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연꽃이 내 마음을 보고 있네

옛정취 찾아 떠난 상해,항주,소주여행기(8)- 쓰저우 졸정원

등록 2004.10.22 06:34수정 2004.10.22 14:44
0
원고료로 응원
a 졸정원 입구 전경. 외국인들이 연신 아름답다고 감탄하던 곳이다.

졸정원 입구 전경. 외국인들이 연신 아름답다고 감탄하던 곳이다. ⓒ 김정은

중국의 4대 정원 중 하나인 졸정원에서 맨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커다랗고 이상한 구멍이 숭숭 나 있는 태호석과 호수 전체를 뒤덮은 연꽃, 그리고 버드나무였다.

연꽃에 들어서면 구름은 별을 그린다고 했던가? 구름 한 점 없는 쨍쨍한 하늘 아래에서 망망한 연꽃의 바다에 들어서니 가끔 불어 오는 바람결 따라 살살 흔들리는 능수버들 가지 하나의 움직임마저도 왠지 심상치 않아 보인다.


관련
기사
- 중국 항저우에서 만난 12구멍 연탄

명나라 어사 왕헌신이 말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은퇴하고 이곳 쓰저우에 정원을 만들어 연꽃을 심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발을 흙탕물에 담그고 있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청정하게 살아 보리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자에 앉아 그 너머 보이는 연꽃을 보고 있자니 문득 내가 연꽃을 보는 게 아니라 이 수많은 연꽃들이 내 마음 속을 물끄러미 쳐다 보고 있는 것 같다.

a 구름 한점 없는 쨍쨍한 하늘 아래에서 망망한 연꽃의 바다에 들어서다. 가끔 부는 바람결따라 살살 흔들리는 능수버들 가지 하나의 움직임마저도 왠지 심상치 않아 보인다.

구름 한점 없는 쨍쨍한 하늘 아래에서 망망한 연꽃의 바다에 들어서다. 가끔 부는 바람결따라 살살 흔들리는 능수버들 가지 하나의 움직임마저도 왠지 심상치 않아 보인다. ⓒ 김정은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

<연꽃구경> (정호승) 중


서진시대 미남 시인으로 알려진 반악(潘岳)의 시 한거부(閑居賦)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孝乎惟孝 友干兄弟(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 있는 것)
此亦拙者之爲政也(이 또한 못난 사람이 다스리는 일이지)


a 원앙관의 파란색 유리, 파란색 유리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눈 내린 것처럼 보인다.

원앙관의 파란색 유리, 파란색 유리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눈 내린 것처럼 보인다. ⓒ 김정은

못난 사람의 다스림(拙者之爲政)이라…. 권력 주변을 맴돌며 끝없이 권력 바라기를 한 반악의 시를 인용했기 때문일까? 이름은 졸정원이지만 정원 내에는 권력을 떠난 자의 탈속적인 분위기보다는 권력을 잡았을 때의 화려했던 영화를 잊지 못하는 분위기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졸(拙)로 시작해서 졸(拙)로 망하다

'졸정원'이라는 이름과 관련해서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졸정원의 주인인 왕헌신에게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주색잡기에 정신없는 망나니 외아들이 있었다. 이런 아들의 앞날이 은근히 걱정된 왕헌신은 어느날 쓰저우 시내 도교 사원인 현묘관(玄妙觀)에서 앞으로 졸정원의 앞날에 대하여 점을 봤다. 점쟁이가 뽑으라고 내어 놓은 산괘 중에서 왕헌신이 뽑은 것이 하필 '졸(拙)'자였고, "손을 흔들면 빠져 나간다"는 점괘 해석을 들은 왕헌신은 자신의 사후 졸정원의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a 각양각색의 포지(鋪地), 장인들이 일일이 돌을 쪼아 만든 일종의 보도 블럭이다.

각양각색의 포지(鋪地), 장인들이 일일이 돌을 쪼아 만든 일종의 보도 블럭이다. ⓒ 김정은

예상대로 졸정원은 그가 죽은 후 외아들이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한 결과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 가게 되었다고 하니 한마디로 졸(拙)로 시작해서 졸(拙)로 망한 것이다.

