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사 쇠북소리 심청가 속에 흐르고

옛정취 찾아 떠난 상해, 항주, 소주여행(7)-쓰저우 한산사

등록 2004.10.16 09:09수정 2004.10.17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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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한산사에서 가까운 곳에 흐르는 수로, 마치 한산사 그윽한 종소리와 북소리에 둥둥 떠있는 느낌이다.

한산사에서 가까운 곳에 흐르는 수로, 마치 한산사 그윽한 종소리와 북소리에 둥둥 떠있는 느낌이다. ⓒ 김정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갔던 한 선비가 운이 나쁜 탓인지 3번째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갑갑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달도 져버려 서리가 내릴 만큼 쌀쌀한 새벽, 이런 저런 상념에 잠 못 이루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중 난데없는 까마귀 소리에 심란한 마음을 가눌 길 없는데 마침 불을 밝히고 출항을 준비하는 고깃배들의 분주함과 강가에 붉게 타는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기묘한 풍광은 비몽사몽 상태에서 한숨이라도 눈을 붙이려 뒤척이는 객의 심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그때였다. 갑자기 새벽예불을 알리는 한산사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달이 지고 까마귀 울고 서리가 하늘에 가득하고(月落烏啼霜滿天)
강가 단풍나무와 고기잡이 불 시름에 졸며 바라보니(江楓漁火對愁眠)
고소성 밖 한산사 (姑蘇城外寒山寺)
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배까지 들리네(夜半鍾聲到客船)

楓橋夜泊/장계


a 한산사 근처 수로에 놓여진  다리 혹시 당나라 시인 장계가 배를 타고 오다가 이곳에서 한산사의 종소리를 들었을까?

한산사 근처 수로에 놓여진 다리 혹시 당나라 시인 장계가 배를 타고 오다가 이곳에서 한산사의 종소리를 들었을까? ⓒ 김정은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져 많이 회자되고 있는 당나라 시인 장계의 시 속에는 종소리를 들은 후 시인의 느낌이 절묘하게 생략되어 있어서 시를 감상하는 이의 다양한 느낌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만약 그 때 내가 장계였다면 그 종소리를 듣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동안 심란했던 마음이 모두 정리되는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더욱 심란해서 결국 잠을 이루지 못했을까? 28천의 모든 중생들이 모두 구원되라는 자비지심이 담겨져 있는 종소리….

과연 과거에 낙방한 나그네의 쓰린 가슴 속에도 훈훈하게 스며들어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을까? 우리나라 새벽 산사의 종소리를 떠올리며 한시 속으로만 상상하던 한산사를 내 눈 앞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호구를 출발한 나는 한산사로 발길을 돌렸다.


경항(京杭)대운하와 고구려

쓰저우 시내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한산사로 가는 도중 창밖으로 경항(京杭)대운하가 보인다. 북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쓰저우 서쪽을 거쳐 남쪽 절강성의 항저우(杭州)까지 총 2000㎞의 길이를 자랑하는 이 운하는 진나라, 한나라에 이어 세 번째로 통일왕조가 된 수나라의 양제가 완성한 것으로, 진시황의 만리장성처럼 절대 권력이 아니면 도저히 시행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수양제가 백성들의 드높은 원성을 들으면서 이 운하건설에 집착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첫째는 쓰저우와 항저우의 미인들을 보러 남부시찰 할 때 호화 유람선을 이용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고구려 공격에 필요한 물자 및 병력 수송을 위한 것이다. 보통 중국에서는 종종 고구려와 관련된 이야기는 생략하고 수양제의 폭정에 대해서만 언급하곤 하는데 어딘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수양제가 아버지 '문제'를 살해하고 왕이 된 폭군으로 유명하다고 해도 명색이 각종 전쟁터를 아버지와 함께 섭렵했던 사람인데 그 먼 곳까지 유람이나 하겠다는 한가한 생각을 할 만큼 각지의 적들로부터 나라가 안정되었을까? 오히려 아버지 문제 때부터 신경에 거슬렸던 고구려를 침공하겠다는 집념이 부른 토목공사로 보는 편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이곳 쓰저우 지역의 운하는 수양제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마지막 왕 부차가 만들어 놓은 것을 수양제가 다른 지역의 운하와 연결시킨 것에 불과하다니 그러고 보면 오래전부터 쓰저우는 물이 풍부한 고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이 풍부하니 더불어 쌀농사도 잘되고 물자가 풍부하며 사람들이 먹고 살만하니 자연스럽게 학문과 예술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이곳 쓰저우의 곳곳의 수로와 검은 기와집, 수많은 정원풍경들은 함께 어울려 진지한 예술적 향취가 배어나온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한산사에 당도하니 가장 먼저 내 눈앞에 들어온 것은 수로주변의 오래된 기와집들이다. 마치 한산사의 그윽한 종소리와 북소리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다. 장계가 배를 타고 오다가 이곳에서 한산사의 종소리를 들었을까? 이곳이 장계가 한산사 종소리를 듣던 그곳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 느낌만은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수로의 배를 찾아보았으나 여행객의 마음을 알길 없이 속절없이 매어둔 배가 오히려 무심해 보인다.

