같이 살자는 것이었다. 노자의 상선약수라는 경구가 내가 교동을 떠나는 이유라고 둘러대면 안 될까? 다음과 대목인데, 제대로 된 풀이인지 모르겠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이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이다. 심연을 닮은 마음이다. 사람됨을 갖춘 사귐이다. 믿음직한 말이다. 정의로운 다스림이다. 힘을 다한 섬기는 것이다. 때를 가린 움직임이다. 겨루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 받을 일도 없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내가 머무는 곳이 어디든지 이미 하느님께 맡긴 이상 내 의지와는 관계없다. 떠날 때가 된 것 같으면 또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 물 흐르듯이. 진즉부터 그런 삶의 화두를 붙잡고 살아왔다. 적어도 그 점은 아무런 과장이나 가식이 없다.

a 화개산에서 바라본 서해안. 작은 섬들이 어머니의 젓가슴 같다.

화개산에서 바라본 서해안. 작은 섬들이 어머니의 젓가슴 같다. ⓒ 박철

교동에 들어와 살면서 모든 것으로부터 새록새록 정이 들었다. 내가 섬기던 교우들은 물론이려니와 동네 사람들, 산과 들, 나무, 지나가는 풍경, 바람 소리, 밤하늘의 별, 들꽃 하나에 이르기 까지 내 마음에 진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다운가 보다.


오늘 아내와 마지막으로 화개산을 올랐다. 아내와 나는 가을풍경을 아쉬워하며 느릿느릿 오른다. 산 중턱 갈대숲이 바람에 춤을 춘다. 산의 고스락에 서서 교동의 너른 들판을 바라본다. 추수가 끝난 논과 추수를 기다리는 논이 확연히 구분된다.

갑자기 아내가 통곡을 한다. 가만 아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아내에게 창피하게 왜 우느냐고 묻질 못하겠다. 나는 교동의 풍경을 하나라도 더 마음에 담기 위하여 단전호흡을 하고 묵상을 하였다.


울음을 그치고 아내가 말한다.
"마음이 아프니, 몸도 아프네요. 완전 탈진한 기분이에요."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아내는 그날부터 몸살이 걸려 꼼짝을 못한다.

불혹(不惑)의 나이에 교동에 들어와 지천명의 나이에 교동을 떠나게 되었다. 한 때의 꿈과 청춘과 기쁨을 여기에 묻어두고 떠난다. 대신 교동을 내 마음에 담고 떠난다. 두고두고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a 화개산 정상에서.

화개산 정상에서. ⓒ 박철

내게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생소한 길이다. 힘껏 끌어안고 살면 되는 것이겠지. 지금 나는 새로운 길을 향하여 막 나설 참이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내 마음에 속내를 다 들어 내놓고
신에게 가장 솔직해 지는 길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길을 떠난다는 것은
사람이 절대로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길이다.
.......


-박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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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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