졸정원의 수많은 정자와 다리는 주로 물을 중심으로 하여 정원 복도와 호수를 건너는 다리를 주(主)로, 각 정자와 대청을 부(副)로 하여 각각의 특색을 지니고 여기 저기 세워져 있다. 따가운 햇살 아래 정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귀신 접근을 막는다는 목적으로 지그재그형으로 세운 다리와 정자가 연꽃잎 위로 함께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든다. 이 외에도 왕헌신은 너무 정적인 정원 분위기를 피하고자 곳곳에 분재나 새, 꽃, 태호석을 배치해 놓았다.

부부만의 공간이라는 원앙관의 연못 속에는 원앙새를 키우고 있었다. 원래는 36마리의 원앙새를 키웠다는데 지금 내 눈 앞에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계절 차이가 크지 않아 눈 구경을 하기 힘든 쓰저우에서 눈구경하는 듯한 착각을 주지 위해 파란색 창유리를 달았다.

a 졸정원에서 자주 보는 태호석. 태호 속에서 채취하는 정원 장식용 돌로 유명하다

졸정원에서 자주 보는 태호석. 태호 속에서 채취하는 정원 장식용 돌로 유명하다 ⓒ 김정은

원앙관을 지나 지금의 보도 블럭과 같은 역할을 하는 다양한 모습의 포지를 밟으면서 얼마를 걸었을까? 어디선가 본듯한 낯익은 대나무 숲이 펼쳐졌다. 문득 우리 나라 소쇄원 입구가 생각났다.

물론 대나무 숲만 비슷할 뿐이지 우리 나라의 소쇄원과 이곳은 정원 주인의 가치관부터가 다르다. 이곳 졸정원의 주인 왕헌신은 은퇴한 관료에다 돈이 풍족해서인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평지에 인공 가산을 만들고 인공 연못을 파서 잉어를 놓아 기르고 태호에서만 생산된다는 특이한 돌 태호석을 파내어 여기저기 놓았다. 반면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는 관직에 나가본 적이 없는 선비라 기존의 계곡지형과 나무를 최대한 살린 상태에서 건물 두 채만 달랑 있는 단순 소박한 구조이다.

중국의 정원과 한국의 정원

졸정원은 호화스러우나 정적인 분위기다. 크고 넓은 정자 속 고급 의자에 앉아 고급 차를 마시며 한결같은 연꽃들과 잉어를 바라보면 차향과 함께 어지러웠던 마음이 푸근히 가라앉는 것 같다.

a 어디선가 본 듯한, 낯 익은 대나무 숲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낯 익은 대나무 숲이 펼쳐지고 있었다. ⓒ 김정은

반면 소쇄원은 소박하지만 매우 동적인 분위기이다. 광풍각에 편하게 앉아 얕지도 너무 깊지도 않게 수위가 조절된 계곡물을 굽어보면 계곡물의 모습과 소리와 색깔이 계절따라 시간따라 각양각색이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소쇄원은 중국 정원에 비해 소박하지만 그 면면을 살펴 보면 자연의 삼라만상이 골고루 들어가 있는 우리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a 졸정원은 호화스러우나 정적인 분위기이다.

졸정원은 호화스러우나 정적인 분위기이다. ⓒ 김정은

중국의 정원이 그 호화로움으로 여행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면 한국의 정원은 소박함 속에 숨어 있는 변화무쌍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소쇄원 생각이 나서일까? 졸정원을 나오는데 문득 내 나라의 익숙한 냄새가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a 복도 지붕 틈새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다.

복도 지붕 틈새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다. ⓒ 김정은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졸정원을 뒤로 하고 버스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상하이를 향해 달렸다. 버스 창가에서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쓰저우와 기약없는 이별을 했다. 안녕, 쓰저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2. 2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3. 3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연도별 콘텐츠 보기