한산사의 북소리 심청가 속에 울리고

a 한산사 대웅전, 여전히 관광객들은 붐비고 항저우의 영은사와는 달리 규모가 아담하지만 영은사와는 전혀 다른 개성이 있다.

한산사 대웅전, 여전히 관광객들은 붐비고 항저우의 영은사와는 달리 규모가 아담하지만 영은사와는 전혀 다른 개성이 있다. ⓒ 김정은

한산사 대웅전에는 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양측에는 벽을 따라 18나한상이 평범하게 진열되어 있어 여느 사찰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건 거대한 북과 녹음한 종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종각이었다. 예전부터 섣달 그믐날 자정만 되면 새해를 기념하는 한산사에는 108번 타종의식이 열리고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한산사를 찾아 종소리를 들으며 번뇌와 걱정을 털어버리고 한해의 행복을 기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유명한 한산사의 종은 청나라 때 일본인들이 약탈해 갔는데 아직 돌려받지 못하고 있고 대신 대웅보전 안에는 일본이 사과의 뜻으로 만들어 보내온 종이 있다.

우리나 중국이나 일본이 침입하여 문화재를 약탈해온 행태가 한두 번이 아니라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왠지 씁쓸한 마음에 대웅보전 안을 둘러보다가 문득 한산사의 커다란 북을 올려다보니 예전에 이해 못했던 판소리 심청가 한대목이 불현듯 떠오른다.

…깊은 밤에 고소성(姑蘇城)에 배를 매니 한산사(寒山寺) 쇠북 소리 객선(客船)에 이르렀다. (중략) 새벽 쇠북 큰 소리에 맑은 쇳소리 '뎅뎅' 섞여 나니, 오는 배 천리 원객(遠客)의 깊이 든 잠을 놀래어 깨우고, 탁자 앞의 늙은 중은 아미타불 염불하니 한산사 저녁 종소리 아닌가.…"

원래 심청이가 배를 타고 인당수로 가기 전까지 풍경을 묘사하는 대목 에 나오는 구절로, 중국의 유명한 경치와 그와 관련된 고사를 정신없이 나열하였기 때문에 몇 번을 봐도 잘 이해가 안 되던 것이었는데 한산사에 와서 문제의 쇠북과 종을 직접 보니 더욱 궁금해진다. 그렇게 특이하지도 않은 이 북과 종소리가 어떻게 한 번도 보도 못했을 멀고 먼 우리나라 남도의 판소리 심청가 한 대목에 등장했을까?

a 판소리 심청가 대목에 나오는 한산사 북

판소리 심청가 대목에 나오는 한산사 북 ⓒ 김정은

심청가를 처음 만든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많은 중국의 경치를 일일이 구경하지 않고도 소상히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한시를 많이 공부한 탓일 테니 분명 평민이 아닌 양반일 것이라는 추측은 하지만 왜 하필 심청이가 인당수로 가는 대목에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는 중국의 유명한 경치를 줄줄이 나열했을까? 평소에 이곳에 모두 가보고 싶은 소망의 표현이었을까?

지금 나는 한산사의 쇠북을 보며 무심코 심청가를 지은 이름 모를 선비를 떠올린다. 심청가 속에 배어든 한산사 쇠북과 종소리의 염원이 몇 백 년 후 한산사 쇠북 앞에서 우연히 그 대목을 떠올리는 한 평범한 여인네를 통해 일부나마 소원 성취할 수 있었기를 기원하면서.

한산과 습득

a 대웅전 뒤편에 걸려있는 한산과 습득도, 등모양의 금색종이를 제단에 놓고 기원하고 잇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대웅전 뒤편에 걸려있는 한산과 습득도, 등모양의 금색종이를 제단에 놓고 기원하고 잇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 김정은

한산사는 남북조시대 양(梁)나라 때에 창건된 사찰이다. 지난번 항저우의 영은사처럼 이곳도 5번에 걸쳐 소실과 재건을 되풀이 해온 사연 많은 건축물인데 현존하는 모습은 청나라 선통(宣統) 3년(1911년)에 증설된 것이다. 원래 창설당시의 이름은 '묘리보명탑원(妙利普名塔院)이었는데 당나라 때 이곳에 머문 한산과 습득이라는 유명한 스님 때문에 한산사로 바뀌었다.

대웅보전 뒤편에는 한산과 습득 스님을 그린 약간은 익살맞은 그림이 걸려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서화로 자주 그리는 <한산 습득도>이다. 중국인들은 그 앞에서 너도 나도 금빛 종이 모형을 그림 앞 제단에 놓은 채 기원을 하고 있다. 바로 앞에는 석가여래상이 있는데 왜 이들은 이곳에서 기원을 하고 있을까? 바라보기 너무나 먼 석가여래보다는 민중과 가까운 이런 스님들이 더 친근하기 때문일까?

하긴 일설에 한산스님은 문수보살의 환생이고 습득스님은 보현보살의 환생이라니 지장보살의 환생이라는 김교각 스님처럼 존경받는 것일 게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이 세 스님 모두 당나라 때 스님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러고 보면 중국 불교에 있어서 당나라 시기의 선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산자라고도 불리며 많은 선시를 남긴 한산스님은 원래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당할 정도로 거침없는 행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한산 습득도에 표현된 한산스님의 모습은 매우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들의 시나 대화만큼은 거침이 없어 오히려 그 도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어느 날 한산이 습득에게, "세간에 나를 비방하고, 나를 기만하고, 나를 모욕하고, 나를 비웃고, 나를 경멸하고, 나를 천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대처하나?" 하고 묻자, 습득은 웃으면서 말했다. "다만 그를 참아내고, 그에게 사양하고, 그를 피하고, 그를 내버려두고, 그를 견뎌내고, 그를 존경하고, 그를 상대하지 말고, 그리고 몇 해 지내거든, 또 그를 만나게나."

참 옳은 소리이지만 도인이 아닌 바에야 종교인들조차 서로 다투는 지금 같은 세상에서 과연 습득스님처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그렇기에 한산스님이 쓴 선시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도의 길은 안개만 자욱할 뿐 갈 수 없는 곳인지 모른다.

人問寒山道(인간이 한산길을 물으나)
寒山路不通(한산길은 통하지 않네)
夏天氷未釋(여름에 아직도 얼음은 풀리지 않고)
日出霧朦朧 (해는 떠올라도 안개만 자욱하다)
似我他由屆 (나라면 어떻게든지 도달하겠지만)
與君心不同 (내가 너의 마음과 같지 않구나)
君心若似我 (너의 마음이 만약 나같다면)
還得到其中(어느덧 그 곳에 도달하리라)


한산과 습득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미망에 빠진 중생일 뿐이라는 사실만 절절히 느낀 채 중국의 4대 정원중 하나라는 졸정원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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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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